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종춘계(宗春啓)
한족(漢族)은 아마도 여러 민족이 융합하여 형성되었다. 한족의 성씨처럼 보이는 많은 성명은 그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한족이 아닐 수 있다.
동한(東漢) 말기 개략 20만의 흉노족이 섬서,산서로 들어오고 한족 성씨로 바꾼다. 위진(魏晋)시기에 좌도위(左都尉) 유표(劉豹)는 자칭 양한(兩漢)황실의 후손이지만,기실 흉노족이다. 그의 부친은 이름이 어부라(於扶羅)이고 그의 아들은 이름이 유연(劉淵)이다. 한족 유생에게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완전히 한족화한다.
남북조시대에 일부 선비족 귀족은 한족성씨로 바꾼다. 북위의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한 후, 자신의 척발씨를 원(元)씨로 바꾸고, 일부 공신들도 한족성으로 바꾼다. 구목릉(丘穆陵)씨는 목(穆)씨로 바꾸고, 보육고(步六孤)씨는 육(陸)씨로 바꾸고, 하뢰(賀賴)씨는 하(賀)씨로 바꾸고, 독고(獨孤)씨는 유(劉)씨로 바꾸고, 하루(賀樓)씨는 루(樓)씨로, 물뉴우(勿忸于)씨는 우(于)씨로, 흘해(紇奚)씨는 혜(嵇)씨로, 위지(尉遲)씨는 위(尉)씨로 바꾸었다. 이를 합하여 팔성(八姓)이라 한다. 서위(西魏)시기의 우문태(宇文泰)는 선비의 별부(別部) 사람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당나라의 이연, 이세민은 아마도 한족이 아닐 것이라고 한다.
임혜상(林惠祥)이 저술한 <중국민족사>에 따르면, "이당 일대에 그 군주는 순수한 한인이 아니다. 그 신하도 다수가 이민족 출신이다. 그들이 기용한 병사들도 다른 민족이 많았다." "그 문화도 이족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태종은 동생의 부인을 처로 삼고, 무후가 여황제가 되고, 현종이 며느리를 취한 것들은 모두 한족의 관례와 다르다."
풍승균(馮承鈞)의 <당대화화번호고>에서는 이연의 내력은 불분명하다고 말한다. 이연의 조상은 이름이 이호(李虎)인데, 이호의 동생은 이름이 걸두(乞豆)이다. 걸두의 모친은 이름이 달마(達磨)이다. 이 이름은 분명 선비족의 것이다. 만일 이연부자의 민족문제는 의문이 있다고 말한다면, 당나라말기에 독안룡(獨眼龍)이라 칭한 이극용(李克用)은 분명히 한족이 아닐 것이고, 사타부(沙陀部)의 돌궐인이다. 그의 부친은 이름이 주사적심(朱邪赤心)이다.
당나라때 사람 이광필(李光弼)은 <구당서>에서, "그의 선조는 거란의 추장이다"라고 하였다.
당나라때 사람 이정기(李正己)는 <구당서>에서 그는 고려(高麗)인이다라고 하였다.
당나라때 사람 상가고(尙可孤)는 "선비 우문의 별종이다"라고 하여 선비족이다.
당나라때 사람 이원량(李元諒)은 그의 선조가 안식인(安息人)이라고 하여 이란인이다.
원,명 양대의 몽골인, 여진인이 한족성으로 바꾼 경우는 더욱 많다.
<원사. 조량필전>에 따르면 조량필(趙良弼)은 원래 여진인이고, 성이 술요갑(術要甲)이었다. 그 발음이 와전되어 조(趙)가 되었다.
<원사.이정전>에 따르면 이정(李廷)은 원래 금나라사람이고 포사(蒲査)씨이다. 금나라 말기에 중원에 와서 이씨로 성을 바꾼다.
<원사.한찰전>에 따르면 인종은 한찰(罕察)에게 백(白)씨성을 내린다.
<원사.왕현전>에 따르면 왕현(王絢)의 원래 성은 사율(邪律)씨인데, 요나라의 대족으로 거란인이다.금나라말기에 그의 부친이 요서(遼西)로 피난갔고, 왕씨로 성을 바꾸었다.
<원사.유국걸전>에 다르면, 유국걸은 원래 여진인이고 성이 오고륜(烏古倫)이다. 나중에 중원에 들어와서 유씨로 성을 바꾼다.
명나라초기 베이징지구에는 대량의 몽골유민이 있었다. 홍무원년, 주원장은 오랑캐성을 사용하지 말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많은 몽골유민들은 한족성으로 고친다. <일지록>의 기록에 따르면, 한림학사 화니적(火你赤)은 곽(霍)씨로 성을 고치고 곽장(霍庄)이라 한다.
명영종 천순연간에 이르러, 일부 몽골인들이 조정에 들어와 관리가 된다. 명영종은 이들에게 사성을 하사한다. 예를 들어, 북평노(北平奴)는 백(白)씨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백충(白忠)이라 한다; 아랄철목이(阿剌鐵木爾)는 목(穆)씨성을 하사받고, 목의(穆義)라 한다; 정주려(頂住驢)는 정순(丁順)이라는 성명을 하사받고, 계백가노(季伯家奴)는 계안(季安)이라는 성명을 하사받는다.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에 일부 만주족은 한족성으로 바꾸었다. 애신각라(愛新覺羅)씨는 김(金)으로, 과이가(瓜爾佳)씨는 관(關)으로, 서목록(舒穆祿)씨와 서서각라(舒舒覺羅)씨는 서(舒)로, 비막(費莫)씨는 비(費)로, 혁사리(赫舍里)씨는 혁(赫)으로, 타탑랍(他塔拉)씨는 당(唐)으로, 희탑랍(喜塔拉)씨는 당(唐) 혹은 해(奚)로, 이이근각라(伊爾根覺羅)씨는 조(趙)로, 서림각라(西林覺羅)씨는 악(鄂)으로, 부찰(富察)씨는 부(富) 혹은 부(傅)로, 오아(烏雅)씨는 오(吳)로 바꾼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일부 만주족들은 신해혁명이후 부친 혹은 조부의 이름에서 첫글자를 성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경극의 선배예술인인 서덕보(瑞德寶)는 부친의 이름인 서상(瑞祥)의 앞글자인 "서"를 성으로 삼았다. 대공보(大公報)의 창간자인 영렴지(英斂之)이 "영"씨성도 그의 부친의 이름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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