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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에 대한 900년간 역사평가의 변천

by 중은우시 2012. 2. 7.

글: 유앙(劉仰)

 

 

 

악비(岳飛)는 지금부터 900여년전에 살았던 중국역사상의 중요인물이다. 그의 사적은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악비가 중국일반백성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악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역사인물이 있다. 바로 진회(秦檜)이다. 진회는 역사에 오명을 남긴 인물이다. 최근 들어 역사의 본모습을 되찾아야한다는 붐이 일면서 진회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상 당금 진회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여러 견해는 중국역사상 일찌기 존재해왔다.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진회의 명예회복은 항상 악비에 대한 폄하나 비판과 같이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악비사후 900년의 역사에서 악비가 받은 역사평가를 살펴보는 각도에서 악비가 후세인들에 의하여 얼마나 혼란스럽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동시에 진회는 어떻게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명예회복을 시도하였는지도 살펴보자.

 

악비를 비판하면서, 악비가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견해의 하나는 악비가 지휘를 따르지 않고, 망자존대(妄自尊大)한 군벌이었다는 것이다. 먼저 이 견해를 제출한 사람은 진회 및 그 동료들이었다. 진회는 악비를 죽일 이유를 찾기 위하여, 핑계를 찾기 위하여, 그의 양자등과 함께 역사를 대량으로 뜯어고쳤고, 악비가 군벌이라는 논점을 만들었다. 다만, 진회가 악비를 군벌이라고 말한 것은 악비의 억울한 사건이 막 형성된 후의 일정기간동안이었다. 진회등은 여론을 통제하여 한때 유행시킨 것이다. 송효종이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킨 후, 이런 주장은 기본적으로 버려진다. 그후, 800여년간을 지나 민국시대인 1923년, 역사학자인 여사면(呂思勉) 다시 한번 이 견해를 내놓는다. 악비는 군벌이고, 진회는 억울하다는 것이다. 여사면이 당시에 이런 견해를 제기한 배경은 청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사회는 군벌혼전의 국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여사면은 군벌을 비판하고자 했다. 그 생각은 이해된다. 그러나, 여사면 선생은 악비의 역사를 아무렇게나 빌려왔다.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여 진회를 변명해주었다. 필자가 보기에 "차고유금(借古喩今)"이지만 대상을 잘못 골랐다. 비록 여사면 선생이 역사연구에서 몇 가지 업적이 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여선생이 분명히 잘못했다. 그후 악비가 군벌이라는 견해는 비록 일부 사람들이 얘기하기는 했지만, 이미 더 이상 신선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견해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 체무완부(體無完膚)한 상태이다. 중국백성들도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다 악비가 군대를 엄명하게 다스리고 군기가 엄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악비가 남송(南宋)에서 명예회복된 후 개략 800년의 시간동안, 그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큰 변화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악비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비록 일부 이견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만, 그런 의견도 악비의 이미지를 기본적으로 뒤집지는 못했다. 그리고 악비를 정면으로 비판하지는 안핬다.

 

원나라는 악비에 대한 평가가 다소 애매했다. 남송은 원나라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원나라는 악비를 대거 선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원나라의 관방사서에서도 악비는 문무를 겸비한 드물게 보는 인재라고 적었다. 다만 원나라와 남송의 관계때문에, 원나라에서는 사회에 널리 악비를 선전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한 가지 사실은 원나라의 악비에 대한 태도를 설명해준다. 남송이 악비의 명예를 회복한 후, 악분(岳墳)과 악묘(岳廟)를 악씨집안후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송원전쟁때, 악분, 악묘가 파괴된다. 원나라초기에, 악씨후손들은 악분과 악묘를 다시 만든다. 원나라정부는 제지하지 않았다. 나중에 악분, 악묘가 다시 황폐해졌는데, 원나라때의 지방정부가 나서서 악분과 악묘의 수선을 주재한다. 이를 보면 원나라는 비록 전력을 다하여 악비를 선양해주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악비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가 되자, 악비의 이미지는 긍정되고 널리 선전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많은 현재의 중국인들보다 고명한 태도를 나타낸다. 악비의 사적에서 외족에 항거한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원장은 중국을 통일한 후에, 몽골등 소수민족을 "모두 나의 적자(赤子)"라고 부른다. 민족갈등을 피하고, 다민족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명나라때 악비는 비록 크게 긍정되기는 했지만, 그의 지위는 관우보다 아래였다. 관우가 군신(軍神)이 된다. 악비가 아니라. 명나라때 이왕의 진회에 대한 평가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예를 들어, 문징명은 악비를 살해한 것은 진회 한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송고종이 주모자이고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 견해는 나중에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주장된다. 비록 그것은 진회의 죄책을 객관적으로 감경시키는 효과를 나타냈지만, 이 견해는 기본적으로 악비의 이미지를 해치지는 않는다.

 

청나라때 악비의 지위는 두 사람의 평가를 보면 된다. 하나는 강희이고 다른 하나는 건륭이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했고, 혈통상으로 금나라 여진족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악비가 금나라에 항거한 것은 한인이 청나라에 항거하는 것과 같다. 거의 반청복명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청나라황제는 악비를 부정하지 않았다. 강희는 전국통일을 위하여, 송고종이 강남에 안주한 것을 비판하고, 동시에 남송에서 항금을 주장한 세력과 사상을 비판한다. 다만, 강희는 이 문제에서 약간 모순되는 입장을 보인다. 그는 남송이 금나라와 '화의'를 주장한 세력을 긍정한다. 사실상 이는 강남에 안주하려는 것을 긍정한 것과 같다. 중국통일을 희망하는 생각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강희는 악비와 진회에 대하여는 완곡한 의견만 내놓는다. 강희는 악비가 항금을 한 것은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잔여세력은 진회를 배워서 저항을 포기하라고 한다. 다만, 강희제의 모순은 여기에 있다: 만일 명나라의 잔여세력이 저항을 포기하면, 강희제는 정말 명나라의 잔여세력을 진회와 송고종과 같이 일부지역에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인가? 그러므로, 강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확실히 악비를 폄하하고, 진회를 긍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강희도 '차고유금'의 문제에서 나중의 여사면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잘못 고른 혐의가 있다.

 

건륭제는 강희의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를 많이 바꾼다. 건륭은 악비를 충분히 긍정한다. 여러번 악비를 찬양하는 시를 짓는다. 그리고, 악비의 고향과 악묘를 순시한다. 건륭은 악비를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먼 조상인 금나라황제를 외인으로 취급했다. 건륭의 시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정가승기사회복(正可乘機事恢復), 수지허력폐경영(誰知虛力廢經營)", "만리장성공자괴(萬里長城空自壞), 지금총수한난평(至今塚樹恨難平)". 소위 '회복'은 남송이 중원을 수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뒤의 두 구절은 악비를 죽인 것은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 것과 같아서, 지금도 사람들이 이를 한탄하고 있다는 말이다. 악분, 악묘는 청나라 건륭이후, 여러번 중수된다. 건륭은 악비, 진회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 이는 어느 정도 명나라황제와 이곡동공(異曲同工)의 측면이 있다. 둘 다 민족갈등을 완화시키고 민족대통합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건륭은 역사상의 다른 인물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악비를 절대충군(絶對忠君)의 이미지로 묘사하여, "군신지의(君臣之義)"를 강조한다. 건륭은 악비의 이미지를 이렇게 가공하여,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악비를 공격할 때 "우충(愚忠)"이라고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반청복명의 비밀결사가 모신 것은 관우이고, '우충'한 악비가 아니게 된다. 청나라말기가 되어,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혁명당인들이 민족 비밀결사의 방식을 바꾸면서, "구축달로(驅逐韃虜)"를 구호로 내세워 악비는 만청에 항거하는 기치가 된다.

 

사실상, 악비의 생전에 항금을 위하여 여러번 황제의 명을 어긴다. 여러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악비를 '우충'이라고 보는 것은 최소한 부정확하다. 황제제도하에서, 악비는 확실히 '우충'의 흔적이 있다. 다만, 황제제도를 제외하면, 악비는 국가에 대하여, 문명에 대하여 충성했다. 이것은 질책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악비의 충성에는 역사조건하에 제왕에 대한 충성이 있다. 그리고, 천고불변의 것인 인간정의에 대한 충성이 있다. 악비를 '우충'이라고만 묘사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위의 간단한 역사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남송에서 청나라멸망시까지의 약 800년동안 악비의 이미지는 그다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다. 일부 부정적인 견해도 있지만, 악비를 철저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와 아울러, 진회에 대한 태도도 남송이래로 진회는 역대 관방사서에서 모두 '간신'으로 묘사된다. 송나라이후 사람의 이름에 '회(檜)'를 쓰는 것은 드물다.

 

한가지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800년의 중국역사상, 진회는 대부분 '간신'으로 묘사되었지, '민족패류(民族敗類)'라는 식으로 '민족'을 앞에 두지는 않았다.  악비도 비록 긍정되었지만, 악비를 '민족영웅'으로 부르는 일은 아주 적었다. 이것은 중국전통문화의 우수한 특징이다. 그저 정의와 간사를 구분하고,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가급적이면 종족이나 부족으로 나와 나를 가르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멸앙한 후 지금까지 100년간, 서방의 사조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중국인의 사고와 평가기준은 혼란에 빠진다.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도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로 들어서는 것이다. 최근의 이 100년간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의 혼란은 이전의 800년보다 훨씬 심했다. 지금까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진회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극력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