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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의 4차에 걸친 북경위기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창해일적수(滄海一滴水) 

 

명나라가 건국한 후 276년간(1368년-1644년), 일찌기 3번이나 제국의 심장인 수도를 직접 위협하는 대사건이 벌어졌고, 명나라는 거의 멸망직전까지 갔다. 이 3차의 대사건은 각각 1449년 야선(也先)이 이끄는 와랄(瓦剌)부의 북경포위공격; 1550년 엄달한(俺達汗)이 이끄는 달단부가 일으킨 "경술지변"; 1629년 후금 청태종 홍타이시가 만든 북경위기이다. 강적이 쳐들어오는데 대하여 명정부는 힘들게 막아냈고, 3번의 북경보위전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세번은 모두 행운스럽게도 위기를 넘겼다. 다만, 3번의 행운이 영원한 행운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이서 제4차 북경위기바 발생하고, 부패가 극에 달한 명나라조정은 결국 북경위기과정에서 멸망한다. 이자성이 이끌고 온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나라의 통치를 뒤집어엎은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북경위기는 이족정권의 포위공격이 아니라 통치내부의 반항역량인 농민반란군에 의하여 무너진 것이다.

 

1406년 명성조 주체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 북방유목민족정권(주로 몽골정권)은 북경의 외곽을 둘러싸고 침입과 약탈을 몇 번이나 했다. 이는 심각하게 북경의 안전을 위협했다. 후환을 막기 위하여, 주체는 대군을 이끌고 6번이나 막북으로 깊이 진입하여, 몽골의 주력을 파괴시키고, 잔여부대를 소탕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 1421년 주체의 마지막 북벌이후, 1449년 제1차북경위기의 발생시까지 20여년간 명나라의 변경에서는 기본적으로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 명나라의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산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는 간접적으로 명나라역사상 보기드문 태평성대의 모습 "인선지치(仁宣之治)"를 가져온다. 다만 안정된 기간은 겨우 이십여년에 불과했다. 계속하여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한무제식의 방식 즉 막북을 깊이 쳐들어가서 근거지를 없애는 방법이 거둔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주체의 여러번에 걸친 북벌은 주로 명나라의 변경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달단부에 대하여 타격을 가하고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달단의 주력인 아로태부(阿魯台部)는 멀리 도망친다. 다만 주체는 북부초원의 생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가 약화되면 다른 하나가 강화된다. 달단부가 쇠락할 때, 와랄부가 기회를 잡아 일어났다. 그리고 신속히 달단의 주력지위를 차지하고, 몽골부락을 통일한다. 그리고 명나라정부를 호시탐탐 노렸고, 전쟁기회를 노렸으며 남쪽 북경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1449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와랄은 마침내 진공을 일으킨다. 병력을 4로로 나누어 출격하였는데, 당연히 주요한 목표는 명나라의 심장인 북경이었다. 야선의 공격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나, 환관 왕진(王振)이 도와주었다. 그로 인하여 명군은 토목보에서 대패하고, 명나라황제 주기진을 생포한다. 원래 명나라의 예기를 꺽으려는 생각은 졸지에 급격히 팽창하게 된다. 군대를 이끌고 북경까지 쳐들어가서 왕조를 교체하려고까지 생각한다. 몽골의 옛날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래서 50여년의 평화적인 생활을 보낸 북경성에 다시 도광검영이 나타났고, 위기일발의 상황이 된다. 위기의 와중에 우겸(于謙)등 충신들이 나타나서, 신임황제 주기옥은 우겸을 적극 지지하여 북경보위전을 전력을 다 해서 조직한다. 결국 명나라건국 80년이래 가장 위험했던 재난을 넘길 수 있었다.

 

기실, 이런 휘황한 역사적 전적에 대하여, 야선은 아주 유감스럽게도 왕진에게 친히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왕진은 야선이 성공하게 만든 핵심인물이므로 야선의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를 야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야선이 명나라를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왕진이 그를 위하여 길을 닦아주었기 때문이다. 군비를 부정부패하여 변경의 방어가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야선이 파죽지세로 북경성까지 쇄도할 수 있었던 것은 왕진의 지휘가 엉망이었기 대문이다. 주기진과 40만명나라군대는 멍청하기 그지없이 방향도 잃고 전투에 겁을 먹고 있었다.

 

제1차 북경위기 100년후, 오랫동안 편안한 생활을 보낸 북경정부는 100년전의 역사적 교훈을 잊고 있었다. 변경의 강적들에 대한 방어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역사는 다시 한번 재현되고, 재난은 다시 한번 북경성으로 다가왔다.

 

당시 와랄부는 흥성하다가 쇠락했고, 이를 대체한 것은 달단부였다. 1550년, 용감하고 호전적인 엄달한은 그저 평범한 약탈전에서 엄숭의 덕에 아주 의외로, 가볍게 북경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북경으로 진공하려는 욕망에 불을 붙인다. 방어가 공허한 북경성은 다시 한번 노략질을 당할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400여년전의 북송 '정강지변'이 재현될 수 있었다. 이번 위난의 과정에서, 마침 예전에 우겸이 왕진의 잔국을 수습한 것처럼, 서계(徐階)가 우겸의 역할을 하여 엄숭이 벌여놓은 잔국을 수습하고, 성공적으로 사태의 악화를 저지하고 북경의 안전을 지켜낸다.

 

엄달한이 거의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북경성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내각수보 엄숭이 그를 위하여 기초를 놓아준 것이다. 몇년전, 엄숭은 극도로 비열한 수단을 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변방의 방어를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전 내각수보 하언(夏言)을 제거한다. 그리고 하언과 함께 가정조에 가장 뛰어난 변방장수인 증선을 끌어내린다. 그리고는 군사를 잘 모르고, 겁이 많은 구월이 정선의 위치를 대체한다. 엄달한이 헛점을 노려서 제1차방어선을 뚫는다. 엄숭이 정권을 잡은 후 그는 몇년간 앞장서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 원래 14만의 변방군대를 양성할 재정으로 겨우 5만을 양성한다. 그리고 군용장비도 심각하게 부족해진다. 군대의 기율은 무너지고, 전투력은 극히 약해진다. 그리하여 엄달한의 대군은 북경으로 가는 제2차 방어선도 뚫을 수 있게 된다. 엄숭의 도움이 있어서 엄달한의 대군은 자연히 거의 파죽지세로 당당하게 북경성밖까지 다가오게 된다.

 

제2차북경위기 79년후, 즉 1629년말에서 1630년초, 북경은 다시 한번 병림성하(兵臨城下)를 맞이한다. 이번은 북방 몽골의 진공이 아니고, 의외로 동북 후금정권의 위협이었다.

 

제3차북경위기가 도래하기 전에, 우리는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장거정이 내각수보가 된 후, 유력한 개혁을 진행한다. 척계광과 이성량을 기용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고 몽골군대를 막아냈다 그 후 영나라와 몽골간의 '호시(互市)'를 강화하고, 강온이 수다을 써서 아주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후 수십년 명나라 몽골간에 다시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게으름이 타성이 된 만력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같다. 대권을 거머쥔 그는 더 이상 조회에 나오지 않고, 부하들이 나쁜 짓을 하도록 놔두었다. 바로 그가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하여, 부패를 구속하지 않기 때문에, 1592년에 발생한 두번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략이 잘못되어 전쟁은 8년이나 끌게 된다. 비록 최후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기에 임진왜란파병까지 국가의 국고는 텅비게 된다. 국고를 계속하여 소모하였으므로 재물을 목숨처럼 아끼는 만력은 침식이 불안했다. 그리하여 1596년에 계속하여 "광감(鑛監)", "세리(稅吏)"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았다. 몇년간, 중등이상의 집은 거의 모두 파산한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난민유민의 행열에 가담한다.전국의 유민폭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당연히 이들 폭동은 비록 부지기수이지만, 명나라군대에 있어서는 별 것이 아니었다. 1619년이 되자 동북의 후금정권도 명나라조정을 타도하는 대열에 가담한다. 살이호전투에서 명군주력을 대패시킨다. 명나라조정의 내부에서는 갈수록 많아지는 농민반란군과 나란히 전투를 벌이면서, 명나라조정을 뒤집어엎으려고 분투노력한다. 1620년부터, 명나라정부는 양쪽에서 적을 맞이한다. 정말 심신이 모두 피곤한 때가 온 것이다.

 

비상시기에 위충현 및 그의 엄당이 적시에 나타난다. 대명왕조의 상하, 내외는 모조리 썩어버린다. 이들은 청태종의 남하를 열을 지어 환영하는 셈이었다. 당연히 길가의 위충현은 청태종의 모습을 보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다만 그의 의장대 - 엄당의 열정은 아주 높았다. 온갖 방법을 다 해서 청태종의 필요에 영합했다. 전력으로 숭정제의 가장 대단한 장수인 원숭환을 죽여버린다. 청태종의 북경포위를 원만히 성공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1630년, 또 한번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 명나라 통치자는 손을 들어 경축했고 하늘이 대명을 아직 멸망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전쟁을 하기 때문에 국고는 텅 비었다. 그래서 명나라 통치자는 인민들을 수탈하는 재주가 있었다. 민간의 재물은 아무리 긁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댓가를 낼 필요도 없었고,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통치자의 이런 열정에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법이다. 인민들도 선물을 준다. 이자성, 장헌충등 농민반란군이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그들이 지나간 곳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것은 미친 보복이고 인간세상은 연옥이 되었다.

 

농민반란이 날로 커지자 숭정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군대를 보내어 미친 듯이 진압하였고, 농민반란은 중대한 좌절을 맞는다. 그리고 피동적인 국면으로 빠져든다. 1636년, 청나라군대는 대거 산해관을 공격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명나라내부의 농민반란과 협력했다. 1644년, 명나라는 다시 한번 북경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마지막 북경위기였다. 이자성의 반란군은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나라는 멸망한다.

 

우리는 4번의 북경위기를 살펴보았다. 모두 권력을 독점한 환관 혹은 권신이 간접적으로 만든 것이다. 왕진, 엄숭, 위충현이 모두 북경위기의 원흉이다. 다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왜 아무도 막지 않았을까? 혹은 왜 아무도 저지시키지 못했을까? 답은 그들이 모두 대단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황제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왜 그들이 이렇게 놀라운 권력을 보유하게 되었는가? 그 답안은 전제황권이다. 황제의 손에 쥐어진 권력은 아무도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아무도 도전할 능력이 없다. 그가 이런 권력을 한 사람에게 넘겨주면 실제로 국가와 인민의 운명은 그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다. 충신의 손에 넘겨주면 국가는 운이 좋은 편이다. 예를 들어, 서계, 장거정이 그들이다. 최고권력이 간신의 손에 들어가면 국가와 인민은 재난을 받는다. 북경위기, 국가가 전복될 위기에 처한다. 당연히 최고권력을 황제 개인이 직접 장악하고 있으면 상황은 그대로 괜찮다. 대개는 전 양자의 중간쯤이 된다.

 

전제황권은 양날의 검이다. 북방의 강적의 계속된 압박에 대하여 최대의 능력을 집중하여 반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주체의 6차에 걸친 북벌로 몽골을 휩쓸었다. 그리고 북경위기의 해결문제에 있어서, 북경위기가 발생한 후, 황제는 영민하고 신속하게 모든 역량을 모아서 가까운 강적에 대응할 수 있다. 전3차 북경위기는 길면 수개월, 잛으면 1개월내에 강적을 쫓아냈다. 이것은 전제의 위력이다. 다만 전제의 폐단도 적지 않다. 혹은 그 폐단이 더욱 심각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제황권은 실질적으로 북경위기를 조성한 근본원인이다. 또한 명나라의 쇠락과 멸망의 근본원인이다. 기실 전제의 폐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심각하게 중국역사발전의 진전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누가 명나라정권을 망하게 하였는가. 답은 농민이 난도 아니고, 청왕조등 외래침략자도 아니고, 권력을 독점한 환관과 권신도 아니다. 황제 자신도 아니다. 오히려 전제제도이다.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황제가 명나라를 망하게 했고, 자기정권의 무덤을 판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