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경친왕(慶親王) 혁광(奕劻): 만청제일탐관

중은우시 2013. 8. 15. 18:00

글: 유계흥(劉繼興)

 

마지막 황제 부의는 혁광이 신해년에 한 행위에 대하여 가장 날카롭게 평가한 바 있다: "(혁광)은 원세개의 돈을 받고, 태후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권했다. 대청 이백년의 천하는 혁광의 손에 끝장났다."

 

혁광은 만주 상남기 사람으로, 애신각라씨이며, 건륭의 열일곱째 아들 영린(永璘)의 손자이며, 광서제의 황숙이다. 1894년 서태후의 60세 생일때, 경친왕에 봉해진다. 그리고 1908년 철모자왕을 수여받아 세습망체가 된다. 그는 청나라조정이 철모자왕으로 봉한 마지막 군왕이다. 1911년 신해혁명기간동안, 혁광은 6개월간 최초의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며, 청나라조정의 운명을 결정한 관건적인 인물이다.

 

서태후가 함풍연간에 동생인 계상(桂祥)과 서신왕래할 때, 항상 혁광이 대필했다. 혁광은 학문은 없지만 글자는 잘 썼다. 그래서 서태후의 호감을 샀다. 1884년(광서10년), 서태후는 공친왕 혁흔을 파면하고, 원래 실권이 없던 혁광은 서태후와의 인연으로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이 되어, 외교를 주재하고 경군왕에 봉해진다. 다음해에 해군아문이 설치되고, 명을 받아 순친왕 혁현과 함께 해군사무를 처리한다. 권력과 지위가 올라갔지만 혁광은 재능이 평범하고 하는 일이 없어 자주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총리각국사무아문이 외무부로 개조된 후, 혁광은 총리대신이 된다.

 

1903년, 영록이 병사하자, 원세개는 혁광이 앞으로 군기처에서 임직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즉시 심복 양사기(楊士琦)를 파견하여 혁광에게 10만냥짜리 은표를 한장 건낸다. 혁광은 사양하는 척한다. 양사기가 이렇게 말한다: "궁보는 왕야께서 얼마후에 군기처에 들어갈 것을 알고 계신다. 군기처에서 일하는 사람은 매일 궁으로 들어가 노불야(서태후)를 모셔야 한다. 노불야의 좌우에 많은 태감들이 분명 왕야에게 축하인사를 하면서 상을 내려줄 것을 바랄텐데, 그 돈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 돈은 그저 왕야가 부임했을 때 용돈으로 쓰라는 것이다. 이후에 따로 보내드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혁광은 기뻐하며 돈을 받는다. 그후 원세개는 달이면 달마다, 명절이면 명절마다, 해면 해마다 돈을 보낸다. 원세개는 자신보다 17살이나 어린 혁광의 장남 재진(載振)과 결의형제를 맺어 혁광과 더욱 가까워진다.

 

혁광은 과연 원세개가 원하던대로 군기처로 들어가 영반군기대신이 된다. 곧이어 재정처, 연병처의 사무를 관리한다. 내외의 대권이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혁광은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비열하다. 그의 아들 재진과 대신 나동(那桐)은 매관매직을 한다. 그리하여 세상사람들은 이들을 조롱하여 "경나공사(慶那公司)"라고 부른다.

 

혁광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 서태후의 뜻을 잘 헤아렸다. "영욕홀언(榮辱忽然, 개재성의(皆在聖意)" 모든 것을 서태후의 뜻에 맞추어 했다. 그래서 서태후는 그를 신임한다. 팔국연합군과의 전쟁이후, 서태후는 기운이 빠지고 의욕을 잃는다. 일상적인 정무는 혁광이 주재한다. 혁광은 원세개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자주 그에게 계책을 묻는다. 혁광, 원세개 두 사람의 세력이 신속히 팽창한다. 혁광부자, 원세개의 문하로 투신하는 것은 승관발재(升官發財)의 첩경이었다.

 

청나라말기의 마지막 10년동안, 혁광과 원세개는 한편이 되어 어울린다. 한 명은 조정에 한명은 군대에. 말 그대로 '대북양'의 정치틀을 마련한다. 조야와 군정의 절반이 북양이었다. 심지어 원세개는 1909년 하야하는데, 그래도 근본적으로 북양계가 군사적으로 독점하는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나라가 멸망하는데 묘를 팔 사람을 준비해둔 셈이다.

 

무창의거가 발발한 후, 조정의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내각총리대신 혁광과 협리대신 나동, 서세창(두 사람은 모두 원세개의 일당이다)이 처음 생각한 것은 이 국면을 만회할 수 있는 사람은 원세개라는 것이다. 재풍을 설득하여 원세개를 다시 기용할 수 있는 사람은 혁광밖에 없었다. 1911년 10월 14일, 혁광은 원세개를 다시 기용하자고 제안한다. 나동, 서세창도 찬동한다. 얼마후, 원세개는 혁광을 대신하여 내각총리대신에 오른다. 그리고 새로 내각을 구성하며, 혁광은 필덕원(弼德院) 총재로 간다.

 

이때 재풍은 비록 허수아비로 되었지만, 어쨌든 감국섭정왕이었고, 해군육군대원수였다. 금위군을 이동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전히 원세개에게는 위협으로 남았다. 이 장애를 철저히 제거하기 위하여, 원세개는 혁광과 결탁하여 융유, 재풍에게 "혁명당이 너무 위험하다. 우리는 총포가 없어 군비가 없으면 싸울 수가 없다"고 한다. 융유가 묻는다. "외국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가?" 혁광이 말한다: "노재가 외국인들과 얘기해보겠습니다." 이틀이 지난 후, 혁광이 말한다: "외국인들은 재삼 안하겠다고 합니다. 노재가 최선을 다해서 설득했더니 그들이 비로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혁명당은 원래 좋은 백성이다. 정치를 개량하기 위하여 무력을 쓴 것이다. 만일 도움을 요청하려면 반드시 섭정왕을 퇴위시켜야 한다." 혁광, 원세개의 말에 넘어가, 융유는 재풍을 감국섭정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다.

 

이해 연말, 남북화담이 중요한 단계에 접어든다. 청황제가 퇴위할지 여부에 대하여 남북쌍방이 의견일치를 보기 어려웠다. 남북의화(南北議和)가 시작된 후, 혁광은 청황제의 퇴위를 주장한다. 그는 융유에게 말한다: "혁명군대는 이미 5만의 규모이다. 우리 군대의 장병들은 모두 싸울 뜻이 없다." 그리고 재풍에게 말한다: "전국의 절반을 이미 잃었다. 다행히 일부지역을 유지하더라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 만,한을 융합하고, 정치체제를 개량하고 평화롭게 협상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고집을 부려서 결렬된다면, 만주족들은 우리 집안때문에 힘들어질 것이다." 재풍은 그 말을 듣고 방성대곡한다.

 

1912년 1월 17일 어전회의에서, 혁광, 부륜(溥倫)은 스스로 퇴위하고 공화(共和)를 반포할 것을 주장한다. 혁광은 이렇게 말했다: "황실을 보전하려면, 공화의 길을 가는 것 이외에, 다른 좋은 방법이 없는 것같다." 다만 부위(溥偉), 재택(載澤)은 결사반대하나, 성과를 얻지 못한다. 다음 날 다시 어전회의를 개최했는데, 여전히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 회의후 양필(良弼)을 우두머리로 하는 종사당등 10여명의 주전파는 경친왕부로 가서 혁광을 둘러싸고 공격한다. 그러나 경친왕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조정은 우대조건을 받아들이고, 청황제퇴위를 선언한다. 청나라조정이라는 건물이 무너지는 중요한 순간에, 혁광은 낙타를 쓰러뜨린 최후의 지푸라기가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혁광을 평가했다: "내정을 맡았을 때는 내정이 황폐되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외교를 맡았을 때는 외교에서 패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혁광은 황족중에서, 만청을 사망으로 몰고간 제일죄인이다."

 

청황제 퇴위후, 혁광은 천진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여러해동안 쌓은 불의한 재물로 혁광은 그곳에서 편안하게 6년을 보낸다. 그리고 1918년 집에서 병사한다. 혁광이 죽은 후, 가족들이 시호를 요청한다. 마지막 황제 부의는 원래 혁광에게 "류(謬)", "추(醜)", "유(幽)", "려(勵)"등 나쁜 시호를 주려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상서방의 의견을 받아들여, "밀(密)"자를 내린다. 그 뜻은 그로 하여금 "추보전과(追補前過)"(지난 날을 잘못을 보완하라)이다. 청나라 역대 친왕의 시호중에서는 가장 나쁜 것에 속한다. 

 

혁광의 재물욕심은 청나라말기에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만청제일탐관"이라고 할 만하다. 1911년 <타임즈>에서 <경친왕외전>이라는 글에서 혁광이 "그의 저택이 황성의 북쪽에 있는데 북경의 대소관리들중 그의 문을 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여서 중국에서 말하는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신문에서는 경친왕이 HSBC은행 한 곳에 예금해둔 이 200만냥의 거금이라고 폭로한다. 청나라때 혁광의 탐욕은 화신(和珅)과 맞먹을 만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