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구(吳鉤)
1900년 8월, 경자(庚子)년, 서태후(자희태후)는 두번째로 황망하게 북경성을 도망쳐 나가서, "서수(西狩)"를 하러 갔다. 제1차 "서수"는 40년전에 일어났다. 1860년, 영불연합군이 경사로 쳐들어왔을 때이다. 이번에 다시 "사냥"의 명의로 도망친 것은 바로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공한 것은 의화단이 직예, 경성에서 교회를 불지르고, 교민과 양인을 공격하여, 열강에 군사간섭의 구실을 주었기 때문이다.
의화단의 활동은 산동에서 시작되었고, 직예(直隸), 경사(京師)에서 횡행했고, 산서, 하남, 내몽고, 동북으로 만연되었다. 동남일대는 기본적으로 대량의 권민(拳民)이 나타나지 않았다. 권민이 화북평원에 나타나고 동남연해에서는 기세를 올리지 못하였는데, 이는 당연히 하느님이 주사위를 굴린 결과는 아니다. 그리고 복잡한 정치와 사회적 요소가 있다.
의화단운동의 흥쇠사를 관찰해보면, 하나의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한인 총독순무는 대부분 권민에 대하여 강경수단을 취할 것을 주장했고, 만인 총독순무는 의화단에 대하여 명백하게 '회유'적인 태도를 보였다. 권비의 난이 발생한 직예, 산서, 하남, 내몽고, 동북은 당시에 모두 만주족이 통치했다. 이 해의 직예총독은 유록(裕祿)이고, 산서순무는 육현(毓賢)이며, 하남순무는 유록의 형이었다.
육현이 산서순무를 맡기 전에, 1899년 산동순무를 지낸 바 있다. 권민이 산동에서 흥기한 것은 많은 정도로 이 만주족 귀족이 종용하고 편을 들어준 결과이다. 19세기말, 산동은 의화단 권민과 교민간의 충돌이 계속되는 지방이었다. 근대사상 유명한 "거야교안(巨野敎案)"은 1897년 산동 거야현에서 발생했고, 독일은 이 기회를 틈타 교주만을 침입하여 점령한다. "교안"의 발생으로 인한 심각한 결과에 비추어보면, 조정은 육현에게 "수시로 여러 측을 가르쳐서, 백성과 교민이 서로 잘 지내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육현은 조정에 보고한다: "교민을 괴롭히는 일은 없습니다. 이는 노재가 산동에서 이십여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다. 이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민은 "향리를 횡행하며, 양민을 괴롭히고, 심지어 지방관리를 협박하고 걸핏하면 사람을 괴롭혔다." 백성과 교민의 분쟁을 처리할 때, 육현은 "선입견이 들어 있어, 교민과 싸우는 자는 양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을 들어주게 된다." 패사에서도 말그가 "권비를 신성하게 받들어서, 도적을 다스리라는 종지와 배치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육현의 정책하에, 산동의 의화권은 '의화단'으로 명칭을 고친다.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합법적인 지위를 얻은 것이다. 심지어 권민들은 "육(毓)"자가 새겨진 깃발을 든다. 산동의 많은 지방에는 모두 의화단의 "권창(拳廠)"을 연다. 예를 들어 장평현에는 팔백여개의 촌장이 있는데 권창도 팔맥여개가 있었다.
육현의 방식은 당연히 열강의 강렬한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계속 청나라조정에 압력을 가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주북경공사는 청나라조정에 건의한다: "능력있는 사람을 보내어 그(육현)의 직위를 대체하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육현을 대체하는 적합한 사랍일까? 영국의 주북경공사는 영국외교대신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금후 산동북부의 국세에 관하여, 본인은 가장 희망적인 전망은 원세개를 순무로 보내는 것이다" 열강의 압력하에, 1899년말, 청나라조정은 육현을 불러들이고, 원세개를 서리산동순무에 임명한다. 여기의 세부적인 사항은 얘기해볼 만하다. 육현이 떠나기 전에, 저명한 의화단 수령 주홍등(朱紅燈)을 주살하게 명령한다. 확실히 육현의 의화단에 대한 '회유'는 진심에서 나온 동정이 아니었고, 정치적 목적에 기한 계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세개가 육현을 대체하여 산동순무로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산동의 국면에 우려를 지니고 있던 열강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1899년 12월 7일, 미국 주중공사는 미국국무장관에게 서신을 보낸다: "본인은 기쁜 마음으로 보고드립니다: 어제 무위군 원세개 장군이 대리산동순무로 명받았습니다. 그는 능력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외국인과의 교분도 아주 넓습니다. 황상이 적당한 유지를 내린 후, 교란은 중지되고, 질서는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희망합니다." 사실상 원세개는 산동의 국면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화단에 대하여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한가지 에피소드에 따르면, 원세개가 부임한 후, 일부 의화단 수령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어 그들에게 아문으로 와서 "도창불입'의 법술을 보여달라고 한다. 이 몇몇 수령이 입에 개거품을 물고, 신령이 몸에 들어왔을 때, 원세개는 장창을 꺼내어 펑펑 소리를 내며 그들을 때려죽인다. 이 방법은 아주 악독했다. 의화단 수령을 징벌했을 뿐아니라, 그들의 속임수를 까발렸다. 이 에피소드가 반드시 사실은 아닐 수 있다. 다만 원세개가 의화단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산동에 부임하자마자 즉시 <의화권비금지고시>, <권비엄금잠행장정>을 반포한다; 각 부,주,현에서 장병을 모집하여, 단련을 건립하고, 관부와 협력하여 의화단을 소탕하도록 명한다; 사건을 일으키는 의화단 권민은 왕왕 "즉석에서 처결"하였따. 그의 철완진압하에, 산동의 의화단운동은 금방 수그러들게 된다.
이와 동시에, 직예의 의화단운동이 기세를 발휘한다. 9할 가량의 주,현에 만연하였고, 수십만에 이르는 민중이 참가하였다고 말해진다. 1900년 봄, 의화단의 세력은 이미 경사에 까지 들어온다. 북경,천진일대에 대규모로 철로와 전선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의화단세력은 직예지구에서 커지게 된 것은 직예총독 유록(그도 만주족 귀족이다)의 태도와도 큰 관계가 있다. 유록의 의화단에 대한 태도는 애매했다. '주무(主撫, 위무를 주로 했다)'라고 하기에는 그가 일찌기 무정하게 권민을 소탕한 적이 있괴 '주초(主剿, 소탕을 주로 했다)'라고 하기에는 그가 일찌기 의화단에 무릎을 꿇고 그들을 위하여 군대무기고를 열어준 적이 있다. 의화단이 북경과 천진에서 철로를 파괴하고 교회를 불태울 때, 유록은 비록 보호를 요청하는 보고를 받았지만, 효과적인 조치를 늦추고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면은 더욱 위급해지낟. 열강이 북경으로 진격하는 구실을 주었다. 여기서 한가지를 가정해볼 수 있다. 만일 당시에 이홍장이 여전히 직예총독으로 있었다면(이홍장은 유록의 전임이다), 아마도 역사는 달리 쓰여졌을 것이다. 직예의 국면이 통제불능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록의 애매한 태도는 그가 조정의 풍향계를 관망했기 때문이다. 조정의 의화단에 대한 태도는 계속하여 불명확했다. "주무"와 "주초"의 노선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진퇴에 근거가 없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당시의 양무파관료는 서방열강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 것을 주자하며 양인에게 도전하는 의화단을 처벌하자고 주장한다; 수구파귀족들은 열강의 서태후 '훈정' 및 대아거로 광서제를 대체하려는 계획에 대한 간섭에 불만을 품고 '부청멸양'을 주장하는 의화단운동을 통하여 자신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열강들을 혼내주고 싶어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조정이 의화단운동을 처리하는 의사결정은 양무파와 수구파의 세력중 누가 우세를 점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완고한 수구세력이 새로 힘을 얻는다. 그래서 산동순무 육현이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즉시 재의등 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북경에서 서동, 강의등과 합하여 여러가지 방면에서 선동을 하고 자칭 권수라 하며, 의화단은 총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날조해서 말한다. 이런 거짓말이 바로 퍼져나간다." 그후 육현은 산서순무에 임명된다.
위에서 언급한 강의(剛毅)는 의화단운동의 국면을 악화시키고, 청나라정부와 팔국연합군이 정면대결로 치닫게 만드는 핵심인물이다. 의화단이 대거 북경으로 들어온 것은 강의의 "초단초양(招團剿洋, 의화단을 불러들여 서양인을 소탕한다)" 주장이 받아들여진 때문이다. 그는 "양인을 원수로 여긴다고 말하고, 양무파를 모조리 매국노로 치부했다." 1900년 8월, 그는 명을 받들어 양향, 탁주일대로 가서 의화단의 허실을 탐지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서태후에 보고한다: "권민은 충성스럽고, 신술은 쓸만합니다." 그리하여 서태후가 열강에 '선전포고'를 하게 만들었다. 6월 21일, 청정부는 '선전포고'를 하고, 각성의 총독순무는 각처의 '의민'을 모집하여 외적에 대항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강의는 재훈과 함께 통솔의화단대신이 되어 의화단을 이끌고 팔국연합군과 전쟁을 벌인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한인 총독순무는 권민에 강경한 수단을 취할 것을 주장하고, 만주족 총독순무는 의화단에 명백하게 '회유'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사실은 양무파와 수구파의 두 치국방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양무파 관리들이 통제하는 동남각성은 기본적으로 평정한 국면을 유지했다. 청나라조정은 수구세력의 조종하에 열강과 '선전포고'를 한 후에 동남지방을 통치하던 유곤일, 장지동, 이홍장등 지방실력파는 열강과 협의를 달성하여, 북성하여 '근왕(勤王)'하는 것을 거절한다. 역사에서는 "동남호보(東南互保)"라고 부른다. 이렇게 하여 전쟁의 불꽃이 남하하는 것을 막았다.
의화단운동은 화북평원에서 폭발한다. 이는 19세기말 중국북방의 사회기초와 관련이 있다. <의화단운동의 기원>을 쓴 주석서 선생은 이렇게 생각한다: 직예와 맞닿아 있는 산동서북부의 사신(士紳)계층은 아주 박약했다. 전통적인 사회통제매커니즘이 해체되는 중이었다. 이는 권비의 난이 대규모로 전파되는데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직예의 의화단은 산동서북부에서 전해들어온 것이다. 사신세력이 비교적 강대한 산동서남부의 권민세력은 지방사신에 의하여 억제된다. 원세개가 산동의 의화단 소란을 해결하겠다고 결심하자, 사신집단의 존재는 관청에 협조하여 사회질서의 매커니즘을 회복하도록 해준다. 산동순무아문의 한 표창장을 보자: 이만선은 이무선과 함께 사향으로 가서, 사술권회를 극력 금지하도록 하고, 협종을 해산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오품의 상을 내려 공을 표창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바로 지방사신이 관청에 협조하여 의화단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그후에 관청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직예의 상황은 약간 달랐다. 의화단운동이 일어날 때, 대량의 직예사신이 의화단에 가입한다. "경성사신부호는 많은 사람들이 단을 만들고, 모두 단주라 칭했다." 이것은 어찌된 것인가? "19세기말 20세기초의 직예사신문화심리상태"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외래문화에 일찌기 접했던 동남의 여러 성과 비교하면, 직예일대의 사신은 보편적으로 강력한 "기독교를 미워하고 외국인을 배격하는" 문화심리를 지니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역대이래의 국치로 여기고, 각지의 교회와 선교사의 만횡으로 외국인을 배격하는 심리가 아주 컸다. 기회만 있으면 힘을 합하여 울분을 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이런 일을 자주 얘기했다." 이런 사신들의 기풍은 의화단의 난이 평정된 후에 비로소 변화한다.
동남의 '호보"는 양무파관료의 주장만은 아니었다. 동싱 동남사회의 역량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양무운동이래, 동남의 각성에서는 대거 양무기업을 만든다. 전통과 서방문화의 융합으로 강대한 "사신-신상"집단이 나타난다. 이것은 사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그낻문화에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엘리트집단이 바로 동남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안정요소였다. 권민과 양인이 북방에서 싸우고 있을 때, 한구, 구강등지의 신상은 양강총독 유곤일과 호광총독 장지동에게 전보를 쳐서 장강과 내하의 방위를 강화하도록 요청한다. 상해의 신상은 '동남구제선회"를 조직하여, 교회와 선교사를 보호한다; 상해의 매체는 속속 <보위동남상무>, <보전남방지법>등의 사론을 싣고 동남의 여러 성당국이 중외평화국면을 유지하고, 사회안정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한다.
장건, 진삼립, 탕수잠, 왕강년등 동남의 권신(權紳)들이 '호보'를 촉진시켰다. 총독순무와 양인의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장건의 친구인 유후생은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 "당초 장건과 하사곤, 진삼립, 심유경, 탕수잠, 시병섭 6인(모두 동남사회의 사신이다)은 유곤일, 장지동의 두 총독을 끌여들어 공동으로 '동남호보'의 명의로 나라씨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최대목표로 삼았다." 장건이 당시에 서태후를 몰아내려는 생각을 했는지여부는 차치하고, '동남호보'의 실현에 장건은 확실히 큰 역할을 했다. 장건과 유곤일, 장지동의 관계가 밀접하여, 6월 16일, 양국 주한구영사는 "수군을 파견하여 장강으로 들어와 토비를 탄압하는 것을 도우려 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장건은 극력 만류한다. 동시에 유곤일에게 전보를 보내어 말한다: "영국 수군이 장강으로 들어오는데 우리가 만일 보호하지 못하면 동남의 대국은 끝장이다." 18일, 그는 유곤일로 하여금 장강하류에서 활약하던 염효(鹽梟) 서노호(徐老虎)를 초무하도록 한다. 서노호가 북방의 의화단에 호응하여 일을 벌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25일, 심유경이 성선회의 뜻을 받들어, 유곤일에게 서양인과 평화협약을 체결하도록 유세한다. 유곤일이 망설이고 있자, 장건이 한 마디 말을 한다: "비록 서북이 없어도 동남을 보존하면 그 명목을 보존할 수 없는 것이고, 동남이 없더라도 서북을 보존하면 그 실질을 보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곤일이 결심을 한다. 장지동에 전보를 보내어 서양인과 협약을 맺기로 한다. 다음 날, <동남호보조약>이 상해에서 체결된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동남사회의 전체 "사신-신상"집단이 한마음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면, "동남호보"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경자년의 의화단운동은 금방 평정된다. 이번 운동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몰고 왔다. 그것의 실패는 완고한 수구파는 시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수구세력은 정리되고 축출된다. 강의는 서태후의 '서수'를 따라가던 도중에 병사한다. 육현은 난주에서 사사당한다. 유록은 전쟁중에 자살한다. 청나라조정은 마팀내 중단되었던 유신사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경자국변"이후 다시 "신축신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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