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기왕고(紀王崮) 춘추고묘(春秋古墓): 화맹자의 사위 중가씨(中叚氏)의 묘인가?

중은우시 2012. 6. 10. 16:10

글: 변문초(卞文超), 유개사(劉凱思)

 

 

 

3월부터, 고고학자들은 기왕고의 춘추대묘에 대한 응급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묘장의 형태와 출토된 기물등의 단서로 판단하면 고묘에 묻힌 주인의 신분은 제후급이다.

묘주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현재 증명된 것은 없다. 이에 대하여, 고고학자들 가운데에는 3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는 묘주가 현지인들의 전설에 나오는 "기왕(紀王)"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묘주인인 거국인(莒國人)이라는 것이고, 셋째는 묘주인이 화맹자(華孟子)의 사위인 중가씨라는 것이다.

기왕고는 기수(沂水) 천장향(泉庄鄕) 현정부소재지의 서북 4킬로미터에 위치해 있다. 해발 577.2미터, 면적은 약 4평방킬로미터이다. 남북방향으로 나있으며 모양이 특이하고 산세가 험준하다. 꼭대기의 벽은 약 20-30미터이고, 주위는 10여기 길이이며, 험(險), 수(秀), 기(奇)로 유명하다.

기왕고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천여년이 흘렀지만, 기왕의 전설은 현지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기원전690년, 기왕고 앞의 산길에는 전쟁의 깃발이 가득했고, 사람과 말이 몰려 있었다. 기(紀)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기애후(紀哀侯)가 군대와 백성을 이끌고 북방에서 달려왔다. 병마를 이끌고 옛 산하를 되찾고자 했다. 그리하여, 기나라의 마지막 왕도(王都)는 이 깊은 산의 언덕 위에 건립된 것이다. 언덕꼭대기의 북쪽에는 두 개의 완전무결한 깃대꽂는 구멍, 6개의 말에게 물을 먹이는 구유 그리고 부서진 벽이 있다. 두 개의 깃대꽂이구멍은 금란전의 동쪽 암석위에 있다. 서로 6미터 떨어져 있고, 깃대꽂이구멍은 깊이가 0.5미터, 직경은 약 0.4미터이다. 지금까지도 완전한 말에게 물먹이는 구유는 바로 기나라의 군용 음마조(飮馬槽)이다.

 

이 유적지에서 전설상의 금란전 유적지의 남쪽에는 이 열로 작은 언덕이 있다. 현지인들은 이것을 기왕분(紀王墳)이라고 부른다. 고묘의 서쪽, 금란전의 남쪽에는 샘물이 있다. 한줄기 샘물이 암석에서 떨어져 내린다. 이름은 "적답천(滴答泉)"이다. 샘물이 담홍색을 띄고 있어서 이 샘은 "지분천(脂粉泉)"이라고도 불린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곳이 기왕의 애비가 세수한 곳이라고 한다.

기왕고의 가운데는 유명한 뇌고대(鼓臺)이다. 이곳은 기왕이 언덕꼭대기에 포위되어 있을 때, 그는 급한 와중에 아이디어를 내어, 산양을 한 마리 잡아서 양뿔을 나무에 매달고, 양의 발이 닿는 곳에 북을 놔둔다. 양은 놀라서 마구 발을 움직였고, 북을 치게 되었다. 마치 병사들이 북을 두드리며 진군하는 득했다. 포위병사들은 허실을 알지 못하여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한다. 기왕은 그 틈을 타서 탑의 문아래로 내려가서 험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기왕이 이곳으로 도망쳐왔다는 전설은 역사문헌의 기록으로도 증명이 된다. <기수현지>(청 강희11년)의 기록에 따르면, "기왕고는 꼭대기가 넓고 평탄하다. 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기후(紀侯)가 나라를 떠나 이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도광7년의 <기수현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왕고, 전해지기로는 기자대부(紀子大夫)가 그 나라를 이 곳에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그렇다면, 기나라는 왜 '나라를 떠나 이곳에 거주"했을까? 이것은 기나라의 건국부터 얘기해야 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기나라는 오래된 강(姜)씨성의 제후국으로 염제의 후손이 만들었다. 상나라때가 되어 기나라는 서쪽으로 발전한다. 활동범위는 지금의 청주, 수광, 창락의 경계처이다. 원래 상나라의 동방속국이었다. 서주초기, 기나라는 염제의 후예여서 다시 주왕에 의하여 후작의 작위를 받는다. 당시의 기나라는 주왕실과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산동대학박물관 관장 방휘(方輝)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좌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은공 원년 팔월, 기나라사람들이 이(夷)를 정벌했다." 기나라는 이나라를 공격한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다. 춘추시대에, 기나라는 이나라와 같은 자그마한 제후국을 정벌했을 뿐아니라, 실력이 웅후한 제나라와도 대항했다. 서주의 기록에 따르면 기나라는 한때 제나라와 다투었다고 되어 있다. 기나라는 주나라천자에게 제나라에 대하여 비난하는 말을 하고, 주천자는 제애공(齊哀公)을 팽살(烹殺)했다.

그 후, 양국은 원한을 맺는다. 기나라는 여러번 제나라와 전투를 벌인다. 기나라는 노(魯)나라와는 사이가 좋았다. 두번이나 정략결혼을 하여 도움을 구한다. 그리고 주위의 거국(莒國)을 포함한 제후들과 회맹했다. 그러나 국력이 날로 쇠하여, 신속히 확장하는 제나라를 당해낼 수가 없게 된다.

기원전 693년, 제나라는 대거 기나라를 공격한다. 기애후의 동생인 기계(紀季)는 투항한다. 기나라는 둘로 나뉘어진다. 기원전690년, 제나라는 다시 병력을 일으켜 기나라를 공격한다. 긜고 기나라의 도성을 공격한다. 기애후는 남은 국토를 동생 기계에게 모두 넘겨주고, 나라를 빠져나와 도망치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기나라는 이때부터 제나라이의 부용국이 된다. 사학계는 보편적으로 이때 300년간 존속했던 기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본다.

 

1977년, 기수현에서 발견한 유가점자(劉家店子) 춘추대묘는 나중에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거국묘로 밝혀진다. 공간,거리로 보면, 기수의 춘추대묘는 춘추시대 거국의 수도이자 지금의 거현 현성의 서북방향으로 직선거리 50킬로미터 가량이다. 동시에, 성내의 고고전문가에 따르면 기수의 기왕고 춘추대묘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명백히 거국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 춘추대묘의 주인이 거국사람일까?

거국은 춘추시기 산동지구에서 제,노 두 나라를 제외하면, 비교적 강성한 국가였다. 춘추시대, 거국의 영지는 북으로 청도 교주, 교남, 유방창읍, 고밀, 제성일대에 미쳤다. 서쪽으로는 치박, 기원, 임기 몽음, 기수, 기남, 비현 일애데 미쳤고, 남으로는 기창산, 임술, 거남 그리고 현재 강소성의 연운항 북부까지 미쳤으며, 동으로는 황해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산동성 거국문화연구의 저명한 학자이자, 원 거현박물관(현재는 거주박물관이라 칭함)의 관장 소조경에 따르면, "물은 몽산에서 기수를 따라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거치는 곳은 모조리 거국의 영지이다." 이로써 추단하면, 기왕고 춘추대묘가 소재한 곳은 당시 거국의 판도에 속한다고 보인다.

초기의 유가점자묘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비교적 큰 묘실중 곽실(椁室)외에 일반적으로 모두 기물고이다. 배장된 청동기중, 력(鬲), 정(鼎)이 병존한다. 그리고 순장의 풍속이 성행한다. 기왕고 춘추고묘는 이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산동고고학연구소의 전 소장인 나훈장은 일찌기 유가점자묘의 발굴연구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묘장의 형태, 매장방법, 매장방식이건 그 조합이건, 이 두 지방은 비슷한 점이 많다.. 기수 춘추묘는 아마도 거국의 묘일 것이다."

 

고고학자인 장학해에 따르면, 예를 들어 묘실구조는 비록 유가점자묘가 비교적 넓지만, 춘추고묘와 비슷하다. 모두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다. 중간은 묘주인의 곽실이다. 북족과 남쪽에는 모두 변상(邊廂)이 있다. 남변상에서는 정(鼎)등 음식류청동기가 나오고, 북변상에는 악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악기에는 용종(甬鍾) 10건, 박종(鎛鍾) 4건, 뉴종(鈕鍾) 1세트 9건, 석경(石磬) 1세트 10건, 순우(錞釪) 2건이 있다.

유가점자묘에서 출토된 악기에는 두 건의 순우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장학해는 이렇게 해석한다. 두 곳은 악기조합에서 모두 순우가 나왔다. 제나라 노나라의 묘에는 순우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다. 이 지방의 고급귀족묘에는 모두 옥기가 나오 왕왕 순우가 나온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일치성을 나타낸다. 이외에, 출토된 종이 여러세트이다. 편종, 편박, 용종, 뉴종이 있다. 그러나 한 세트는 아니고 여러 세트이다. 이것은 묘주인이 생전에 악기를 아주 중시한다는 것ㅇ르 말해준다.

중국의 저명한 사학가 이학근(李學勤)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거나라땅은 중국문화의 발상지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장기간 고거(古莒)문화가 전해져 내려왔다. 그래서 소위 이속(夷俗)의 중심이 된다. 이문화와 화하문화는 예의 풍속측면에서 다른 점이 있다. "이문화에서, 국군이 죽은 후에 시호가 없다. 칭호도 모두 이름의 앞에 지명을 붙인다. 예를 들어 기공(紀公), 거구공(渠邱公)중의 '거' '구' '기'는 모두 거나라의 지명이다. 제나라의 제양공과 같은 류의 시호에 속하지 않는다." 고고학자 장학해의 말이다.

 

춘추대묘의 발굴에서, 명문이 있는 문물이 2건 나왔다: 정(鼎)이 1건, 동우(銅盂)가 1건이다.

4월 22일, 산동성문물국은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산동성 고고학자 왕은전은 그가 해석한 명문의 내용을 공개했다. 그가 "화맹자정(華孟子鼎)"이라고 이름붙인 정에는 5행 27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해독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맹자작중가씨부중자잉보정기미수만년무강자자손손보용향(華孟子作中叚氏婦中子媵寶鼎其眉壽萬年無疆子子孫孫保用享)"

왕은전의 분석에 따르면, 이 27자의 뜻은, 화맹자가 중가씨에게 시집가서 부인이 된 둘째딸 중자(仲子)에게 시집갈때의 혼수로 보낸 정이며, 만년동안 건강하고, 자자손손 영원히 향유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화(華)"는 국족(國族)의 이름이다. 이 땅에 살던 국가가 화국(華國)과 통혼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잉기(媵器)"이다. 묘주인은 화맹자의 사위이고, 중자의 남편 중가씨이다. 그렇다면 화맹자는 누구인가? 추측에 따르면, 화맹자는 산동의 귀족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증이 필요하다.

 

산동대학 역사문화학원 고고학과 교수인 임상굉은 그렇게 결론내릴 수 없다고 본다. "나는 원래 첫번재 문자인 '화'를 요 며칠간 살펴본 결과 '미(羋)'자이다. '미'는 초나라 국군귀족의 성씨이다. 그렇게 해야 이치에 맞는다."

현재 고묘의 주관실부분의 발굴은 이미 거의 끝났다. 전문가에 따르면, 묘주인의 유골은 이미 부패하였고, 가루상태라고 한다. 묘주의 신분에 대한 추측이 오락가락하고 있고,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하고 있다. 임상굉은 또 하나의 단서를 지적한다. 그는 말한다: "춘추시대에 부부동혈의 현상이 아주 많았다. 이를 보면, 기왕고 꼭대기에는 또 하나의 똑같은 규격의 성별이 다른 묘장이 있다. 또 다른 묘장주인으로 이 묘주인의 신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기왕고 춘추고묘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고고학자들의 추가적인 연구와 발굴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