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도광제(道光帝)의 능묘는 왜 3번이나 옮겼는가?

중은우시 2013. 9. 13. 23:52

글: 문재봉(文裁縫) 

 

황제가 한 명 사망하면 일생동안 단지 1개의 능침을 건설한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혀 예상외에, 도광제는 일생동안 자신을 위하여 3번이나 능침을 건설한다. 즉, 그는 3번이나 능묘를 옮긴 것이다.

 

제1차 능묘건설. 도광제가 황자(皇子)로 있을 때, 가경(嘉慶)원년, 자신보다 1살많은 뉴후루씨를 푸진으로 취한다. 이 여인이 그의 첫번째 부인이다. 그러나, 효목황후는 장수하지 못하고 가경13년 병사하고 만다. 나이 겨우 28세였다. 이때의 민녕(旻寧, 도광제)은 겨우 27세였다. 민녕은 뉴후루씨를 아주 그리워했고, 부황의 명에 따라, 경성의 부근에 있는 왕좌촌에 뉴후루씨의 원침(園寢)을 건설한다. 가경16년 십일월 십칠일, 뉴후루씨는 황자푸진의 예로 왕좌촌 원침에 매장된다. 10년후, 민녕이 황위를 승계하고 뉴후루씨를 효목황후로 추존한다. 곧이어 황제의 만년길지의 일을 토론하는데, 도광제는 왕좌촌에 능을 건설하고자 한다. 방식은 효목황후의 원침을 확장하는 것으로 하였고, 왕공대신들은 도광제의 지시대로 진행한다.

 

그러나, 실제 업무진행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조상의 법도를 파괴하는 문제이다. 일찌기 건륭연간에, 건륭제는 동서릉으로 나누어 매장하는 소목지제(昭穆之制)를 만들었다. 즉, 부자가 각각 나뉘어 매장되는 것이다. 동릉에 부친이 매장되었으면, 서릉에 아들을 매장한다. 이것이 대청의 가겁이고 위배할 수 없는 것이다. 도광제가 만일 왕좌릉에 능묘를 만들게 되면, 그것은 동릉도 아니고, 서릉도 아니다. 그리하여 건륭의 지시를 엄중하게 위반하게 된다. 그리하여 왕공대신들은 속속 상소문을 올려 도광제에게 왕좌촌에 능묘를 건설하지 말 것을 건의한다. 둘째는 백성의 이익을 침범하는 것이다. 왕좌촌 원침을 황제릉으로 개조하려면 반드시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왕공대신들이 측량한 바로는 마을 하나를 옮겨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묘소도 많이 이장시켜야 했다. 이것은 심각하게 백성의 이익을 침해한다. 조야상하에서 의론이 분분하여 불만이 많았다. 도광제는 반대가 심각하자 부득이 유지를 다시 내리게 된다: "만년길지는 여전히 소목에 따라 지어라, 동릉의 경계내에서 만년길지를 선택하라." 왕좌촌 원침은 이렇게 하여 폐기된다.

 

제2차 능묘건설. 도광제는 동릉에 능묘를 건설하겠다고 결정한 후, 도광원년부터 부지를 선정하여 건축을 시작한다. 능묘건설문제에서 도광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진전미(地臻全美)를 중시해야 하고, 궁전을 화려하게 짓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즉, 능묘를 건설할 때 풍수를 중시하고, 건축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도광제는 동릉의 요두욕(繞頭峪)으로 선정한다. 그리고 요두욕을 보화욕(寶華峪)으로 개명한다. 그리고 대규모의 능침 건설공사를 시작한다. 6년의 기간을 들여 보화욕에 능침을 완공한다. 도광제는 아주 기뻐했고, 업무를 담당한 대신들에게 크게 상을 내린다. 면과, 대균원, 영화, 목창아등이 상을 받는다. 도광 7년 구월 이십삼일, 왕좌촌 지궁의 효목황후를 이곳으로 이장시킨다.

 

일은 원래 이렇게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도광8년, 동릉의 수호대신이 상소를 올려서, 보화욕의 지궁에 삼수(渗水)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삼수는 아주 심각했고, 지군안에 가장 깊이 물에 잠긴 곳은 1척7촌에 달했다. 관상(棺床)의 효목황후 관도 2촌이나 물에 잠겼다. 도광제는 진노하여 두 가지 결정을 내린다. 하나는 업무담담대신들을 엄히 처벌하는 것이다. 벌금, 면직, 유배등. 다른 하나는 다른 길지를 다시 선정하고, 이미 완공한 능침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미 여러해동안 만들었던 호화로운 능묘는 버려지게 된다. 지궁에 들어갔던 효목황후의 관도 다시 지궁에서 들려나오게 된다.

 

제3차 능묘건설. 동릉 보화욕의 능침을 포기했는데, 이제 도광제는 어디에 능침을 건설해야 할까? 왕공대신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건의한다. 여전히 동릉내에서 길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이것이 대청의 가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도광제는 동릉에 능묘를 건설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번에 그는 모든 것에 불구하고, 많은 풍수선생을 보내어 밀운, 방산, 계주, 이주등지를 살펴보게 한다. 어쨌든 동릉 안에서 선택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결국 그가 고른 곳은 서릉 경계내에 있는 용천욕(龍泉峪)이다. 그는 이 곳을 자신의 만년길지로 삼는다.

 

용천욕 공사는 도광11년 11월초팔일에 착공하여, 도광15년에야 공사가 완료된다. 4년여의 시간을 들여 240여만냥의 돈을 들인다. 능침의 이름은 "모릉(慕陵)"으로 정한다. 도광제는 효목황후의 관을 다시 이 곳으로 옮긴다. 이렇게 하여, 효목황후의 관은 3번이나 옮겨지게 되니, 이는 실로 전대미문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