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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청나라말기 청나라정부의 암살행동

by 중은우시 2013. 6. 11.

글: 유전(劉典) 

 

1911년은 중화민국이 시작이다. 그런데, 1911년 이전의 10년간, 중국의 정치무대에는 3가지 역량이 활약하고 있었다: 청황실, 입헌파 및 혁명파. 실력이 가장 강대한 것은 자연히 청황실이다. 즉 당시 청나라정부의 주재자이다. 민국건립를 추진한 주요한 정치역량중 하나인 혁명파는 일찌기 청정부의 탄압하에, 그저 암살과 국부적 의거의 수단으로 청정부의 통치에 타격을 가했다.

 

혁명당인의 청왕조 관리암살에 관한 전설은 많다. 1900년 사견여(史堅如)가 의거에 호응하여 양광총독 덕수(德壽)를 암살하여, 혁명당인들이 암살풍조에 서곡을 울렸다. 그후 몇년동안, 혁명당인들의 암살활동은 아주 빈번해진다. 영향이 비교적 큰 것은 오월(吳)의 5대신암살사건, 왕정위등의 섭정왕 재풍암살사건등이다. 왕정위는 바로 이 사건으로 두각을 드러내며 민국정계무대에 나타나게 된다.

 

신해혁명이 진행되면서, 이들 혁명당인의 사적은 널리 전해지다. 전통적인 역사서술의 관점에서, 혁명당인의 암살풍조가 일어난 원인은 간단하게 이것이 혁명지사들이 폭정을 뒤집으려는 영웅적인 거동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심도있는 역사적 원인은 발굴하려 하지 않고 있다.

 

폭정하의 인민은 폭정을 뒤집는 과정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행사자의 행위를 본받게 되어 있다. 혁명당인들의 암살풍조는 바로 이런 역사현상의 구체적인 체현이다. 청정부의 암살활동이 이 시기의 암살풍조의 선하(先河)였다. 단지 청정부의 암살수단은 혁명당인보다 은밀하였고, 여론보도도 아주 적어서,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기실 가장 먼저 청정부의 대규모암살대상이 된 것은 혁명당인이 아니라 입헌파였다. 즉 강유위, 양계초등이었다. 무술정변이후, 강유위, 양계초는 해외로 도망친다. 그리고 계속 개량주의 선전을 한다. 청정부는 이들이 사회의 '화해'를 해친다고 보았고, 특히 강유위, 양계초는 국내에 있지 않아서 청정부의 역량이 미치기 어려웠다. 청정부의 통치자들은 이 상황을 보고 백도역량으로는 힘들다고 보고 흑도역량을 동원하고자 한다. 그래서 두가지를 쓰는데, "화홍(花紅)"과 "상격(賞格)"이다.

 

두 개의 명사이지만, 실은 하나의 뜻이다. 즉 고액의 현상을 두 사람의 머리에 건 것이다. 청정부는 이 조치를 전혀 감추려 하지 않았다. 1899년 강유위, 양계초를 추포하라는 상유는 <광서조동화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상금은 10만냥백은으로 적지 않은 금액이어다. 1899년부터 1900년까지, 강유위, 양계초 두 사람은 사방으로 도망다니고, 몇번의 암살은 모두 사사(死士)의 보호하게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일은 서태후가 이홍장에게 내린 의지(懿旨)이다. 그후에 이횽장이 막료 유학순(劉學詢)에게 책임지고 감독하게 한다. 이를 위하여 영국의 홍콩총독 복력(卜力)은 일찌기 이홍장에게 두 사람의 암살령을 거둘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이홍장은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그저 그는 일찌기 강유위를 암살하자는 건의를 거절한 바 있다고 하며, 복력의 요청에 답하였다. 그리고 북경으로 돌아오자 마자 강유위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10만상격에서 4만냥을 증가시킨다. 큰 상을 걸면 용사가 나오는 법이다. 많은 재물에 목숨을 건 중국인들 및 서양인들은 재물을 보고 회가 동한다. 그리하여 속속 총탄 비수를 준비하여 강유위와 양계초의 머리를 취하여 현상금을 타고자 한다.

 

이분 아니라, 강유위, 양계초를 죽이기 위하여, 심지어 혁명을 창도하는 손중산과의 협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손중산의 이에 대한 태도는 계속하여 불명확했다. 1900년 6월 손중산은 유학순과 접촉을 한다. 궁기(宮崎)등을 광주로 파견하여 광주에서 유학순과 회담을 한다. 손중산의 이때 계획은 "적의 양식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0만위안대출'을 요청한다. 유학순은 그자리에서 5만위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다음 날 아들을 시켜 보내준다.

 

청정부는 동시에 정부자원과 외교수단을 동원하였고, 외국의 밀정을 매수했다. 강유위와 양계초가 홍콩에 있을 때, 홍콩총독과의 교섭이 실패로 끝나고, 유학순이 조직한 암살행동이 미수로 끝나자, 홍콩정부는 2사람을 축출한다. 원래는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청정부가 움직여 미국이 두 사람의 입국을 거절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싱가포르로 가게 된다.

 

싱가포르에서 두 사람은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다. 나중에 의화단운동이 일어나고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가면서, 청정부는 이미 강유위와 양계초에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 두 사람은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강유위와 양계초와 비교하면, 손중산등 혁명당인은 청나라정부가 "화홍"과 "상격"을 걸고 목숨을 노린 역사가 더욱 길다. 1894년 11월(청광서20년 십월) 손중산이 영도하여 최초의 자산계급혁명단체 단향산흥중회를 조직한 때로부터, 그는 정식으로 직업혁명의 생애를 시작한다. 청정부는 다음해 즉 1895년 10월부터, 계속 밀유를 내려 손중산을 추포한다.

 

1895년, 광주의거가 실패한 후, 청정부는 손중산, 양구운(楊衢雲)등 혁명파지도자들에게 화홍을 현상으로 내건다. 청정부가 반포한 손중산 체로의 밀유는 주로 상유와 전보이다. 비교적 집중한 기간은 광서21년(1895년), 22년(1896년), 23년(1897년), 24년(1898년), 26년(1900년), 33년(1907년), 34년(1908년)이다.

 

1895년에, 당시 혁명당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서, 청나라정부가 내건 현상중 이름이 오른 혁명당인은 모두 16명이었다. 그중 상금이 가장 높은 손중산이 1000원에 불과했다. 흥중회 회장 양구운은 겨우 100원이었다.

 

혁명당인의 영향력이 강대해지면서, 손중산등의 머리값도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00년 청정부의 제5차대규모추포상유를 내릴 때는 손중산의 현상금이 이미 4만여원에 달한다. 이것은 5년도 되지 않은 기간동안의 일이다.

 

청정부가 내린 밀유와 '전보전지'중, 손중산의 칭호는 어떤 경우는 '손중산(孫中山)'으로 쓰여 있지만, 어떤 경우는 고의로 "손문(孫汶)"이라고 섰다. <대공보> 1908년 2월 17일자 보도에 따르면, 당시 청정부는 손중산에 대한 현상금을 다시 20만 추가하여 총액이 25만에 가까워진다.

 

1895년부터 청왕조가 멸망하기 전인 1911년 12월23일까지의 17년간, 청정부가 손중산 1인에 대하여 내린 각종 밀유는 백개가 넘는다. 손중산은 비교적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혁명당인들이 그를 엄밀히 보호했기 때문에, 청정부의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는 1911년 12월 25일이 되어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17년에 걸친 추포당하는 해외망명생활을 끝낸 것이다.

 

청정부는 장기간 공개적으로 반대분자들에 대하여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그리고 살수를 조직하여 개별목표에 대한 암살을 진행한ㄴ다. 청정부 암살활동의 주요대상인 혁명파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배워간다. 그러나 혁명청년은 그저 독서인출신이어서, 전문성으로 말하자면 강호에서 오래 몸을 굴린 직업살수들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처음의 몇번 암살은 모두 일부 저급한 실수로 실패하고 만다. 다만 이로 인하여 그들의 혁명사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정신은 드러나게 된다.

 

1900년, 혁명청년 사견여가 혁명파의 청정부요인암살의 제1성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