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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과 그의 형제들

by 중은우시 2013. 3. 13.

글: 진사황(秦四晃) 

 

TV드라마 <초한전기>를 보면, 한고조 유방의 가정구성원에 그의 부친 유노태공(劉老太公)을 제외하면 단지 성실한 둘째형과 둘째형수만이 나타난다. 큰형수는 아마 어느 회에선가 나타났다가 그 다음에는 소식이 없어졌다. 친구가 호기심에 물어왔다: 유방의 큰형은 누구인가? 뭘하던 사람인가?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유방은 4형제이다. 큰형은 유백(劉伯)이고, 둘째는 유중(劉仲, 일명 劉喜), 셋째가 유방(劉邦, 일명 劉季), 넷째가 유유(劉遊, 일명 劉交).

 

큰형 유백은 결혼한지 몇년이 지나지 않아 아들 유신(劉信)을 낳고 젊어서 세상을 뜬다. 고아과부가 남았는데, 아이는 바로 유방의 조카인 유신이고, 그는 과부인 유방의 큰형수가 혼자서 길렀다.

 

둘째형 유중은 TV에서 모두 보았듯이 기본적으로 그런 모습이다. 사람됨이 돈후하고, 겁이 많고,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겁냈다. 마누라에게도 꼼짝을 못했다. 유방이 천하를 얻은 후, 아무리 무능해도 자신의 친형이다. 일인득도, 계견승천(一人得道, 鷄犬昇天). 한 사람이 득도하면 개나 닭이나 모두 하늘로 올라간다. 유중은 대왕(代王)에 봉해지고, 오늘날의 하북, 산서 일대를 관리한다. 그런데 "흉노가 대를 공격하자, 유중은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고 나라가 망한다. 그는 샛길로 낙양에 와서 천자인 유방에게 호소한다. 유방은 친형이라는 점때문에 차마 처벌하지 못하고, 대왕에서 폐하고 합양후(陽侯)로 삼는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부친은 이렇게 무능하였지지만, 능력도 있도 담량도 있는 아들을 낳았다. 한경제때 앞장서서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고, '칠국의 난'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이 멍청한 둘째형 유중의 아들인 오왕(吳王) 유비(劉)이다. 이를 보면 혈연유전이라는 것도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되는 것같다.

 

넷째동생 유교는 한고조와 동부이모의 형제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글읽기를 좋아하고, 시문에도 능했다. 셋째 형 유방을 따라 생사를 함께하며 각종 전투에 참가한다. 유방은 이 동생을 아주 좋아했다. 고조6년(기원전201년), 한고조는 한신을 연금하고, 그의 초왕 감투를 빼앗아서 이를 유교에게 넘겨준다.

 

이렇게 봉상을 내린 것을 보면, 둘째형, 넷째동생은 모두 상을 받았다. 그러면 왜 유방은 큰형집안에는 조그만큼의 상도 내리지 않았는가? 큰형이 일찍 죽었더라도, 그의 아들 유신은 이미 자라서 성인이 되지 않았는가. 여기에는 원인이 있다. 상당히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찌기 유방이 형수와 사이가 나빳고 원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원한은 이렇게 맺어졌다. 원래 한고조는 젊어서 하루종일 놀면서 술이나 마시고 과부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한 무리의 깡패들과 어울려 싸움이나 하고 다니며 사고를 쳤다. 큰형수는 이 시동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아했던 점은, 유방이 일을 벌이고 관청에서 붙잡으려 하면, 이들 무리를 데리고 형수의 집으로 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수에게 이들의 먹고 마시는 것을 돌보게 했다. 큰형수는 그들을 못마땅해했고, 나중에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유방의 일당이 집으로 오자, 형수는 일부러 국솥을 주걱으로 긁어서 소리를 냈다. 이는 솥에 국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방의 일당은 이 모습을 보고, 무슨 뜻인지 알고서 유방을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유방이 솥으로 가서 쳐다보니 아직 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큰형수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너무나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문에 한고조가 황제에 오르고 나서 다른 형제자매는 모두 분봉해주었지만, 오직 큰형의 아들인 유빈에 대하여는 조그만큼의 봉상도 내리지 않았다. 유노태공은 이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래서 유방을 찾아가서 이 조카에게도 봉상을 내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방은 부친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그 조카에게 봉상해야하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너무나 어른스럽지 못합니다. 결국 부친이 여러번 권하자, 유방은 조카 유신에게 '후(侯)'의 작위를 내린다. 그러나 후의 작위를 내렸다는 말을 듣고 그 형수는 얼굴이 벌개져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유방이 조카 유신에게 봉한 작위는 "갱갈후(羹頡侯)"이다. 갱갈후가 무슨 뜻인가? 안휘 서성현에 갱갈산이라는 산이 있다. 유신의 봉지가 바로 이곳이다. 실은 유방이 일부러 이런 이름을 지어 형수가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갈(頡)"은 "알()"과 같은 뜻으로 긁는다는 의미이다. 갱갈은 결국 국솥을 긁는다는 뜻이다. 예전에 국솥을 주걱으로 긁는 소리를 내서 국이 남아있지 않다며 자신의 친구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던 것을 풍자한 것이다.

 

이를 보면 유방은 아주 속이 좁았던 것같다.

 

송나라때의 소식은 유방이 큰형수에게 이렇게 복수한 것을 영 못마땅해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내대장부인 한고조 유방이 도량이 넓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솥을 주걱으로 긁은 원한은 잊지를 않으면서, 그 자신은 부친 유노태공이 너와 같이 옛날에 항우가 그를 솥에 넣어 삶으려고 했을 때, 너는 부친을 삶으면 한 그릇 나눠달라고 했던 원한을 기억하고 있을까봐 겁나지 않더냐.

 

큰형후는 사후에 개략 후회하며 자책했을 것이다.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술이나 좋아하고 여자를 밝히던 시동생이 나중에 천자의 자리에 오를 줄. 자신의 안목이 가게를 하던 여인들만 못하다는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한서.본기제일,고조유방상>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방이 성공하기 전에 자조 왕온(王), 무부(武負)의 가게에서 술을 외상으로 먹었는데, 이 두 여인은 안목이 있었다. 유방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가 매번 그녀들 가게에 와서 술을 마시면 왕온, 무부는 잘 대해주었고, 더더욱 유방을 감동시킨 것은 연말이 되면 유방의 외상금액을 모조리 면제해주었다는 것이다.

 

우둔한 형수는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여 유방이 성공한 후 모욕을 당했다. 왕온, 무부라는 두 혜안을 가진 여인들은 나중에 한나라황제가 된 유방에게 어떤 보답을 받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