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기간동안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참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강청(江靑), 강생(康生), 사부치(謝富治)등이 조직한 전안조(專案組, 전문사건팀)에서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죄명을 만들어 냈다. 즉, 유소기의 "살인멸구"사건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유소기의 살인멸구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1925년 5.30운동이후 계급투쟁이 격화되면서, 당시 상해총공회(총노조)의 책임자였던 유소기는 무서워서, 업무를 다 팽개치고, 홀로 상해에서 도망쳐 장사로 갔다. 12월 16일에 장사 계엄사령부에 체포되었고, 호남성성장인 군벌 조항석은 친히 "즉시처결"하라고 지시했다. 유소기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항석에 제출한 조건을 받아들였고, 국민당에 항복하였다. 1950년, 양검웅(楊劍雄)이라는 자는 그 내용을 알고 있는데, 유소기는 일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1953년 영을 내려 그를 총살시킴으로써 살인멸구를 하였다.
양검운은 원래 호남성 영향현 칠복교향의 철라충 사람이었다. 소학교를 다닐 때, 양검웅은 유소기와 함께 녕향현의 옥담고등소학당을 다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반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때문에 50년후에 유소기는 억울한 경우를 당하게 된다.
양검운은 나중에 장사에서 중학을 다니고 상해의 대하대학을 다닌다. 양검웅의 이모부가 조항석이었는데, 조항석은 군벌의 혼전중에 두각을 나타내어 호남성의 성장 겸 독군을 지내고 있었다. 양검웅은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성에서 회계를 맡았다. 뒷배경이 든든하였으므로, 양검웅은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있었고, 많은 돈을 몰래 고향집으로 빼돌렸다. 비록 나중에 조항석이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양검웅의 집안은 이미 부유해져 있었고, 고향에서 논밭을 사서 현지에서는 가장 부자로 손꼽혔다.
해방군은 1949년 4월에 장강을 건넜고, 장개석 정권은 와해되었다. 이 때, 중공이 이끄는 유격부대 하나가 신속히 성장하였는데, 바로 녕향이 유격대활동의 중심무대였다. 국민당정부는 중앙군 778사단을 녕향에 보내어 유격대를 소탕하고자 하였다. 양검웅은 구원병이 왔다고 생각하고, 동네사람을 이끌고 778사에 양식이며 땔감을 보내어주었다. 동시에 현지에서 누가 공산당인지 밀고하여, 십여명의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원과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
국민당은 계속 패퇴하였고, 양검웅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현성과 고향을 왔다갔다 하였는데, 두려움이 컸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그는 몸에 두 정의 총을 지니고 다녔고, 한구(漢口)에서 사귀었던 두명의 강호상의 무술선생을 모셨다. 하남 광산현 사람인 곽기풍과 팽옥린이었다. 그들은 개인보디가드로 삼았고, 낮에는 두 보디가드와 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고, 저녁에는 한명의 보디가드가 그를 위해 당번을 섰다. 이렇게 하며 겨우 잠을 자고 지냈다.
양검웅은 유소기에게 돌을 던져 길을 묻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는 양검웅이 자신의 처지는 전혀 말하지 않은채, 그의 두 보디가드를 유소기에게 추천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무술전문가로서 뛰어나고 사상도 괜찮다는 내용을 적었다. 편지를 보내기는 했으나 회신은 없었다. 그리고 청비반패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때 양검웅은 도망친다. 그러나, 현지의 사람들은 정부에 그를 잡아달라고 요청했고, 공안부서는 계속 그를 찾아다녔다.
이 때, 양검석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구명활동을 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1924년에 유소기가 장사에서 체포되었는데, 그가 성장 조항석에게 보증을 서서 감옥에서 나오도록 해주었다는 내용을 얘기했다. 당시 공산당에서는 8가지의 관용정책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하공작을 하던 사람을 구해주는데 도움을 준 인원은 처벌을 한 단계 낮추어 해준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양검웅은 사형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녕향현 공안국장이며 이 사건의 부심판장이었던 곽건국은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던 유소기에게 급히 서신을 써서 확인을 요청했다.
녕향현 공안국장 곽건국의 서신은 3일 후에 유소기의 책상에 올라왔다. 유소기는 양검웅과 소학교 동창이기는 하지만, 그 후 연락해본 적이 없었다. 1949년 11월 중순, 그는 일찌기 양검웅으로부터 편지는 받았으나 답변을 하지는 않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에서 온 친구들이 북경으로 그를 찾아왔을 때, 유소기는 양검웅에 대하여 물어보았고, 그들로부터 양검웅이 그동안 한 행적을 모두 듣게 되었고, 그를 경계했다. 유소기와 양검웅은 확실히 동창관계이다. 그러나 녕안현 공안국의 공문에 의하면 양검웅은 큰 죄를 지었고, 다시 개조하기 힘들다고 되어 있었다. 유소기는 이에 다음과 같이 회신한다.
“호남성녕향중공현위 전 공안국 곽건국 동지:
1월 26일 보낸 서신은 잘 받았음. 양검웅은 나와 소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적이 있으나, 이후 30여년간 아무런 관계도 없었음. 그가 말하는 1924년에 장사에서 나를 감옥에서 구해냈다는 등의 말은 그런 사실이 없음. 나는 1925년 장사에서 체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구해주었으므로, 옥에서 2개월후에 나올 수 있었음. 그러나 양검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 양의 범죄는 너희들의 판결에 따라 처리할 것.
유소기 1월 29일"
그러나, 이 판결은 문혁기간중에 유소기가 살인멸구한 것으로 모함되었다.
척본우는
1990년대초에 녕향현 정협 상임위원을 맡았던 주석선에 의하면, 당시 전안조는 그에게 서류를 써라고 했고, 유소기가 살인멸구했다는 것에 대한 증빙을 삼으려고 했다. 주석선은 강하게 거절하였고, 전안조의 조사관들은 사람들을 불러 그를 비판하고 그의 늑골을 세 개 부러뜨렸다.
또 다른 한 사람인 종진기는 당시 양검웅 사건의 심판원을 맡았던 사람이다. 나중에 공사의 당위부서기를 지냈다. 전안조는 그에게 가짜증명을 요구했다. 그는 "양검웅은 현법원에서 사형을 판결받았고, 성정부에서 심사하여 비준받았다. 전체 사건처리과정에서 유소기는 전혀 몰랐다. 어떻게 그를 살인멸구 하겠는가?" 전안조는 "이건 필요하다"고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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