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보시라이-왕리쥔사건

왕리쥔과 구카이라이가 반목하게 된 경위

중은우시 2013. 8. 5. 02:15

글: 인민문적 

 

 

 

왕리쥔이 돌연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더리니, 그 후에 드러난 영국인 닐 헤이우드살인사건은 구카이라이와 그의 가족을 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들었고, 충칭의 형세는 이때부터 급전직하한다. 타흑(打黑)의 영웅으로서, 왕리쥔의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한 행동의 배후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2012년 8월 20일, 구카이라이는 고의살인죄로 1심에서 사형집행유예를 받았다. 9월 24일, 왕리쥔은 순사왕법(徇私枉法), 직권남용, 반도(叛逃), 수뢰의 여러 경합범으로 15년형을 받았다.

 

전술한 판결문을 보면, 닐 헤이우드의 죽음은 구카이라이가 주점이고, 충칭시위 판공청의 공무원인 장샤오쥔(張曉軍)이 종범이다. 충칭시 공안국 부국장 궈웨이궈(郭維國) 및 리양(李陽), 왕펑페이(王鵬飛), 왕즈(王智)등 4명의 고위경찰도 비호한 책임을 졌다. 자료에는 닐 헤이우드의 계획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전 다롄스더(大連實德)의 총재인 쉬밍(徐明)이 중요한 작용을 했고, 왕리쥔의 그림자도 보인다.

 

구카이라이, 쉬밍, 왕리쥔 3명의 사이에는 서로간에 관계가 밀접했다. 구카이라이, 왕리쥔의 사이에서 쉬밍은 두 사람의 돈주머니역할을 했고, 두 사람을 연결시킨 중간인물이기도 했다.

 

2007년말, 당시 랴오닝성 진저우시 공안국 국장으로 있던 왕리쥔은 쉬밍의 소개로 구카이라이와 알게 된다. 당시, 구카이라이는 몸이 좋지 않았으며, 의사는 그가 복용하는 충초캡슐에서 수은과 납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구카이라이는 누군가 독을 넣었다고 고발한다. 구카이라이의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를 "12.06사건"이라고 부른다. 쉬밍은 왕리쥔이 이 사건을 처리하도록 추천한다. "나중에 구카이라이의 운전기사를 처리했고, 구카이라이는 비교적 만족했다. 나중에 왕리쥔은 충칭으로 옮겨간다." 쉬밍의 말이다.

 

2008년 6월, 왕리쥔이 충칭시공안국 부국장으로 갔을 때, 당시 중경시위 서기인 보시라이의 중시를 받는다.

 

그후 3년간, 왕리쥔의 관운은 형통했다. 충칭시 공안국 상무부국장에서 부성장급의 충칭시 부시장까지, 보시라이가 충칭을 다스리는데 믿을만한 부하였을 뿐아니라, 보시라이/구카이라이 가정업무의 중요한 조수였다.

 

 구카이라이의 진술에 따르면, 12.06사건이후 그녀는 왕리쥔과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왕리쥔이 나의 의료팀의 팀장을 맡았다. 업무외에도 나에게 전심전력을 다 했다. 나는 그에게 상당히 의존했다. 보과과(구카이라이의 아들)의 미국에서의 안전도 그가 책임졌다. "그러므로, 닐 헤이우드가 그의 아들의 안전을 위협할 때, 구카이라이는 연속 두번이나 왕리쥔에게 긴급히 알리게 된다."

 

닐 헤이우드와 구카이라이 및 그 아들 보과과의 경제분쟁은 유래가 길다. 2011년 7월 11일, 닐 헤이우드가 보과과에게 서신을 보내어, 1400만 파운드의 보수를 요구한다. 이전에 닐 헤이우드는 충칭 장베이구의 모 토지프로젝트에 참여한 바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중단되었다. 보과과는 거절하는 서신을 보낸다. 그후 쌍방은 여러번 교섭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2011년 11월 11일, 쉬밍은 충칭시위 3호루로 가서 구카이라이를 만난다. 3호루는 보시라이가족이 거주하는 곳이다. 구카이라이는 쉬밍에게 왕리쥔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쉬밍은 부탁을 받고 왕리쥔에게 가서 이 일을 알선한다. 왕리쥔은 쉬밍에게 닐 헤이우드는 외국인이어서 통제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쉬밍은 핑계를 대어 말한다: "듣기로 닐은 마약을 하고, 마약판매도 한다고 한다" 쉬밍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말이 끝나자 마자 왕리쥔이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 처리하기 쉽다."

 

11월 12일, 왕리쥔은 쉬밍에게 사람을 시켜 충칭의 110에 전화를 하게 한다. 닐 헤이우드가 서남마약판매망의 중요두목이라고 고발한다. 왕리쥔의 요구에 따라, 왕리쥔의 핸드폰에 고발메세지를 보낸다. 그날, 장샤오쥔은 구카이라이의 명의로 닐이 충칭으로 오도록 요청한다.

 

2011년 11월 13일 11시 35분, 장샤오쥔은 닐 헤이우드를 데리고 CZ8129비행기편의 일등석을 타고 베이징에서 충칭으로 간다. 왕리쥔은 궈웨이궈로 하여금 닐 헤이우드를 감시하게 한다. 궈웨이궈는 감시절차를 12.06사건에 포함시킨다.

 

만일 쉬밍이 구카이라이와 왕리쥔의 사이의 연락인이라면, 궈웨이궈는 구카이라이와 왕리쥔관계의 증인이다.

 

궈웨이워는 원래 진저우시 공안국 치안관리지대 지대장이었고, 왕리쥔의 부하였다. 일찌기 왕리쥔을 도와서 구카리아라의 12.06사건을 처리한다. 2008년 11월 진저우에서 충칭시 장베이구위 정법위 부서기로 옮겨온다. 그리고 장베이구 공안국 조사연구원, 샤핑바구 공안분국 상무부국장, 국장등의 직을 지낸다. 2011년 1월, 충칭시 공안국 부국장으로 승진한다.

 

궈웨이궈에 대하여, 왕리쥔은 이용하면서 방비했다. 구카이라이는 왕리쥔이 일찌기 그녀에게 궈웨이궈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고 말한다. 평상시 왕리쥔은 궈웨이궈를 통하여 다른 동북출신 간부들 예를 들어, 충칭시 공안국 형경총대장 리양, 전 기술수사총대 대장 왕펑페이, 전 사핑바구 공안분국 상무부국장 왕즈 등 사람의 업무를 어레인지하고 명령을 내렸다.

 

11월 13일, 궈웨이궈는 왕펑페이에게 닐 헤이우드를 감시하게 한다. 구카이라이의 진술에 따르면, 그날 오후, 왕리쥔이 3호루에 온다. 긜고 그가 비행기 출구에서 닐 헤이우드를 감시한 상황을 보고했다. 모든 것을 그가 장악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신화사보도에 따르면, 왕리쥔은 재판때 이렇게 말했다. 구카이라이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하여, 그는 닐, 헤이우드사건을 회피했다고. 구카이라이의 진술은 달랐다. 왕리쥔이 이 사건에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구카이라이에 따르면, 그날 저녁 8시경, 왕리쥔이 다시 3호루에 온다. "그날 밤 나는 몸이 좋지 않았고, 그는 나에게 왜 아직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왕리쥔은 그러면 안된다고 하였따." 자료를 보면, 구카이라이는 그 자리에서 서신을 하나 쓴다. 닐 헤이우드는 정신이 비정상적이니, 공안에서 그녀를 원거리보호해달라고. 서신의 원본은 왕리쥔에게 주었고, 구카이라이 자신도 복사본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신화사 보도에 따르면, 2011년 11월 13일 21시경, 구카이라이, 장샤오쥔은 독약, 마약 및 술, 차등을 가지고 닐 헤이우드가 투숙하고 있던 난산 리전트호텔로 간다. 구카이라이는 닐 헤이우드와 함께 술을 마시고 차를 마신다. 그가 술에 취하여 토한 후 물을 마시는 틈을 타서, 구카이라이는 준비한 독약을 장유(醬油)병에 넣어서 헤이우드의 입으로 마시게 하여 그를 죽인다.

 

구카이라이의 진술에 따르면, 그날 저녁 3호루로 돌아온 후, 그녀는 "홍기(紅機, 보안전화)"로 왕리쥔과 통화한다. 간략히 독약투입과정을 얘기한다. 다음 날 정오, 왕리쥔이 3호루에 온다. 그때 구카이라이는 상세히 말한다. 왕은 이것을 비밀리에 녹음한다.

 

구카이라이, 왕리쥔은 한때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그들의 별명은 각자의 권역내에서의 지위와 관계를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구카이라이모자는 왕리쥔을 "귀자(鬼子)"라고 불렀고, 리양, 왕펑페이, 왕즈등은 왕리쥔은 "스승(老師)"이라고 불렀다. 구카이라이에 대한 칭호도 서로 달랐다. 왕리쥔은 구카이라이를 "과마(瓜媽)"라고 불렀고, 궈웨이궈는 그녀를 "변호사님(律師)"이라고 불렀으며, 3호루의 공작인원들은 구카이라이를 "오가(五哥)"라고 불렀다. 구카이라이가 집안에서 다섯째이기 때문이다; 2011년 12월 14일 저녁 구카이라이가 저녁만찬을 열었다. 술을 마신 후, 왕리쥔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리양, 왕즈등은 구카이라이를 "사모님(師母)"이라고도 부르고 "대저(大姐)"라고도 불렀다.

 

구카이라이가 보기에, 그녀와 왕리쥔의 관계는 2011년 6,7월경 틈이 생겼다. 구카이라이에 따르면, 2011년 5월부터 왕리쥔이 충칭시 부시장에 오른 후, 시위 상임위원에 들어가려는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번은, 왕리쥔이 그의 딸을 시켜 나에게 말했다. 부시장은 시위 상임위원만 못하다고. 그때 그 본인도 자리에 있었다."

 

"또 한번은 왕리쥔이 3호루에서 나에게 말했다. 그가 시위 상임위원에 들어가는지 여부는 보시라이의 말 한마디에 달렸다. 저녁에 보시라이가 돌아오고나서 내가 보시라이에게 말했더니, 보시라이가 아주 화를 냈다." 구카이라이의 말이다.

 

신화사 보도에 따르면, 그해 8월 12일, 구카이라이의 아들 보과과는 일이 있어 왕리쥔을 만나고자 한다. 왕리쥔은 자신이 완저우(萬州)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보과과는 함에 완저우로 차를 몰고가다가 하마터면 차량사고가 날 뻔했다. 구카이라이는 이 일로 왕리쥔에게 화가 난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는 구카이라이가 닐 헤이우드 사건에서의 왕리쥔에 대한 신뢰와 의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2011년 11월 15일, 닐 헤이우드가 사망한 것으로 발견된 후, 왕리쥔은 궈웨이궈에게 이 사건의 수사를 책임지게 한다. 궈웨이궈는 리양, 왕펑페이, 왕즈를 소집하여 현장으로 간다. 11월 16일, 궈웨이궈등이 닐 헤이우드가 술을 마신 후 급사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왕리쥔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구카이라이가 현쟁에 갔었다는 증거를 숨기는데 동의한다.

 

"11월 18일, 왕리쥔은 다시 3호루로 간다. 그는 언제든지 이 일을 감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날 저녁 닐 헤이우드를 화장한 후, 왕리쥔은 홍기 전화기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8자를 얘기한다: "화작청연(化作靑煙), 가학서거(駕鶴西去)"(한 줌의 연기가 되어 학을 타고 서천으로 갔다).

 

2011년 12월이 되어, 충칭시의 분위기가 약간 괴이하게 변한다. 비교적 민감한 경찰은 사건이 발생할 것을 예감하게 된다. 2011년 12월 11일 저녁 10시, 왕리쥔은 시국당위확대회의를 긴급소집한다. 명목은 "염정건설연구"이다. 회의에서 그는 먼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차를 정리한다. 그는 경보부(警保部)에 통지하여, 베이징의 무경차량번호판을 단 차량을 자신의 명의에서 빼내서 공안국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하라고 한다. "시공안국의 간부가 베이징을 가면 모두 그 차를 공동으로 쓰도록 하라"고 한다.

 

궈웨이궈, 왕즈등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왕리쥔이 직면한 형세는 상급부서에서 그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3일후, 2011년 12월 14일, 왕리쥔은 북경에서 회의를 연다. 전 충칭시위 조직부의 주요간부가 왕즈를 찾아와서 말한다. 왕즈의 진술에 따르면, "나는 왕리쥔을 발탁하는 일을 얘기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간부들이 나에게 말한 것은 내가 오늘의 위치에 있는 것은 모두 3호루의 공로이니, 나에게 충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구카이라이는 3호루에서 리양, 왕즈, 왕펑페이 및 전 충칭시 공안국 경제수사총대장 리용닝을 불러 연회를 연다. 리용닝도 동북에서 왔다. 이 식사자리에 대하여, 구카이라이, 왕리쥔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구카이라이는 왕리쥔의 부탁을 받아 그의 학생들에게 대신 연회를 베풀어준 것이라고 했고, 왕리쥔은 이것이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려는 홍문연이었다고 말한다.

 

이 식사자리는 구카이라이와 왕리쥔간의 갈등의 단초를 보인 것이다.

 

12월 14일 저녁의 식사는 아주 기이했다. 술을 마신 후 리양은 구카이라이가 안심하도록, 장샤오쥔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무실로 가서 파쇄한 11.15사건기록과 파쇄기를 가져오도록 한다. 왕즈와 왕펑페이는 다음 날 족욕방에서 깨어났는데, 그날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구카이라이는 왕리쥔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학생들이 그녀를 사모라고도 부르고 대저라고도 부른다고 말한다. "무슨 고문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 불었다." 왕리쥔은 궈웨이궈에게 이 몇 명을 베이징으로 데려오도록 시킨다. 왕리쥔은 그들이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질책했고 그들에게 일깨워준다. "어제 저녁에 마신 것은 약을 넣은 것이다." 왕펑페이는 손에 발진이 있는 것을 보면 왕리쥔의 말이 맞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양은 그날 저녁에 마신 것이 마오타이이고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고 여긴다.

 

왕리쥔은 리양에게 특히 화를 낸다. 궈웨이궈는 추측했다. "왕리쥔은 11.15사건으로 구카이라이를 견제하려 했고 개인의 관직을 얻으려 하였다. 리양은 3호루에 공을 세우고자 사정을 털어놓았으니 이는 왕리쥔의 계획과 안배를 망친 것이다."

 

신화사의 보도에 따르면, 왕리쥔은 "12월 14일이후 구카아리아는 나와 안면을 바꾸었고, 나를 방비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2012년 12월말, 구카이라이는 왕리쥔의 곁에 있는 이 4명의 인원을 전출보내고 조사한다. 장샤오쥔의 진술에 따르면, 12월 하순, 왕리쥔이 베이징에서 회의를 여는 틈을 타서, 구카이라이는 왕리쥔의 부정부패를 이유로 자신을 데리고 왕리쥔의 사무실을 수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거동은 구카이라이와 왕리쥔의 갈등을 신속히 업그레이드시킨다. 쉬밍의 회고에 따르면, 2012년 1월 7일경, 구카이라이는 그를 충칭으로 보내어, 그녀와 왕리쥔의 관계를 화해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2012년 1월 10일, 쉬밍은 왕리쥔에게 입원한 구카이라이를 병문안가도록 설득한다. 쉬밍의 진술에 따르면, 그날 왕리쥔의 감정은 격해 있었고, 구카이라이는 잠을 자는 척하며, 왕리쥔을 무시했다. 쉬밍은 먼저 나온다. 두 사람만 병실에 남겨두고.

 

두 사람의 관계는 이번 만남으로도 좋아지지 않았다. 1월 14일경, 왕리쥔은 왕즈, 왕펑페이, 리양으로 하여금 각각 사직서를 쓰게 한다. 요점은 3개였다: 닐 헤이우드는 구카이라이에게 피살되었으나, 입건할 수 없었다; 구카이라이는 그들에게 부적절한 일을 하도록 시켰다; 3호루에서 술을 마실 때 술 안에 약을 탄 것으로 의심되며, 마음 속으로 두려움이 생겼다.

 

구카이라이는 왕리쥔에 대하여 날이갈수록 방비를 강화했다. 1월 23일, 설날, 쉬밍은 충칭에 있었다. 쉬밍은 말한다. 왕리쥔은 그에게 구카이라이가 3호루에 가기 전에 차량번호를 통지하라고 했다고 원망하는 소리를 했다. "이전에 왕리쥔은 거의 매일 3호루로 가서 구카이라이를 만났고, 그냥 들어갔었는데, 갑자기 차량을 막으니, 그가 화를 많이 냈다" 구카이라이는 쉬밍에게 "왕리쥔은 근본적으로 안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쉬밍의 진술에 따르면, 1월 26일경, 왕리쥔이 그에게 전화를 해왔다. 그에게 보시라이에게 가서 구페이양(谷飛揚)이 발호하는 상황을 그를 대신하여 얘기해달라고 했다. 쉬밍은 그렇게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부간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같아서 거절했다.

 

쉬밍에 따르면, 1월 28일, 그는 3호루에서 보시라이, 구카이라이부부를 만난다. 그날 저녁, 그는 왕리쥔도 본다. 왕리쥔은 그에게 털어놓았다. 자신은 그날 저녁에 보시라이를 보았고, 그에게 구카이라이의 4대죄상을 얘기했다고: 닐 헤이우드를 죽였다; "양로(兩勞)"인원을 동원해서 충칭시위비서장 쉬밍(徐鳴)의 사무실과 집을 수사했가; 왕리쥔으로 하여금 넷째언니 구왕닝(谷望寧)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왕리쥔으로 하여금 보시라이와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리왕즈(李望知)를 체포하도록 하었다.

 

쉬밍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저녁 왕리쥔은 기분이 괜찮았다고 한다. 보시라이가 그를 칭찬했다는 것이다. 떠날 때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악수도 나누었으며, 보시라이는 그에게 괜찮게 대해주었다고 하었다.

 

그러나, 사정은 하룻밤만에 변화가 발생한다.

 

쉬밍의 진술에 따르면, 1월 29일 오전 11시경, 그는 3호루로 가서 구카이라이를 만난다. 전 충칭시위 판공청 주임 우원캉(吳文康)도 그 자리에 있었다. 구카이라이는 쉬밍에게 말한다. 그날 저녁 왕리쥔이 보시라이에게 잘보이려고 그녀의 4대죄상을 보고했다고 한다. 1월 29일 오전, 보시라이는 궈웨이궈과 왕리쥔을 부른다. 그 자리에서 찻잔이 깨질 정도였다.

 

궈웨이궈의 진술에 다르면, 1월 29일 오전 9시, 그와 왕리쥔은 함께 시위 1호루로 간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을 욕한다. 그가 구카이라이를 모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은혜를 저버렸다고 하였다. 갈수록 격동하여 손을 뻗어 왕리쥔의 뺨을 때린다. 왕리쥔을 피했지만, 입술에서는 피가 났다. 왕리쥔은 보시라이에게 해명했고, 보시라이와 함께 나가서 말했다."

 

신화사 보도에 따르면, 궈웨이궈는 심문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왕리쥔을 때린 것은 갈등이 공개화한 것이다." 그날 오후, 왕리쥔은 리양, 왕즈, 왕펑페이를 불러서, 닐 헤이우드 사건기록을 새로 작성하라고 한다. 사건기록은 직접 구카이라이를 겨냥했다.

 

왕리쥔은 여전히 자신의 승진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다. 왕즈, 왕펑페이등은 말했다. 왕리쥔은 아직 이 사건을 공안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을 진정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개인목적을 달성하는데 쓰려고 했다.

 

왕리쥔은 확실히 보시라이, 구카이라이와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에게 서신을 쓴다. 2월 1일 오전, 쉬밍은 3호루에서 구카이라이를 만날 때 이 서신을 보았다. 서신의 내용은 충성을 표하는 것이고, 모든 문제는 우원캉이 도발한 것이라고 하였다.

 

2012년 2월 2일 오전 9시, 왕리쥔은 시공안국 15루의 국장사무실에서 충칭주재 모중앙부서의 간부를 만난다. 쌍방은 강간사건 하나를 토론했다. 그 때 왕리쥔은 "이것이 마지막 국장의 공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전날 시위는 이미 그가 더 이상 공안국장을 겸임하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그 본인은 며칠 전에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다.

 

2월 2일 정오, 충칭시공안국은 당위회의를 소집한다. 왕리쥔이 더 이상 시공안국 국장, 당위서기를 겸임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전 충칭시 장진구위서기인 관하이샹(關海祥)이 왕리쥔을 대체하여 시공안국 당위서기의 직무를 맡는다고 발표한다.

 

충칭시공안국 판공실 민경 리나(가명)의 회고에 따르면, 2월 4일, 왕리쥔은 아직 시공안국을 떠나지 않았다. 구카이라이가 찾아와서 두 사람은 왕리쥔의 사무실에서 오래동안 밀담을 나눈다. 그날 정오, 구카이라이, 왕리쥔 두 사람은 시공안국 14루의 정무접대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바깥에 있던 서비스인원은 구카이라이의 곡성을 들었다.

 

2월 2일, 더 이상 시공안국 국장의 직위를 맡지 않고 있던 왕리쥔은 부시장의 직위에서의 업무분담에도 조정이 있었다. 정법분야를 관장하던 것에서 교육과학문예위생을 담당하게 되었다. 신화사보도에 따르면, 2월초, 왕리쥔의 주변에 있던 나머지 3명의 인원도 불법조사를 받는다. 왕리쥔은 자신의 처지가 아주 위험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도망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2월 6일, 왕리쥔은 업무협의를 이유로 그날 14시 31분 사사로이 미국주청두총영사관으로 들어간다. 미국총영사관내에서, 왕리쥔은 사건수사인원의 안전을 위협받았기 때문에 미국측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충칭시와 중앙의 관련지도자들의 권유에 왕리쥔은 2월 7일 미국총영사관을 떠나, 관련부서에 구카이라이가 닐 헤이우드를 고의살인한 건을 털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