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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청나라 유신(遺臣): 투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by 중은우시 2012. 9. 18.

글: 김만루(金滿樓) 

 

청나라황제의 퇴위조서가 발표되는 날, 황권청등(黃卷靑燈) 아래, 두 전통적인 사대부인 정효서(鄭孝胥), 운육정(惲毓鼎)은 서재에 앉아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정효서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침상에서 일어나서 좌불안석하며, 식사를 해도 맛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제 유로(遺老)로 끝마쳐야 하겠구나." 운육정은 "비분이 교차하며, 거의 삶을 포기했다." 스스로 강호의 일민으로 살아라기로 하여 더 이상 정치를 묻지 않았다." <정효서일기>를 보면, "....밤, 폭죽성소리가 빈번하게 들리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대청 이백육십팔년이 이날 저녁으로 끝이 났다."

 

강산의 주인이 바뀌고 옛것을 몰아내고 새것을 추진한다. 원세개(袁世凱)가 민국대총통에 오른 후, 서세창(徐世昌)은 그의 여러해동안의 가까운 친구로서 당연히 비황등달(飛黃騰達)해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 서세창은 급류용퇴(急流勇退)하여, 청도로 가서 머물렀다. 서세창의 방식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전통적인 사대부이고, 스스로 청나라조정이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고 느꼈다. 청나라황제가 퇴위할 때 태보(太保)의 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만일 원세개의 임명을 받는다면 이는 봉건사대부들로부터 욕을 먹을 일이었다. 그리고 민국초기는 국세가 안정되지 않아서, 리스크가 컸다. 차라리 몇년 한거하는 편이 나았다. 동시에 이렇게 하는 것이 '황은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좋은 명성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년후, 원세개는 다시 서세창에게 국무경을 맡아달라고 청한다. 이때 서세창은 마음이 움직인다. 그가 기차를 타려고 할 때, 동생 서세광(徐世光)이 그의 다리를 붙들고 통곡한다. "큰 형님. 설마 청나라왕실의 큰 황은을 잊었단 말입니까. 몇해전에는 친히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청나라황실을 잊지 않겠다'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어찌 그냥 흘려듣는 말로 삼으려 합니까. 당시에 의화할 때 형님은 원세개를 위하여 아이디어를 내주어 이미 사람들의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지금 다시 원세개를 위하여 일한다면, 장래 선제를 구천에서 무슨 면목으로 뵙겠습니까." 서세창은 그 말을 들은 후, 동생과 머리를 끌어안고 통곡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적막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대로 사라져서 시골에서 평생을 마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중에 북경으로 가서 원세개의 국무경이 결국은 되고, 한때 홍헌제제(洪憲帝制) 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서세창의 상황과 유사한 사람으로는 왕사진(王士珍)이 있다. 경자년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있을 때, 독일의 주교주총독이 군사훈련을 보고 감독하던 왕사진, 풍국장(馮國璋)과 단기서(段祺瑞)를 북양삼걸(北洋三傑)이라고 칭한다. 그중 북양지룡(北洋之龍)인 왕사진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그는 중추에 있으면서 신룡의 머리는 보이나 꼬리는 보이지 않는 경이었다. 원세개의 막료에 따르면, 연병과 관련된 상소나 하달문서는 모두 왕사진에게 살펴보게 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용목(龍目)"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원세개가 군기대신이 된 후, 왕사진도 육군부 시랑으로 승진한다. 이는 당시 북양장수들 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원세개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강북제독으로 있던 왕사진은 정우(丁憂)로 사직을 청한다(두번이나 청해서 겨우 허가를 받는다). 이를 통하여 원세개와 환난과 영광을 함께 하겠다는 뜻을 표시한다. 원세개가 다시 관직에 나간 후 즉시 왕사진을 고향에서 불러 육군부 대신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후의 정국발전은 왕사진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한다. 원세개는 청나라조정의 뜻을 받들어 민국군대를 진압하지 않고, 오히려 전선에서 잠깐 싸우다가 다시 담판을 하고, 다시 싸우다가 다시 회의하여 왕사진이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전선의 주장인 단기서는 돌연 '공화통전(共和通電)"을 보낸다. 왕사진은 그제서야 알아차린다. 원세개는 이미 청나라조정을 포기한 것이다. 그후 왕사진은 극히 분노하여, 전보를 보내어 단기서에게 묻는다: "황은이 큰데, 어찌 이런 계책을 낸단 말인가?" 이렇게 자신의 불만을 토로한다.

 

청나라 황제가 퇴위한 후, 북걍계의 사람들이 환호작약하고, 승진의 기회라고 여길 때, 모든 사람들에게 원세개가 가장 아끼는 심복으로 여겨지던 왕사진은 돌연 병을 핑계로 사직한다. 주위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랐다. 원세개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게 왜 자신을 보좌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물어본다. 왕사진은 한 마디를 던진다: "국가에서 병사를 천일간 기른 것은 필요한 때 한번 쓰기 위함인데, 난민들이 난을 일으키는데, 병력을 보내어 토벌하지 않고, 오히려 의화하다니, 이것은 고금에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말을 마치고, 왕사진은 많은 유신들처럼 고향인 정정현(定正縣) 우가장(牛家莊)으로 돌아가 은거한다. 은거기간동안, 왕사진은 스스로 대청의 자민(子民)으로 자처했다. 그는 변발을 유지했을 뿐아니라, 복식도 옛날 청나라의 법도대로 하였다. 집안의 대청중앙에는 광서황제가 친히 내린 '복(福)'자가 걸려 있었고, 매번 후손들이 그에게 새해인사를 할 때, 왕사진은 청나라의 관복을 입고 먼저 대청의 '복'자에 절을 하여 청나라의 황은을 잊지 않았음을 표시했다. 친구가 와서 그에게 다시 관직에 나서라고 권하자, 왕사진은 계속하여 한 마디로 거절한다. 그리고 그후 집에서 책이나 읽고 세상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공화(共和)문제에 있어서 '북양삼걸'은 각각 태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왕사진은 청나라조정에 충성을 계속한다. 단기서는 공화를 주장한다. 풍국장은 청나라조정에도 감정이 있지만, 원세개도 그에게 은혜가 있다. 그래서 그 사이를 오갔다. 단기서의 "공화통전"이 나온 후, 풍국장의 최초반응은 이해할 수 없으며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막료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풍국장은 아주 화가나서 말했다: "지천(芝泉)이 어찌 이런 전보를 낸단 말인가. 그 본인은 현재 보정에 있으니, 이 전보는 누군가 날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본 뜻인지 내가 물어봐야 겠다." 나중에 당기서는 친히 사람을 보내어 충국장에게 해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원세개의 뜻이라는 것도 토로한다. 풍국장은 그제서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일은 그렇게 지나간다.

 

청황제가 퇴위한 후,풍국장은 청나라의 관복과 관모를 모두 아주 중시했다. 그의 관모는 여전히 객청의 모자걸이 위에 얹혀 있었고, 먼지가 앉지 않도록 그는 특별히 사람을 시켜 관모위에 덮개를 씌워놓게 했다. 풍국장의 변발도 1912년 8월 천진으로 가서 직예도독을 맡을 때 비로소 자른다.

 

칠십이고춘수록(七十二沽春水綠), 연파일곡호정선(煙波一曲好停船). 이전 왕조의 유신들이 도망칠 곳이 없었던 곤경과 달랐던 것은 조계(租界)는 혁명당에게 비호지를 제공했을 뿐아니라, 마찬가지로 청나라의 유신들에게도 새로운 출로를 열어주었다. 청나라황제가 퇴위한 후, 일부 유신들은 천진, 청도, 상해등의 조계지로 피신한다. 그들은 기다렸고, 기대했다. 여러 사람의 기대를 등에 없고 이 국면을 수습해주기를. 비록 이런 가능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사라져 갔지만.

 

조계에 피난한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제사(帝師)" 진보침(陳寶琛)은 도 다른 유신의 대표이다. 그는 '청황조의 회복을 도모한 자'이다. 민국이후, 누군가 진보침에게 말한다. 이제 황제가 황위를 내놓고 물러났으니, 그냥 유신으로 살아가면 안되겠느냐고. 그러자 진보침은 말한다: "차라리 군주의 뜻을 어길 지언정, 구차하게 향리에서 유로로 명성을 온전하게 보전하고 싶지는 않다." 진보침과 유사한 사람으로는 양정분(梁鼎芬), 정효서, 나진옥(羅振玉)등이 있다. 이들의 몸에는 침통한 책임감이 많았다. 비록 이런 행위가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지만, 그중의 도덕적 역량과 정신적 지조는 우러러볼 만하다.

 

서양인 황제스승인 존스톤은 <자금성이 황혼>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신들은 손위조서를 듣자마자 곡을 하며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장기간 광서제를 따르던 한림원시독학사 운육정은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민국후 매번 정월초하루가 되면, 여전히 북으로 삼배구고의 예를 행했다. 그러나, 운육정은 변발을 자르는데 대하여는 아주 개방적이었다. 심지어 초모(草帽)를 만들어 변발을 자른 사람에게 팔려고까지 생각했다. 운육정의 변통과 다른 점이라면, '변수(辮帥) 장훈(張勛)은 머리 뒤의 변발을 충절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 때 제대로 변발을 기른 사람은 장훈과 그의 전우들이었다.

 

민국이후, 복벽을 꾀하던 유신들은 완전히 사회의 주변인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과거 군주이념을 죽어라 가지고 있던 꼴통들도 여럿 있었다. 예를 들어, 청나라황제 퇴위후에도 여전히 완강하게 반발하던 전 섬감총독 승윤(昇允)이 있다. 그는 병권을 내놓고 서녕으로 간 후에도 여전히 복벽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1913년 봄, 승윤은 쿠룬(庫倫, 지금의 우란바토르)로 돌아가서 옛부하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제정러시아 및 몽골왕공과 연합하여 복벽을 꾀한다. 그러나 계획이 너무 급히 이루어지다보니 성공하지 못한다. 같은 해 12월, 승윤은 다시 청도에 잠입하여 복벽활동을 벌인다. 1914년, 일본군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청도를 점령한다. 그후 승유는 일본수비사령관 오오타니(大谷)에게 지지를 구하기도 한다.

 

1917년 장훈의 복벽 전날, 승윤은 유신 정효서등과 서신왕래가 빈번했다. 그는 일찌기 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간 장훈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에게 큰 기회를 붙잡아 '복벽대업'을 완수해달라고 한다. 1917년 7월, 장훈은 부의를 다시 한번 등극시키고 복벽을 실행한다. 오랫동안 충성하던 승윤은 대학사에 봉해진다. 그가 이 '대학사'를 맡기 위하여 북경으로 갈 때, 단명한 복벽은 금방 끝이 나고 만다. 승윤은 크게 실망하여, 이때부터 힘을 쓰지 못한다. 승윤과 마찬가지로 복벽의 꿈을 품은 사람에는 공친왕 부위(溥偉)와 숙친왕 선기(善耆)등 황족이 있다. 비통스럽게도 이들이 의지한 대상은 바로 일본인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유신들중 고홍명(辜鴻銘)은 가장 재능이 있고, 가장 괴이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남양에서 태어나고, 서양에서 배우고, 동양에서 처를 맞이하고, 북양에서 관직에 올랐다" 일생동안 9종의 언어에 정통했고, 13개의 박사학위를 받은 괴걸(怪傑)이다. 죽을 때까지 변발을 자르지 않았다. 민국이후, 고홍명은 외국의 매체에 신해혁명당을 '깡패무리'라고 욕했다. 단납(端納)에 따르면, 그가 한 번은 해상여행때 고홍명을 만났는데, 이 괴인은 심지어 장훈을 설득하여 복벽을 하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고홍명의 절치통한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유신들은 무성(無聲)의 항의를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자순(自殉)이다. 자순은 원래 고대의 습속이지만 근대에도 보기 드물지는 않았다. 일찌기 1789년, 어사 오가독(吳可讀)은 서태후가 동치의 후사를 두지않는 것에 항의하여 혜릉에서 약을 먹고 죽는 "시간(屍諫)"을 한다. 1912년 9월 13일, 일본인들에게 '군신(軍神)'으로 불리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메이지천황의 장례일에 그의 처 정자(靜子)와 더불어 할복자살한다. 만일 이 두 건의 자순이 우충(愚忠)의 의미를 품고 있다면, 민국후 양제(梁濟, 梁漱溟의 부친)이 자순은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양제는 1918년에 자순한다. 그러나 그는 1912년 6월에 '필사'의 마음을 수립한다. 그후 7년동안 그는 후세인들에게 <별죽사화기(別竹辭花記)>라는 사망일기를 남긴다. 일기에서, 양제는 고요하게 자신의 생각, 인식 및 여러가지 곤혹을 얘기한다. 그가 1918년까지 미루어서 조치를 취한 것은 그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에게 관찰할 시간이 필요해서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점이라면, 양제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일찌기 청나라말기에 그는 변법신정에 찬성했다. 그리고 친구 팽익중에게 자금을 지원해서 <계몽화보>와 <경화일보>를 창간하게 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최초로 도화 및 백화문으로 백성의 지식을 계발하려던 새로운 정기간행물이었다. 자녀의 교육문제에서 양제는 상당히 개명되었다. 둘째아들 양수명이 5살 때 독서를 시작하자, 양제는 스승에게 '사서'를 읽게 하지 말고, <지구운언>으로 대체하게 했다. 양수명이 8살 때, 부친은 '중서소학당'으로 보내어 영문을 공부하게 한다. 이는 당시 선비집안에서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민국이후, 양제는 한 때 환상을 품기도 했다. "공화국에서 세력이 가장 큰 것은 국화이다. 현명한 인재가 가장 많은 곳도 국회이다. 옛날에 힘들어도 말할 수 없으면, 엎드려 상소를 하여 군주에게 호소했고 군주가 법을 만들도록 청구했다. 이제 힘든 일이 있어 말하고 시프면, 피눈물을 흘리며 청원하여 국회에 호소할 수 있고, 국회에서 주재하게 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자신에게 임무를 정한다. 매년 '3번 방청한다' 이것을 보고 난 후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민국이후, 국회는 소집개최된다. 그러나 그 역할을 정말 실망스러웠다. 양제가 보기에, 의원들은 '모조리 나라와 백성을 구할 마음이 없고, 일을 어지럽히고 사적인 일을 도모하여 말이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존중되어야 할 도덕이 그들에 의하여 천시되고 있다" 이들은 '사욕으로 마음이 흐려져서 시끄럽게 떠들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한다. 당쟁과 욕심 이외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민국의 난상에 양제는 크게 실망한다. 그는 생각한다. 청나라황제는 백성을 사랑하여 황제위를 내놓았는데, 지금 완전히 그 뜻에 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그가 몸소 실천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성실의 마음으로 이미 지나간 나라를 대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나라를 대할 것"을 환기시키려 하였다.

 

왕조의 변혁은 질서의 붕괴 이외에, 전통도덕이 몰락을 불러왔다. 양제는 <유필회존>에서 이렇게 썼다: "인민은 시비의 상식을 판별하지 못하고, 공화국을 믿으나 인생의 즐거움만을 누리는데, 기준과 구속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온 나라가 미쳐 날뛰고 소인배들이 거리낌없이 활개친다...현재 인민의 현황을 보면, 구도덕은 완전히 버려졌는데, 신도덕은 발명되지 않았다. 법과 기율이 사라졌다."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여, 악이 물밀듯이 밀려오니 일사천리의 기세이다."

 

양제를 곤혹하게 만든 것은 '공화체제'하에서, 사회풍기가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날로 악화되는 것이다. '전국이 사람들이 신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국면이 되었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고유의 성격, 입국의 근본'인 진의, 진정, 선량등의 전통도덕이 날로 사라져 버리고, 결국 나라가 나라답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1917년의 '장훈복벽'사건에 대하여 다른 유신들과 다른 점이라면, 양제는 이를 반대한다. 그는 여러번 글을 써서 말렸다. 그러나 장훈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그 결과 복벽은 반달도 되지 않아 실패로 끝난다.사후, 이 일에 가담했던 '명사'들은 하나도 순국하지 않는다. 양제는 이에 대하여 극도의 분노를 느낀다. 그후 죽을 결심을 한다.

 

나이 40이 넘고 재능이 출중했던 중간관료로서,양제는 기실 순국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민국이후의 각종 난상을 목도한 후, 그는 스스로 청나라와 일종의 신의로 묶여진 연대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책임을 위하여 죽으려 한 것이다. 죽음으로써 사람들을 깨우려 한 것이다. 1918년 11월 10일, 양제는 육십세 생일이 곧 다가올 때, 북경 적수담의 대류근 일대에 몸을 던져 익사한다. 3일전에,양제는 적수담 임호각을 간다. 거기서 그는 인생 최후의 3일을 보낸다. 이 투신을 위하여 그는 7년을 준비한 것이다.

 

양제의 자순은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이다. 죽기 전에, 그는 서탁에 17통의 유언과 7년동안 쓴 찰기원고를 남겨둔다. 유고에서, 양제는 세상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 몸이 죽은 것은 청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절대로 공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공화에 극도로 찬성한다. 청나라황제의 양위의 마음에 부응하지 못하여 공화애민의 정치를 실행하지 못하여 분개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나, 양제는 후인들이 그의 자살을 단순한 순국으로 이해하지 말아주기를 바랐다. 그가 말한 것처럼, "순국은 기실 청나라를 본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 배운 것을 본위로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수천년 성현의 시례를 강상으로 삼고, 우리 집의 조부, 선부모의 유전과 교훈은 어려서부터 세상에 책임을 지라는 주의였다. 이 주의는 나의 머리에 깊이 박혀 있다. 그래서 이 주의를 본위로 삼아 자순하지 않을 수 없다." 양제는 스스로 그의 자순은 '옛 것을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이고, 새로운 나라의 정의를 불려내기 위한 보잘 것없는 계책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양제의 죽음은 전왕조에 대한 충성이라기보다는 민국에 대한 실망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제가 죽은지 9년후, 북벌군이 중원을 석권하기 전날, 또 다른 저명한 유신이자 문화대가인 왕국유(王國維)가 곤명호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것은 아마도 과거폐지후 전통도덕과 문화가 날로 가라앉는데 대한 항의였을 것이다.

 

사람은 한번 죽는다. 어떤 사람은 무겁게 죽고, 어떤 사람은 가볍게 죽는다. 서지마는 말했다. 양제는 자신의 이상을 위하여 죽었다고. "마음대로 물러라. 천리, 의, 이상 혹은 칸트의 범주....즉 맹가자 말한 삶보다 더한 그 것이다." 그는 목적적이고 계획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고, 이런 순도의 정신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신해때, 혁명이 나무 빨리 왔다. 공화는 너무 쉽게 건립되었다. 신구간에 대결하거나 변론한 기회도 없었다. 민국이 돌연 나타나고, 건국과정이 너무나 엉성했다. 불투명했고, 비이성적이었다. 그래서 일부 전통적인 우수인재들이 고의로 신사회에서 유리된다. 이것은 새로 태어난 민국에 있어서 당연히 커다란 손실이었다. 사실상, 이상에서 언급한 서세창, 왕사진등을 제외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은 저명한 유신으로는 조이손, 추가래, 우식매, 장인준, 노내선, 잠춘훤, 심증식등이 있다. 정치세력의 대립과 신앙이념의 충돌하에, 당시 뛰어난 인재들은 민국이후 그저 벽만 바라보았다.

 

청황실의 퇴위후, 전 직예총독 진기룡은 자주 탄식했다: "이백육십팔년의 천하가 이렇게 끝난다. 슬픔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상해에 거주하는 기간에, 진기룡은 진삼립, 구홍기, 마후등이 유신들과 "일사(逸社)"를 조직한다. 정기적으로 서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이로써 우울함을 풀었다. '일사'의 조직자로서 진기룡이 지은 시가 한때 유행했다.

 

간난회수우경신(艱難回首又庚辛)

조장금다거국신(祖帳今多去國臣)

화옥돈첨지기루(華屋頓添知己淚)

강호유시수재신(江湖猶是秀才身)

백년양사녕무보(百年養士寧無報)

일주경천별유인(一柱擎天別有人)

기어유연제부로(寄語幽燕諸父老)

채번잉보한가춘(彩幡仍報漢家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