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삼주(韓三洲)
90년전인 1923년 5월, 30살된 고힐강은 공개적으로 전현동(錢玄同)에게 보내는 1통의 서신과 안어(按語)를 발표해서, 명확히 그의 "겹겹이 쌓아서 만든 중국고사(層累地造成中國古史)"이론을 제기한다. 이 이론의 기본내용은 이렇다. 선진(진나라이전)의 역사기록은 한 층 한 층 겹겹이 쌓아서 만들었다. 후대인들이 계속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여, 갈수록 풍부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발전함에 따라, 역사기록은 계속하여 앞으로 끌어올려졌다. "시대가 뒤일수록, 전설의 고사시기는 더욱 길어진다; 시대가 뒤일수록, 전설의 중심인물은 위대하게 변모한다." 예를 들어, "우임금은 서주시대에 이미 있었다. 요,순은 춘추말기에 비로소 나타난다. 늦게 나타날수록 연대는 앞으로 간다. 복희, 신농씨가 나타난 이후, 요, 순도 그의 후손이 된다. 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이런 가설을 건립했다: 고대사는 겹겹이 쌓아서 만든 것이다. 발생한 순서나 배열의 계총은 완전히 반대이다." 고힐강의 이론을 통속적인 말로 해석하면 역사가 유구할수록, 인물의 광환은 계속 커진다. 전설에서 가짜인 것은 더욱 많아진다. 당시, 고힐강의 이런 반전통의 이론이 나오자, 전국에는 거대한 반향을 불러온다. 게다가 마침 5.4신문화운동을 맞이하여, 일부 학자의 추파조란(推波助瀾)으로 여러가지 문제제기와 논쟁이 발생하여 수년이나 지속된다. "고사변학파(古史辨學派)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후, 고힐강은 각종 연구검토와 논쟁한 글을 묶어서 <고사변>으로 만든다. 7권의 책과 수백만자에 이르게 된다. 1926년 북평박사에서 제1책을 간행출판한 후, 의고(疑古)운동의 풍운이 일면서 1년내에 10번이나 재판이 나온다.
이때, 고힐강은 스스로 "공인된 망인(妄人)"이라고 자처했다. 그의 이런 의고이론이 세상에 나오자, 마치 사학계의 고요한 물에 던진 "중국고대사의 원자폭탄"이 되어,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자고이래로, 중국인들은 역사가 유구하고 연원이 유장하다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반고가 천지를 연 이래, 삼황오제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라고 외우고 다녔다. 그러나 고힐강에 이르러서는 이들 휘황한 역사가 모조리 후인이 날조한 존재하지 않은 사실로 되어 버렸다. 인류를 만든 반고라는 인물도 없을 뿐아니라, 우리가 존경하는 삼황오제도 없었다. 더더구나 소위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한 일도 없었고, 순임금이 다시 대우에게 선양한 일도 없었다. 대우는 아마도 어느 동물의 화신일 것이다. "우는 동물이고, 구정에서 나왔다."; 우리가 매일 절을 하는 조상 염황이제마저도 고힐강은 후인들이 추가해넣은 허환의 신상이라고 말한다. 이건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전국상하는 난리법석이 난다. 많은 사람들은 조상을 잃은 것처럼 그를 욕했고, 단지 소수의 학자들은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그가 마에 씌워서 감히 수천년된 성묘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때, 적지 않은 명사, 학자들은 분연히 일어나서, 고전의 문구들을 인용하여 고힐강과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고힐강은 약세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의고관점으로 고서에 기재된 해석하기 어려운 각종 모순을 반박했다. 나중에 또 다른 문화학자인 조취인(曹聚仁)이 이들 논쟁글을 모아서 <고사토론집>이라는 책으로 출판한다.
그때, 고힐강은 상해 상무인서관에서 편집인으로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 <독서잡지>에 고사신화전설을 뒤집는 글을 실어서 논전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학용본국사교과서>를 편집한다. 그는 일찌기 상무편역소 사지부 주임 주경농(朱經農)에게 의견을 구한 바 있다. 자신의 의고견해를 역사교과서에 수록해야하는지 아닌지를. 주경농이 대답했다; "현재 정부는 개략 이런 일을 신경쓸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약간 감추면서 쓰면 될 것이다.' 그래서 고힐강은 교과서에 "반고"를 언급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역대이래로 존경받아오던 "삼황오제"도 개략적으로 언급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여기에 "소위"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를 통하여 수천년동안 위대한 이미지의 인물이 실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 알았으랴. 이 중학교과서가 출판된 후, 일찌기 산동교육청장을 지닌 참의원 왕홍일(王鴻一)은 크게 불만을 가진다. 그래서 상무인서관을 탄핵하는 의안을 제출한다. 이 책은 공공연히 '삼황오제'를 멸시하는데 이는 '비성무법(非聖無法)한 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이를 철저히 조사하여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 국민당 원로 대계도도 이 의안을 가지고 떠들기 시작한다. 무슨 "중국이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사람들이 공동으로 자신들이 하나의 조상에서 나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삼황오제가 없다고 한다면, 전국인민을 하나로 단결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가? 이게 말이 되는가?" 일관되게 진보적인 면목으로 나타났던 이 국민당이론가는 더욱 겁나는 말을 한다: "민족문제는 큰 문제이다. 학자들이 마음대로 토론하는 것은 허가할 수 있다. 서점에 교과서를 출판하여, 대량으로 발행하는 것은 범죄이니 엄히 처벌해야 한다." 이렇게 격렬하게 말을 하니, 상무인서관도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상무인서관의 감리 장원제(張元濟)는 급히 상해에서 남경으로 간다. "당국원훈" 오치휘(吳稚暉)를 만나서 해결방법을 논의한다. 당시 국무회의에서 제출된 처벌조건은 아주 가혹했다. '이 교과서는 전후로 모두 160만부가 인쇄되었으니, 상무인서관에 160만위안의 벌금을 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상무인서관은 이런 거액의 벌금을 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오치휘에게 나서서 도와달라고 했고, 최종적으로 벌금은 면제된다. 그냥 발행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끝이 난다. 고힐강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의고행위가 명성이 혁혁했던 상무인서관의 명성을 훼손하게 될 줄이야.
고힐강의 "고사판학파"를 어떻게 포지셔닝할 것인가에 대하여, 사학계는 지금까지도 크게 의견이 갈리고 있다. 아직 정설이 없다. 당시의 노신도 자신의 소설에서 고힐강의 "기실 소위 우는 없다. 우는 한 마리 벌레이다. 벌레가 치수를 할 수 있는가?" 여러해 이후인 1952년, 중앙정부가 중국과학원에서 토론할 때 누군가 고힐강을 언급하자, 모택동은 즉시 "대우는 한 마리 벌레이다"라는 말을 한다. 모두 고힐강의 의고이론에 대하여 약간은 풍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말한다.
기실, 현재 보기에, 고힐강이 의고사상으로 봉건사학의 우상을 무너뜨리고, 당시 신문화운동의 중요전선이 된 것은 중국당대사상사에 상당히 큰 진보적인 의미가 있다. 새로 출판된 <모택동만년독서기실>이라는 책(중앙문헌출판사2012년판)에 따르면, 1975년 모택동은 노획 선생과 <이십사사>를 읽고나서 얘기하던 중에, "이십사사는 절반이 가짜이다. 소위 실록과 같은 류도 절반이 가짜이다." 그래서 <하신랑.독사>에서 모택동은 격앙하여 이렇게 읊게 된다: "오제삼황신성사(五帝三皇神聖事), 편료무애과객(騙了無涯過客)" 기실 이것이 의고이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와 위대한 전설이 정말 고힐강의 의고지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 후인들이 '성왕지도"를 위하여 추가한 것인지, 아니면 무중생유(無中生有)로 날조해낸 전설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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