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한고조 유방과 그의 장남

중은우시 2013. 8. 15. 18:18

글: 동리채국(東籬採菊)

 

<사기>의 "고조본기"를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고조 유방이 한왕에 봉해지기 전에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여태공의 딸인 여치(呂稚), 즉 나중의 여후(呂后)이다. 여후는 평생동안 자식을 둘 낳는데, 한 명이 효혜제(孝惠帝)이고, 다른 한 명이 노원공주(魯元公主)이다. 

 

이 본기의 말미를 읽으면 이런 내용이 발견된다. 효혜제에게 갑자기 형이 한 명 나타나는 것이다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고조는 여덟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서자인데,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이다. 차남은 효혜제로 여후의 아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유방은 여후와 결혼하기 전에 여자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비록 정실부인은 아니었지만, 유방과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는 말이다.

 

이어서, <사기>의 "제도혜왕세가"를 읽어보면 명백해진다. 원래 유방은 여후와 결혼하기 전에 애인이 있었다. 성은 조(曹)였고, 그녀는 유방과의 사이에 아들 유비를 낳는다.

 

이 유비는 서출이어서 태자가 되지 못한다. 조씨는 시정의 여인으로, 성격이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드셌다고 한다. 말하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체면을 생각지 않았다. 조씨는 일찍 죽는데, 유방은 이 엄마를 잃은 아들을 동정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그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친의 사랑이 없이 큰 이 아이가 부친의 사랑이라고 느낄 수 있게 하려 했다. 그래서 부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유방은 이 큰아들에게 봉상을 크게 하사한다. 고조6년에 제왕에 앉히고, 70개성을 봉지로 하사한다. 유방의 아들중 가장 먼저 왕에 봉해지고, 점유토지가 가장 넓은 왕이 된다.

 

효혜2년, 유비는 입경하여 황제를 알현한다. 계모인 여치는 그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이 서출자식은 그렇게 큰 토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그레서 그에게 독주를 내린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독주를 효혜제가 집어서 마시려 한다. 여후는 깜짝 놀라서 효혜제의 잔을 빼앗는다. 이런 거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유비는 거처로 되돌아온 다음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제 끝장이다. 이 계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계모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래서 그의 내사는 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는 성양군을 노원공주에게 선물로 준다. 그러자 계모는 기뻐했고, 그를 봉지로 돌려보낸다.

 

제왕 유비는 13년간 재위했고, 효혜6년에 사망한다. 유비의 아들 유양(劉襄)이 제왕을 승계한다. 나중에 유양이 동생 유장(劉章)을 보내어 궁안에서 시위로 지내게 한다. 이때는 여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이다. 태후는 기뻐하여 유장을 주허후(朱虛侯)에 봉하고, 여록(呂祿)의 딸을 유장에게 시집보낸다.

 

바로 이 주허후 유장이 나중에 여씨를 제거하고 유씨정권을 되찾는데 불후의 공훈을 세운다. 여태후가 죽은 후, 당시 여록이 상장군이고, 여산(呂産)이 상국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모두 도성 장안에 거주했다. 여씨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식은 유장이 자신의 부인을 통하여 얻었다.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유장은 친히 여산을 죽인다.

 

여씨의 난을 평정한 후, 여러 신하들이 대왕(代王) 유항(劉恒)을 황제로 모신다. 이 유항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문경지치"의 한문제이다.

 

유방이 지하에서 이를 알았다면 당연히 정부 조씨가 자신을 위하여 유비의 일맥을 낳아준 것에 고마워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