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구(吳鉤)
만일 지명도가 높은 만청상인(만청은 청나라말기를 가리킴)을 꼽는다면 필자는 호설암(胡雪巖), 성선회(盛宣懷) 및 장건(張謇)의 세 사람을 꼽을 것이다. 호설암(1823-1885)은 사료기록은 풍부하지 않다. 그러나 소설과 TV드라마 <홍정상인>의 영향으로, 호설암의 이름은 이미 삼척동자도 모두 알게 되었다; 성선회(1844-1916)는 '대매판(大買辦)"으로 주류근대사에서 유명하다; 장건(1853-1926)은 '장원실업가'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이 세 명의 대상인은 모두 강절(江浙, 장쑤, 저장) 사람들이다. 생활한 시대도 대체적으로 겹친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궤적과 상업이념은 크게 다르다. 그리하여, 역사와 후인들에게 남긴 이미지와 의미는 자연히 서로 다르다.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세 사람은 마침 3가지 서로 다른 상인의 경지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설암은 비록 지금 "홍정상인(紅頂商人, 홍정은 관모를 가리키므로 관직을 가진 상인이라는 의미임)"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는 세 사람가운데 출신이 가장 한미하다. 어렸을 때는 집안이 가난하여 다른 사람의 소를 키우면서 살았다. 자라서는 사람의 추천으로 항저우의 한 전장에서 학도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강호인의 의리가 있었다. 그리고 도박꾼의 용기도 있었다. 당연히 운도 좋았다. 그는 몰락한 관료집안 자제인 왕유령(王有齡)과 사귀게 되는데, 그는 전장의 돈 500냥을 횡령하여 왕유령에게 주어 북경에 과거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준다. 왕유령은 나중에 관직이 절강순무에 이른다. 그의 보살핌으로 호설암은 전장의 학도에서 전장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전장의 분점을 여러 성에 열었을 뿐아니라, 생사, 차무역까지 손을 떧치고, "서양인들과 무역을 했다" 이를 통하여 큰 돈을 번다. 왕유령은 또한 그가 지현(知縣)의 관직을 얻도록 소개해준다. 이것이 바로 '홍정상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유래이다. 왕유령이 죽은 후, 호설암은 적시에 그의 후임자로 절강순무가 된 좌종당(左宗棠)에게 10만석의 군량미를 보낸다. 그리하여 좌종당의 신임과 비호를 받는다. 나중에는 좌종당의 추천으로 포정사(布政使)직함, 가이품정대(加二品頂戴), 상천황마괘(賞穿黃馬褂)의 대우를 받는다.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그러나 호설암의 정확한 신분은 여전히 '민영기업가'이다. 청나라말기의 사회에서 장사를 하려면 권력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돈을 기부하고 관직을 얻어야 했다. 그래야 관료사회의 인맥을 개척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홍정상인"은 성선회라고 할 수 있다. 성선회는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서양관련업무를 처리했었다. 호설암이 금융시장과 생사무역시장에서 호풍환우하던 시절에 성선회는 이홍장(李鴻章)의 권력날개아래에서 배를 건조하는 초상국을 만드는데 참여하고 초상국 회판(會辦, 부사장에 해당함)으로 있었다. 그는 호북의 철광 석탄광의 업무를 주재했고, 천진전보국을 창업하고 전보국의 총판(사장에 해당)을 맡았다. 광서22년, 52세인 성선회는 이미 전체 대청제국의 선박, 전보, 광업 및 방직의 4대산업을 장악하고 있어다. 그리고 태상시소경의 관직(정4품)과, 전절주사권(專折奏事權)이 있었다. 만일, 호설암이 관직을 가진 사영기업가라고 한다면 성선회는 국유기업을 운영하는 정부측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성선회의 뜻은 순수한 상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관료가 되는 것이었고, 고관이 되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는 여러 곳에 손을 쓰고 돈을 써서 마침내 우전부상서(郵電部尙書)가 된다.
만일, 출신으로 따진다면 장건은 호설암, 성선회보다 '정통'이다. 그는 갑오년 은과에 장원을 했다. 한림원 수찬을 지낸다. 인맥으로 따진다면 장건은 호설암, 성선회 두 람보다 전혀 못하지 않다. 황제의 스승인 옹동화가 그의 은사이고, 원세개, 유곤일, 장지도등 관료중 거두들이 모두 그와 교분을 지니고 있었다. 강소순무 정덕전은 그와 아주 관계가 밀접했다. 그러나 장건은 관료사회에 뜻이 없었다. 그는 실업을 선택하여 사업의 길을 걷는다. 사업하는 과정에서 그의 관료사회의 인맥을 많이 활용했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장건은 호설암, 성선회보다 상인의 신분에 대한 자각과 독립적인 생각이 있었다. 그는 그의 인맥자원을 이용했지만 이는 모두 상인계층의 더욱 독립적인 지위, 더욱 큰 권리 및 더욱 큰 이익을 추구해다. 그가 생사공장을 창업할 때, 원래는 완전한 민영으로 하고자 했지만, 지분투자하려는 사람이 적고, 지분투자한 사람들도 소액을 투자하였으므로 할 수없이 정부자금을 끌어들인다. 이때 주주들이 정부자금이 투자되는데 대하여 반발하자, 장건은 "정부에서 간섭하면 내가 막겠다. 절대로 당신들이 손해보도록 하지 않겠다" 과연 장건때문에 생사공장은 '관민공동투자였지만, 모든 업무에서 관청은 관여하지 않았다' 장건은 가장 먼저 상회를 설립하자고 제창한 사람의 하나이다. 그는 관청은 권한을 상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상회가 관청의 권한을 일부 행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호설암과 성선회에게는 상인의 독립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그저 상인이 관청에 복속하고 따르는 것, 그리고 권력의 상업에 대한 멸시와 관여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호설암의 성공은 앞뒤로 지방최고권력자인 왕유령과 좌종당을 사귀었기 때문에 권력의 보살핌을 얻을 수 있었기때문이다; 성선회가 여러 산업에서 힘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호설암조차도 미치지 못한다고 탄식할 정도였는데, 성선회는 지분을 일부 이홍장에게 바치고, 이홍장이 그를 자신의 오른팔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진상인 왕모를 통하여 이연영에게까지 줄을 대고, 스스로 이연영의 '문하제자'로 자처한다. 여러번 이연영은 서태후의 앞에서 성선회가 충성스럽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상인이 자신의 운명을 관료사회와 긴밀하게 하나로 묶어버리게 되면, 권력의 프리미엄을 거둘 수는 있지만, 그들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일단 관료사회가 개편되면, 그들의 길을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고양의 소설 <홍정상인 호설암>, 증사강의 <호설암의 계시>를 보면, 이홍장은 좌종당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성선회에게 지시하여 좌종당의 사람인 호설암을 무너뜨리게 한다. 성선회는 인출사태를 일으켜서 호설암의 전장을 차례로 문닫게 만들고, 전체 호설암의 상업제국도 눈사태를 만난 것처럼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좌종당이 죽은 후에는 조정에서 가산을 몰수한다. 성선회의 운명도 별로 더 좋을 것은 없었다. 그는 우전부상서가 된 후, 천한, 월한철로를 '국유'로 회수하려고 하다가 사천보로운동이 벌어지고, 자정원이 이로 인하여 그를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청나라조정은 그를 비록 주이지 않았지만, 삭탈관직한다. 그는 감히 더 이상 북경에 머물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망쳐버리고 만다.
청나라말기라는 역사의 전환기에 서서 보면, 호설암과 성선회는 그저 시류를 쫓아간 사람이다. 장건이 그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면, 그는 호설암, 성선회가 갖추지 못한 사회적 인식과 정치적 자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호설암과 성선회의 경우 공공사무에 대한 관심이 그저 자선, 기부의 단계에 머물렀지만, 장건은 앞장서서 국가의 경제자유, 사회자치 및 헌전전환을 추진한다. 장건은 "나의 돈은 국가의 돈이다"라고 표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업으로 벌어들인 이윤을 모조리 교육, 자선, 공익에 쏟아부었다. 20여년동안, 그의 공익기부는 '257만에 이르고, 부채가 60여만에 이르렀다' 그는 조계에 숨어서 다른 사람들이 '비애국'이라고 공격하지도 않았고, 실질적으로 고향인 난통의 자치를 이끌었고, 정부관청으로부터 한푼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청나라말기의 국가입헌운동에서 장건은 적극적인 추진자이자 참여자였다.
같은 청나라말기의 상인들이지만, 장건의 경지는 호설암이나 성선회가 따르지 못할 수준이었다. 시대가 필요로 한 것은 호설암이나 성선회가 아니라, 장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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