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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이론

사마천(司馬遷)은 엉터리 사학가이다

by 중은우시 2010. 6. 22.

글: 황수우(黃守愚)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썼다. 그리고 스스로, "하늘과 사람의 사이를 통하고, 고금의 변화를 연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었다" 명산에 숨기고, 대록에 넣어서, 만세에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사기>>는 소설, 우언에 속하지, 순수한 사서(史書)라고 할 수가 없다. 사마천은 아주 질나쁜 선례를 열었다. 그리하여 후세의 소위 '사학가'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사서를 문학작품처럼 쓰는 것이다. 중국의 공식사서는 정객이 쓰거나 문인이 썼다. 진정한 사학가가 사서를 편찬한 경우는 드물다. 진수는 <<삼국지>>를 썼는데, 다른 사람을 협박했으니, 손에 악필을 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어떤 사람들처럼 돈을 주면 찬미하는 글을 쓰고, 돈을 주지 않으면 폄하하는 글을 쓴다.

 

당연히 필자도 사마천의 사견이나 견식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사서의 절반이상을 이야기를 꾸미는 것으로 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늘날의 저작권으로 문제를 살펴보자면, 사마천의 <<사기>>는 절반의 내용이 관방자료와 각종 문서를 베낀 것이다. 이들 내용은 <<본기>>, <<세가>>, <<팔서>>, <<십표>>에서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밀실에서 중요한 밀담을 나누면, 하늘과 땅과 당사자들만 아는 일이다. 사마천이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사마천이 초능력이 있어서 수백년전의 밀담을 들을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의 전기를 쓰면서, 그렇게 생동감있게 쓰고, 세부적인 사항을 명확히 쓰다니, 설마 사마천이 현장에 있었단 말인가?

 

사마천이 <<오제본기>>를 쓴 것은 가장 가소로운 일이다. 한무제시대의 정치적 필요에 영합하기 위하여, 길거리나 골목에서 들을 수 있는 신화전설을 모아서 황제의 족보를 만든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신화고사는 모두 믿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그것들을 모아서 사서의 첫머리로 삼는다. 이것은 사학을 망친 일이다. 그 악영향으로 지금도 황제가 말을 타고 천하를 돌아다니고 있다. 도처에 황제의 족적이 남아 있다. 염제, 순제, 능묘, 고향이 많은 곳에 흩어져 있다. 아무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호사가들은 황제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계산해내기도 한다. 사마천이 아무렇게나 엮은 신화,소설을 가지고....아마도 그는 혼자서 관 속에서 웃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런데도 머리를 짜내서 삼황오제를 고증하지만, 아직까지도 공인된 결론은 얻어내지를 못했다. 사마천의 속임수에 속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부학자들은 그것에 미쳐서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낭비를 했던가?

 

유방의 어미가 용과 교합을 했다니, 이런 엉터리이야기를 사서에까지 써넣다니. 이런 기풍이 시작되자, 중국인들은 역사를 기록하면서, 걸핏하면 신화로 시작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증국번의 출생을 쓰면서, 망사의 상서로운 길조까지 언급할 정도였다. 후안무치하기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학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진실이 제일이다. 증거가 없으면 그저 의문이 있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사서를 쓰려면, 당연히 근거있는 자료를 믿어야지, 아무렇게나 날조해서는 안된다. 사서를 무슨 소설, 우언처럼 써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마천은 바로 사학가로서의 이런 태도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을 했다.

 

그러므로, 필자는 사마천이 중국에서 가장 엉터리인 사학가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기를 소설, 우언처럼 썼다. 이것은 아주 질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