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우어(徐友漁)
필자는 먼저 무엇을 "양개문혁"설이라고하는지를 얘기하고자 한다. 소위 "양개문혁"설이라는 것은 이런 주장이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발동한 그 문화혁명, 즉 관방에서 긍정하든 부정하든 하는 그 문혁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문혁은 모택동이 자신의 소위 혁명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혹은 그의 정치적 적수인 유소기를 타도하기 위하여 벌인 것이고 이것은 모두 겪은 문혁이며 사람들의 개념 속에는 이런 문혁이 있다. "양개문혁"설의 주장은 이런 문혁이외에 또 하나의 "인민의 문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혁은 중국인민이 모주석이 대민주, 대자보, 대변론를 하는 틈을 타서 이를 기화로 사회통제가 느슨한 상황하에서 투쟁하여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고, 특권계층을 타도한 이런 문혁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혁은 의미가 중대한 문혁이다. 이 문혁에 대한 주장은 현재 영향력이 아주 크다.
"양개문혁"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양개문혁"설은 왜 중요한가? 문혁연구는 중국내에서 일종의 금기이다. 그래서 모두 문혁연구상황을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필자는 먼저 상황을 소개하겠다. 실제로 문화대혁명이 막 발발하고(우리는 일반적으로 1966년 5월 16일에 발발했다고 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방의 연구간행물인 <중국계간>, <아주개람>, <공산주의문제> 및 미국의 랜드 씽크탱크는 기본적으로 6월부터 상황을 주시한다. 그리고 1967년부터 문화대혁명에 관한 전문저작을 출판하기 시작한다. 서방의 완전한 문혁학은 발생하고 발전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경전적인 문헌도 있고, 주요한 저작도 있으며 현재는 이미 대학의 교과서도 있으며 연구과정에서 중요한 대표인물도 있다. 이것은 서방에서의 상황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어떤 국면인가? 이런 말이 있다. "돈황은 중국에 있다. 그러나 돈황학은 서방에 있다. 문혁은 중국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문혁학은 국외에 있다." 국외에서는 유파가 형성되고 많은 권위있는 학자와 연구자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중국에 영형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중에 이런 상황을 바뀐다. 개략 십여년전부터이고, 개략 지20세기말, 많은 중국학자의 노력으로, 중국인의 문혁연구에 큰 성과가 있었다. 현재는 이미 문혁이 중국에서 발생하였지만 문혁학은 국외에 있다는 말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 중국인은 그래도 마지막에는 힘을 발휘했다. 문혁학의 주류역량은 중국학자의 손으로 넘어왔다.
문혁연구에는 많은 문헌이 있고, 많은 견해가 있으며, 또 많은 유파가 있다. 필자는 "양개문혁"설은 문혁연구에서 서방에서건 중국에서건 가장 중요한 학설이라고 보고 있다. 토론, 연구, 논쟁하는 사람이 가장 많고, 관점이 가장 많으며, 논쟁이 가장 격렬하고, 가장 집중되었으며 가장 기간이 긴 학설이다. 그외에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모택동은 왜 문혁을 일으켰느냐?"인데, 이 문제와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필자는 심지어 후자의 연구이론성과는 전자만 같지 못하다고 본다.그래서 "양개문혁"설은 문화혁명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혹은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다. 이것이 첫번째이다. 다만, 필자는 오른 이론을 논하는 외에, 기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개문혁"설이 현재 중국에서 아주 중대한 현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 문혁을 부정하는 것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문혁에 대하여 좋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다만 90년대 시장경제로의 개혁이 일어난 후, 양극분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빈부격차가 갈수록 확대되며, 부정부패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문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사조가 갈수록 힘을 얻었다. 현재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오유지향(烏有之鄕)" 웹사이트를 보면 모택동붐이 최고조에 달했다. 모택동의 "계속혁명"에 관한 사상, 특권계층을 타도한다는 사상, 특히 모택동이 문화대혁명때 내건 "사회공정"의 기치는 현재 중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문혁의 많은 주장은 갈수록 흡인력을 지닌다. 중국의 현재는 개방과 자유의 사회가 아니다. 중국의 대부분 백성들은 사회불공정문제의 처리, 중국사회변혁에 대하여 그다지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외부의 정보나 참고할 만한 것도 없다. 다만 모택동의 문혁에 관한 이론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사회의 불공정문제를 대할 때마다, 특권층의 부정부패문제를 대할 때마다, 중국이 어떻게 변혁해야할지의 문제를 대할 때마다, 그들은 문혁의 형향을 서방이론의 영향보다 크게 받는 것이다. 중국의 많은 민중들에게 있어서, 수량으로 보나 인심에 깊이 박혀 있는 것을 보나 가장 습관적인 사고방식은 문혁식의 사고방식이다.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고려할 때, 문혁의 행위모델은 예를 들어, "탐관오리, 주자파를 타도하자", "대민주"등등의 방식은 서방에서 아주 흡인력이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과 가장 관련있는 것이 바로 "양개문혁"설과의 관계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이 학설을 이해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혁은 이미 멀어져간 유령이 아니라, 현실생활에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영향을 주고 심지 어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이론자원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문화대혁명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의미있는 일이다.
먼저 "양개문혁설"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부터 소개하기로 하자.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가장 먼저 "양개문혁설"의 개념을 제기한 사람은 왕시저(王希哲)이다. 중국인의 문화혁명에 대한 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글을 그가 썼고, 아주 날카롭게 썼다. 필자는 심지어 아주 깊이있다고까지 생각한다. 그가 1981년에 발표한 글은 "모택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중요한 논문에서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상대적인 인민의 문화대혁명을 제기한다. 그는 말했다.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중간에 모택동의 매번 승리는 모두 인민의 그에 대한 인식이 더욱 심화되고 저항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라고. 1966-1971년의 감성적인 인식과 축적은 다시 1971-1975년의 비교적 이성적인 인식과 축적을 거쳐 마침내 1976년 4월 3일 인민 자신의 문화대혁명이 발발했다고.
그래서, 필자가 고증한 결과는 바로 최초로 왕시저가 1981년 <모택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논문에서 제출한 양개문혁의 학설은 처음으로 인민의 문혁을 제기한 것이고, 모택동이 정적을 타도하고자 했던 문혁과 대립하는 것이다. 왕시저라는 사람을 소개하기로 하자. 1974년에 문화혁명의 이단사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자보는 <사회주의의 민주와 법제를 논함>이라는 것이다. 광동의 3명이 쓴 "리이저대자보(李一哲大字報)"이다. 리이저는 3명의 작자가 자신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딴 것이다. "리(李)"는 리정텐(李正天)이다.나중에 광동미술학원의 교수가 된다. "이(一)"은 천이양(陳一陽)으로 간부이며 광동성 방송국의 간부이다. "저(哲)"은 바로 왕시저이다. 필자는 문혁을 연구하면서 이 몇몇 작자를 인터뷰한 바 있다. 나중에 자세히 연구해보니 그 대자보의 주요집필자는 바로 왕시저였다. 그는 강한 이론적사고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는 자오즈양(趙紫陽)이 광동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이 글은 아주 깊이가 있었으며, 문혁때의 다른 이단사조들과는 달리, 당시에 명확히 민주와 법제의 문제를 제출했다. 그들은 이를 빌어 임표(林彪)를 비판하였는데, 실제로는 모택동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비판한 것은 전체 문화대혁명이었다. 당초 아주 재미있고 기고한 상황이 나타난다. 모택동은 그들을 죽이지 말고 그들을 비(批)하라고 주장한다. 자오즈양이 그들을 비판할 때의 방법이 아주 특이했다. 이번에 비(批)할 때는 이전과 달랐다. 이전에 비판은 한바탕 혼내주고 한바탕 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100여회의 변론을 벌인다. 그들에게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허용하고, 자유롭게 준비하도록 하고, 그들의 대자보를 수십만장 인쇄하여 도처에 뿌린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한 가지 효과를 나타냈다. 그들의 관점은 가장 투철하게 전파된 하나의 사상이었다. 이 몇몇 사람들의 수준은 아주 높았고, 매번 변론때마다 당초 초청했던 광동에서 이론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 계속 교체되게 된다. 변론때마다 이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전을 인용하여 공격하는데 당하여 황망하게 도망쳐야했다. 그때 시중쉰(習仲勳)이 광동에서 정부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비교적 온화했고, 그들을 체제내로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그들중 어떤 사람은 편입되었다. 그러나 왕시저는 체제외에 있기를 고집했고, 현재는 해외민주운동의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주향암흑(走向暗黑)>이라는 자전(自傳)도 쓴다. 필자가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물론 이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보고 가장 인상깊었던 한 마디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얘기하고자 한다. 그는 나중에 민주운동활동에 종사하게 되는데, 특히 "천안문사태", "민주벽"을 묶어서 형을 받아 1차로 10여년을 받는다. 그가 두번째로 형을 살아 이미 십일년이 되었을 때, 1991년, 감옥안에서, 그는 방송을 듣는다. 그는 크레믈린궁의 붉은깃발이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이상, 과거의 이상과 현재의 이상을 생각하고 사회주의가 이런 길을 걸었다는데 대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인민의 문혁"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이점은 아주 깊이가 있다.
정이(鄭義)는 1996년의 "양개문학"에 대한 토론글에서 "양개문학"설을 필자처럼 왕시저의 것으로 귀속시키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류궈카이(劉國凱)의 <문화혁명간석>에서 "양개문혁"설이 먼저 나왔다고 하였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류궈카이는 노동자이다. 1970년대초에 광동성의 한 공장의 청년노동자인데, 그는 근 10만자에 이르는 저작 <문화혁명간석>를 쓴다. 필자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당초 국외에 있었고, 90년대에 문혁을 연구하면서 영문문헌을 보았다. 외국학자들이 그것을 번역해놓았다. 나는 먼저 영문번역본을 보았다. 나중에 홍콩중문대학의 중국연구센터에서 비교적 원시적인 인쇄본을 보았다. 이 본은 아주 진귀한데 나중에 잃어버렸다.류궈카이는 10여세의 청년노동자였다. 그런데 <문화혁명간석>이라는 저작을 썼다. 정이는 말한다. "양개문학설"과 "인민의 문혁설"은 류궈카이가 이 책에서 언급한 것이라고. 다만 필자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에게 이런 사상의 맹아는 있었지만, 왕시저처럼 정식으로 "양개문혁"과 "인민의 문혁"을 제출한 것은 아니었다. 류궈카이는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현재는 미국에서 트럭을 몰며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이 발기하여 성립한 중국사회민주당의 부주석이다. 현재는 왕시저와 대판 싸우고 있는 중이다.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하여 아주 높은 평가를 한다. 류궈카이라는 사람은 진정한 노동인민정당의 창시자라고.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은 자신이 무산계급을 대표한다고 말하지만, 류궈카이 본인은 육체노동자이고, 트럭운전수이다. 그는 자신의 육체노동으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땀방울을 흘리는 노동으로 돈을 번다. 다만 현재 정치적 주장에서는 엉망진창으로 싸우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양개문혁"설은 바로 또 다른 문혁에서의 가장 중요한 이론인 "사회충돌론(社會沖突論)"에서 나왔다. 문혁연구의 시기구분과발전은 개략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처음에 1996년 문혁이 발발한 때, 서방의 문혁연구자들은 주로 두 가지 문제를 연구했다. 문혁혁명의 일부 중대사건, 어느 지방의 성위서기가 타도되고, 성군구사령관이 교체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권력투쟁을 연구하는 것이다. 권력투쟁으로 모택동이 왜 유소기를 타도하고 도대체 권력투쟁인지 노선투쟁인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사람들이 문화대혁명을 연구하고자 할 때 우리 세대는 다른 각도에서 본다. 즉 문화대혁명때 우리는 어떻게 기만당했는가, 우리는 어떻게 당초의 아주 좋은 사회적 이상으로 이 사회이상을 모택동주석의 문화대혁명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마지막에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전체적인 서방의 문화대혁명연구는 70년대에 이미 큰 성과를 얻는다. 즉 그들은 이런 문제를 연구하지 않고, 그들은 문화혁명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권력투쟁, 노선투쟁을 중시했다. 우리의 혁명이상이 어떻게 기만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전체 사벙의 문화혁명연구는 신속히 노선투쟁 권력투쟁에서 사회문제로 옮겨간다. 그들은 문화혁명을 하나의 사회충돌로 보았다. 즉 서로 다른 이익의 사회집단, 사회계급 계층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49년 정권탈취, 혁명승리이후, 많은 인민들이 점차 압박받는 군중으로 변모하고 이는 밀로반 드질라스(Milovan Djilas)가 <신계급>이라는 책에서 내놓은 관점과 똑같았다. 압박받는 민중은 특권관료계층을 타도하여 그들은 문화대혁명에서 자신의 이익을 쟁취했다. 문화대혁명에는 많은 파벌이 나타난다. 단지 하나의 파벌만이 존재한 것이 아니다. 모두 맹목적으로 기만당해 모주석을 옹호한다. 문화대혁명은 기실 가장 중요한 내용이 각종 파벌이 투쟁하는 것이었다. 만일 모두 모주석에 충성한다면 모두가 기만당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왜 그렇게 많은 파벌투쟁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천군만마처럼 서로 생사의 결투를 벌인 것을 해석하기 어렵다. 실제로 서로 다른 파벌은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하여 그들 대오내의 구성원들은 서로 달랐고, 목표도 서로 달랐다. 중앙과의 관계도 서로 달랐다. 지도자와의 관계도 서로 달랐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시각을 사회충돌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문화대혁명연구에서 가장 잘한 것은 바로 사회충돌론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외국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중문이름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이홍영(李鴻永, Hong Yong Lee), 한국인. 아니타 천(陳佩華, Anita Chen), 오스트레일리아인등등. 그들의 이런 사회충돌론의 기본주장은 무엇인가? 바로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면서 중국최고위층 지도자들간의 권력투쟁 혹은 노선투쟁에 집중해서는 안되고, 단지 그들의 정책적 견해차이만을 고려해서는 안되고, 문화대혁명의 수억 군중이 문화혁명의 주체라는 점을 연구해야 하며, 수억군중의 사상과 행위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간의 끊임없고 피비린내나는 파벌투쟁, 이런 파벌투쟁은 실제로 중국내부의 사회모순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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