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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이론

도덕규범과 권력법칙

by 중은우시 2011. 3. 22.

 

 

: 왕립군(王立群)

 

한나라 혜제(惠帝) 7, 유영(劉盈)이 병사한다. 혜제 유영의 요절은 여후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여후에게는 아들이 유영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24살 때 요절을 하고 만 것이다. 노년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서 여후가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을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여후가 가장 우려했던 일은 혜제가 사망한 후 여씨종친들의 조정에서의 세력이 약화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후는 이때 오로지 여씨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데 집중한다. 혜제는 요절한데가 적자(嫡子)가 없었다. 여후는 혜제와 궁녀와의 사이에 난 전소제(前少帝)를 황위에 앉혀 먼저 황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다음 단계로, 그녀는 여씨성의 제후를 왕()으로 봉하는 문제를 의사일정에 올린다.

 

그녀는 우승상 왕릉(王陵)에게 물어본다. 여씨성을 제후왕으로 봉해도 되겠는지. 왕릉은 그 자리에서 반대의견을 내놓는다: “안됩니다”. 그녀는 다시 좌승상 진평(陳平)과 태위(太尉) 주발(周勃)에게 물어본다. 진평과 주발은 이렇게 대답한다: “고황제가 천하를 평정하고, 자제(子弟)를 왕에 봉했다. 이제 태후가 칭제하니 형제, 여씨를 왕에 봉하는 것은 안될 이유가 없다.” 여후는 그 말을 듣고는 아주 기뻐한다.

 

왕릉은 조회가 파한 후 진평, 주발에게 말한다: “당초 고황제와 피의 맹세를 했었고, 너희들도 그 자리에 있었지 않느냐. 고황제가 서허하였고, 태후가 여씨를 왕으로 삼고자 하는데 너희들이 그녀를 종용하고, 태후의 뜻을 받든다면 맹약을 어기는 것이다. 나중에 무슨 면목으로 지하의 고황제를 뵐 수 있겠느냐?” 그러자 진평, 주발은 이렇게 답한다: “지금 조정에서 직접 태후의 말에 반박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너만 못하다; 그러나,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천하를 안정시키는데는 네가 우리만 못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후는 왕릉을 전소제의 태부(太傅)로 임명한다. 실질적으로는 왕릉의 우승상직을 면직한 것이다. ,한시대에 승상의 권력은 막강했다. 승상이 반대하면, 여후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일을 성사시키기 어려웠다. 왕릉도 멍청하지는 않다. 금방 여후가 자신을 꺼려하여 의사결정권이 있는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알았다. 화를 참지못하고 그는 아예 병을 핑계로 문을 걸어닫고 바깥을 나가지 않고,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왕릉을 겉으로는 승진시키면서 속으로는 강등시킨 일은 진평에게 기회를 주었다: 여후는 진평을 우승상에 임명한다.

 

이 역사에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진평과 왕릉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유방이 백마맹세를 한 것은 주로 3가지였다: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 공이 없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하가 함께 공격할 것이다. 이 맹세의 내용을 보면, 왕릉만이 백마맹세를 준수하였고, 진평, 주발은 백마맹세를 어긴 것이다.

 

왕릉이 준수한 것은 도덕규범이고, 진평, 주발이 받든 것은 권력법칙이다.

 

도덕적으로 보자면, 왕릉이 고상하다. 그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여후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하에서도 여전히 선제의 맹세를 지키려고 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이 세력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왕릉은 여후의 분노를 사고, 스스로 화를 참지 못하여,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후 집안에서 병사한다. 나중에 조정의 여씨외척파와 황족파, 공신파의 투쟁에 왕릉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권력층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법칙으로 보자면, 진평, 주발은 잘못한 것이 없다. 누구든 권력을 가지면, 자신이 왕으로 봉하고 싶은 사람을 왕으로 봉할 수 있다. 이것이 맹약에 어긋나는지 여부는 따질 필요가 없다.

 

진평, 주발은 백마맹세를 위반했고, 자신을 보전했다. 여후가 죽은 후, 유양이 거병하고, 관영이 창을 거꾸로 든 후, 진평, 주발은 황족파 유양과 연합하여, 일거에 여씨세력을 제거해버린다. 이렇게 하여 여후외척파를 철저히 없애고, 유씨강산을 공고히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왕릉과 진평, 주발을 비교하면, 누가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세 사람과 여씨를 왕으로 봉한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도덕규범을 지키는 것과 권력법칙을 따르는 것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왕릉이 백마맹세를 지킨 것은 실질적으로 도덕규범을 지킨 것이다. 이것은 칭찬받을 만하다. 왕릉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후로 하여금 공신파들이 관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머리가 잘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황제가 친히 정한 법도를 어기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런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은 여후의 임종때에도 그녀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로 하여금 무엇이 정의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진평, 주발이 따른 권력법칙은 누구든지 권력을 가지면 그가 하는 것이 법이라는 것이다. 유방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유씨성을 왕으로 봉하면 되고, 여후가 권력을 잡았으면 여씨를 왕으로 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법칙에 따르면, 유씨왕이건 여씨왕이건 누가 맞고 누가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도덕은 고상하고, 권력은 현실이다. 왕릉은 현실의 이익을 잃고, 역사의 인정을 받았다. 진평과 주발, 특히 진평은 현실세계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여러 비난을 받고 있다. 현실에서 왕왕 도덕규범과 권력법칙을 둘 다 따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나타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