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유춘림(劉春霖): 마지막 장원

by 중은우시 2012. 10. 20.

글: 유계흥(劉繼興) 

 

중국은 수나라때부터 과거제를 실시하여, 1905년 청나라에서 과거제를 폐지할 때까지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있다. 이 기나긴 세월동안 수백명의 장원이 탄생했다. 그럼다면, 누가 중국역사상 마지막 장원일까?

 

많은 책에서는 장건(張謇)을 "마지막 장원" 혹은 "최후의 장원"이라고 부른다. 기실 장건이 장원급제한 것은 1894년이다. 그 후에 과거시험은 3번이나 더 시행되었다. 마지막은 1904년 서태후의 70세기념으로 증가한 은과(恩科)였고, 장원으로 합격한 사람은 유춘림이었다.

 

과거제는 청나라때가 되어 날로 몰락했고, 폐단이 갈수록 많이 나타났다. 1905년 청나라정부는 원세개등 총독순무들의 주청으로 과거제를 정지시킨다. 그리고 병오과(1906년)부터 모든 향시, 회시와 각성의 세과고시는 일률적으로 정지했다. 이렇게 하여, 천년을 이어오던 과거제도는 그 목숨을 다하게 된다.

 

그래서, 청나라 광서 30년(1904년) 갑진과 장원인 유춘림이 역사상 마지막 장원이 되었다. 소위 "제일인중 최후인"이 된 것이다.

 

유춘림(1872-1944)의 자는 윤금(潤琴), 호는 석운(石雲)이며, 직예 숙녕 사람이다. 그는 집안이 빈한하며, 수입이 보잘것없는 하급관리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제남, 보정부에서 일을 했고, 모친도 지부의 집안에서 여종으로 있었다. 유춘림은 어려서 부모를 따라 제남에 살았는데, 집안에는 자주 곡식이 떨어지곤 했다. 6살때는 고향으로 보내져서 백부백모가 기른다. 8살때는 사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했으며, 한번 보면 잊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사숙의 스승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 나중에 부모는 그를 보정으로 데리고 가서 연지서원(蓮池書院)에 입학시키고, 여기서 십여년간 공부한다. 그의 학업은 진보가 빨랐고, 원장인 오여륜(吳汝綸)은 그를 높이 평가한다.

 

오여륜은 "동성파(桐城派)" 후기의 아주 중요한 작가이고, 중국근대에 공로가 큰 교육가이다. 그는 일생동안 쓴 책이 자신의 키만큼 되었고, 영향력이 아주 컸다. 오여륜은 동치4년에 진사가 되고 증국번, 이홍장의 막부에서 일한다. 직예심주, 기주의 지주를 지낸다. 광서15년(1889년)부터 보정의 연지서원의 원장을 맡는다. 여러해동안 교육하면서 제자가 아주 많았다. 오여륜이 죽은 후, 그의 친구인 엄복(嚴復)은 대련을 써서 그를 아주 높게 평가했다: "평생풍의겸사우(平生風義兼師友), 천하영웅유사군(天下英雄惟使君)" 오여륜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유춘림이 당시 학업성취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은과는 송나라때부터 시작되었다. 명청시기에도 이 제도를 이어받았고, 청나라는 정기적인 과거이외에 조정의 경사가 있으면 특별히 과거시험을 치렀다. 이를 "은과"라 한다.  정과와 은과를 합쳐서 거행하는 경우에는 은정병과(恩正幷科)라고 불렀다. 광서29년(1903년)은 정과이다. 광서 30년(1904년)은 서태후의 70세탄신을 기념하여 치른 은과이다. 이 해의 은과는 중국최후의 과거였고, 유춘림은 운이 좋게도 장원이 된다.

 

유춘림이 운좋게 장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막후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 해의 전시에서, 주시험관은 진지하게 검토한 후 뽑힌 시험지를 등수에 따라 배열해서, 서태후에게 올려 결정하게 하였다. 관례에 따라 전삼갑(前三甲, 1,2,3위)은 최고지도자가 결정한다.

 

당시는 시국이 어지러워 내우외환이 있었다. 서태후는 오늘 아침에 술이 있으면 먹고 마셔서 취한다는 식으로 70세 생일잔치를 준비했다. 과거시험에서 길조를 얻기를 바란다. 그녀는 우선 주시험관이 정산 순서대로 시험지를 본다. 글씨도 예쁘고 문장도 화려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문장의 작자를 본 순간 즉시 노기를 띈다. 왜냐하면 작자는 광동의 응시생인 주여진(朱汝珍)이었기 때문이다. '주'는 명나라의 국성이다. 서태후가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珍)'자를 보고는 서태후는 진비(珍妃)를 떠올린다. 진비는 광서제의 측비인데, 광서제의 총애를 받아 광서제의 유신을 지지하고 자신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가려했다. 그리하여 분노한 서태후는 진비를 우물에 넣어 죽여버린다. 그래서 '진'자를 보자 다시 분노가 솟았다; 게다가 주여진은 광동사람이다. 그것은 서태후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홍수전, 강유위, 양계초, 손중산....이들 대청왕조의 '수역(首逆, 역적의 우두머리)"은 모조리 광동술신이다. 서태후가 보기에 광동사람이 가장 나빴다. 광동인에 대하여는 뼛속까지 한을 품었다. 그래서 주여진의 답안지를 한켠에 미뤄놓는다. 그리하여 그는 장원을 얻지 못하고 만다.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서태후는 다시 두번째 시험답안지를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조금 전의 노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왜냐하면 두번째 시험답안지는 직예(지금의 하북성) 숙녕사람인 유춘림이 쓴 것이었다. "춘림" 두 글자는 봄바람에 비가 내려 대지를 촉촉이 적신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 해는 가뭄이 들어, 봄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직예는 북경의 주변이고, "숙녕"은 정숙하고 안정된 태평성세를 의미한다. 당시 전쟁과 위기에 시달리던 청왕조로서는 자연히 길상의 징조이다. 그리하여 행운의 별은 유춘림에게 떨어진다. 원래의 2등에서 일약 장원이 된 것이다.

 

유춘림은 시서화에 모두 높은 조예를 지녔다. 특히 소해(小楷)에 뛰어났다. 그의 소해서법은 당시 최고였고, 후학들이 그를 종사로 모실 정도이다. 지금까지도 서예계에는 여전히, "대해는 안(진경)을 배우고, 소해는 유(춘림)을 배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장원급제후, 그는 한림원 수찬이 된다. 그리고 일본으로 파견되어, 동경법정대학에서 공부한다. 광서33년(1907년) 귀국하여 자정원 의원이 되고, 기명복건제학사, 직예법정학교제조, 북양여자사범학교감독등의 직을 맡는다. 신해혁명후 한때 집안에 은거하였다가, 원세개 대총통부내사를 맡는다. 1917년 12월, 중앙농사시험장 장장을 맡는다. 서세창, 조곤이 대총통으로 있을 때, 총통부비서방판 겸 비서청 대리청장이 된다. 나중에 직예성 교육청 청장, 직예자치주비처 처장등의 직을 맡는다. 일찌기 두번에 걸쳐 서세창을 대표하여 산동 곡부로 가서 공자대성절 전례를 주재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명성을 떨친다. 1928년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상해, 북경에서 시를 쓰고 글을 쓰며 보낸다.

 

유춘림의 민족기개는 특히 인정할 만하다. "9.18"사변후, 장개석은 동북군대에 싸우지 말고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유춘림은 이에 대하여 분개한다. 나중에 "만주국"을 설립한 후 부의의 명의로 유춘림을 부르고 그에게 만주국 교욱부 부장의 직을 약속한다. 그러나 유춘림은 거절한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침략군은 화북지방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화북일본점령지역에 친일정권을 수립하려 한다. 1937년 7월말, 북평(북경)에 북양군벌의 잔여세력인 매국노 강조종(江朝宗)을 주석으로 하는 "북평지방치안유지회"가 성립된다. 8월초, 천진에는 직계군벌, 정객, 매국노인 고릉울(高綾蔚)을 우두머리로 하는 "천진지방치안유지회"가 성립된다. 10월, 일본정부는 희다성일을 북평특무기관장으로 임명하여 매국노를 부추겨서 통일된 화북친일정권을 건립하고자 한다. 왕극민, 동강, 탕이화, 주심, 왕집당, 제섭원등이 친일 "정부주비처"의 구성원이 된다. 12월 14일, 북평에 "중화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된다. 왕극민이 행정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탕이화가 의정위원장이 되며, 동강이 사법위원장이 된다. 왕극민, 왕집당, 제섭원, 임시정부위원이 된다. 친일정부는 6부를 두는데, 행정부총장은 왕극민, 치안부총장은 제섭원, 교육부총장은 탕이화, 진제부총장은 왕집당, 실업부총장은 왕음태, 사법부총장은 주심이 된다.

 

당시 친일"중화민국인민정부"의 진제부총장인 매국노 왕집당은 유춘림과 같이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일본유학도 같이 갔다. 그는 유춘림 장원의 명성을 빌리고자 한다. 그래서 유춘림에게 북경시 시장의 요직을 맡기고자 여러가지로 설득한다. 그러나 유춘림은 모두 거절한다. 일본군은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유춘림의 집을 쳐들어가서 총칼로 온 집안 사람들을 쫓아내버린다. 나중에서야 가족들이 집으로 들어갈 수있게 해주고, 빼앗아간 재물도 돌려준다.

 

이처럼 유춘림은 두 번이나 친일정권의 관직을 거절하고 말년의 절개를 지켰다.

 

1942년 유춘림은 심장병이 발작하여 북경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