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엄숭(嚴嵩)의 여러가지 얼굴: 서생에서 간신까지

중은우시 2013. 7. 12. 22:23

글: 범군(范軍) 

 

청순(淸純)

 

처음에 엄숭이라는 명인이 세상에 남긴 얼굴은 청신가인(淸新可人)이다. 마치 일개 서생과 같다. 강서 분의(分宜) 사람인 그는 5살때 글을 읽기 시작하고, 9살때 현학에서 공부했으며, 10살때 현시에서 성적이 이미 발군이었다. 19세이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고, 25세때 정시의 이갑제이명(二甲第二名)으로 진사출신(進士出身)이 된다. 정덕2년(1507년) 엄숭은 한림원편수가 되어 7품의 관직에 오른다. 이해에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가볍게 중앙정부의 공무원이 된 것이다.

 

사실상 엄숭은 고관자제도 아니고, 부호자제도 아니다. 그의 집안은 빈한하였고, 분의만해도 이미 편벽한 시골이다. 엄숭이 출생한 분의 개교촌은 더욱 가난하고 먹고살기 힘든 곳이었다. 부친은 가난한 선비로,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리치고 있었다. 수입은 보잘 것 없었다. 엄숭은 이런 배경하에서 남보다 두드러지려면 그 자신의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명은 변화막측하다. 정덕2년 엄숭에게 보이지 않은 차가운 빛을 드리운다. 이해에 환관 유근(劉瑾)은 조서를 임의로 만들어 53명의 고관명단을 내걸고 간당(奸黨)이라 칭했다. 그리고 이를 조당에 공포했다. 그리하여 백관들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덕제 주후조는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내궁을 시장으로 개조하였다. 그는 태감들과 이 폐쇄된 시장에서 상인복장을 하고, 즐겁게 큰소리로 값을 깍으면서 물건을 팔고 샀다. 이같이 잘못된 역할놀이에 빠져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명을 내려 서화문밖에 "표방"을 만들어, 놀고 먹고 즐기는 장소로 썼다. 서생 엄숭은 혈기방장한 나이였다. 정계의 추악한 현상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아부하거나 결렬하는 것뿐이다. 다른 제3의 길은 없다. 결렬한 자의 최후는 비참했다. 이해에 남경어사 장흠(蔣欽)은 그의 결렬로 생명을 댓가로 치르게 된다. 삼월, 장흠은 상소를 올렸다: "유근은 소인입니다. 폐하께서 복심 고굉으료 여기시고, 그가 패역의 무리이고 나라를 망치는 도적임을 알지 못하시니.....신의 말을 들어주어 유근을 주살하여 천하인들에게 알리시고, 그 후에 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이것은 장흠이 생명을 걸고 유근과 싸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장을 맞고 감옥에 투옥된다. 삼일후, 장흠은 다시 상소를 올린다: "신과 도적 유근은 세불양립입니다. 유근이 악을 쌓은지 하루이틀이 아닙니다...폐하께서 유근을 죽이지 않으시려면 먼저 신을 죽이시옵소서. 신은 용봉(龍逢), 비간(比干)과 함께 지하에서 놀겠습니다. 신은 이 도적과 같은 세상에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장흠의 이 상소는 언사가 과격했다. 결과 다시 정장 30대를 맞고, 3일후 감옥에서 사망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장흠의 죽음은 관료사회의 신인인 엄숭에게 하나의 경고가 된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결과가 참혹하다는 것이다. 한림원 편수인 그는 인미언경(人微言輕)하다. 자연히 관료생태를 바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숭은 막 관료사회에 발을 내딛자마자 마음이 우울해진다. 정덕3년, 엄숭의 조부와 부친이 연이어 사망한다. 법도에 따르면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3년간 상을 치러야 한다. 이것은 엄숭에게 암흑같은 관료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황제부터 권신까지 모두 호작비위(胡作非爲)식의 인물이지만, 자신이 그들과 함께 어울릴 필요는 없다. 청년 엄숭은 즐겁게 강서 분의 개교촌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효자 겸 은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엄숭을 은사(隱士)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부모상을 이유로 이 산골짜기에 8년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정덕3년부터 정덕11년까지, 엄숭은 비폭력, 비협력의 방식으로 정계를 멀리 떠났다. 마치 세속에 실망하여 동류합오(同流合汚)하지 않으려는 서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엄숭이 고향에서 한 일은 확실히 서생의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하는 상태였다. 후세에 남긴 것은 "파저청예(頗著淸譽)"의 얼굴이었다. 엄숭이 이때 마음 상태는 아마도 도연명식이었을 것이다. 귀원전거(歸園田居)의 상태였을 것이다. 그는 고향의 검산(鈐山) 산록에 검산당(鈐山堂)을 짓고 은거하며 글을 읽었다. 그리고 <검산당집>을 썼다. 자신을 "일관계적봉다병(一官係籍逢多病), 수구휴가식구빈(數口携家食舊貧)". 이 학종남산전(學種南山田)의 말은 2,3십세때의 엄숭의 정신층면을 보여준다. 이때는 여전히 지존아취(志存雅趣)했고, 관직에 뜻을 그다지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숭이 검산에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33세때 귀한 아들을 얻은 것이다: 엄세번(嚴世蕃). 나중에 엄숭에게 여러가지 골치거리를 떠안기는 이 아들이 당시의 엄숭에 있어서는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진귀한 선물이었다. 그는 그래서 시를 지어 기쁜 마음을 표시했다: "삼식년과방유자(三十年過方有子), 각론정사집비환(却論情事集悲歡)...." 엄숭은 은거기간동안 모두 700여수의 시를 짓고, 원주지부의 요청으로, <정덕원주부지>도 편찬한다. 엄숭의 이런 생활은 확실히 일개 서생 혹은 명리에 담백한 서생만이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정덕3년 은거한 때로부터 정덕11년 다시 관직에 나올 때까지, 명나라 제국의 정계는 풍운이 일었다. 유근은 한 손으로 정덕5년까지 하늘을 가리다가, 또 다른 태감에게 쫓겨난다. 그후 명나라 제국은 유근의 일당을 제거하여, "일시조서위청(一時朝署爲淸)"하게 된다. 원래는 관료사회가 이후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무부 강빈(江彬)이 입경하여 화란이 다시 일어난다. 정덕제는 경영(京營) 변군(邊軍) 훈련을 실시한다. 강빈은 정덕제의 총애를 받아 궁내에서 군대를 훈련시킨다. "아침 저녁으로 말을 달리며 훈련하고, 갑옷의 빛이 궁전에 비치며, 고함치는 소리가 구문에까지 이르렀다." 정덕제는 총사령관의 모습을 하고 검열을 하곤 했다. 매번 미복으로 밤에 나가 교방사에서 놀면서 조정은 돌보지 않았다.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36살의 엄숭은 귀원전거식의 느긋한 생활을 마치고, 새로 관직에 나선다.

 

재출도한 후의 엄숭은 여전히 한림원 편수였고, 여전히 그다지 실권이 없었고, 여전히 분세질속(憤世嫉俗)했다. 시의에 맞지 않는 하급관리로서, 그와 교유하는 인물은 모두 일시의 명사들이었다. 아무런 배경도 없는 한림원 편수가 이렇게 많은 명가대유들과 서로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엄숭이 서생관리로서 문학적 소양이 상당히 괜찮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중의 사실이 증명한다. 엄숭은 청사(靑詞)를 아주 잘 썼다는 것도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그외에 엄숭은 서예에 뛰어났다. 이 점은 그의 진실한 실력이다.

 

모두 알다시피, 엄숭이 재출도한 후 서생의 본성을 고치지 못했다. 조정을 비판하고, 시문을 지었다. 정덕제가 놀기를 좋아하고 조정을 등한시하는 배경하에서, 엄숭의 그런 강개진사(慷慨陳詞)는 세상사람들로부터 좋은 명성을 얻었을 뿐 실질적인 좋은 점이나 혹은 나쁜 점은 없었다.

 

그후, 가정제가 명나라제국을 통치하게 된다. 엄숭의 관직생활에 약간의 전기가 마련된다. 그는 먼저 남경에서 한림원 시독, 서장원사(署掌院士)를 지낸다. 가정4년(1525년), 45세의 엄숭은 국자감 제주가 되면서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겨온다. 국자감 제주는 종4품이다. 현재의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주요임무는 대학의 법을 장악하고 학문을 가르치고 시험을 치는 것이다. 엄숭은 직위에서는 올라갔지만, 여전히 권력핵심 바깥의 인물이었다. 가정제는 심지어 그를 정면으로 봐주지도 않았

다. 이때의 엄숭은 여전히 서생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관직의 부침에 그다지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조용히 그의 성격 깊은 곳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3년후인 가정7년, 엄숭은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는 더 이상 청순한 서생이 아니었다. 중용지도를 따르는 관료사회의 인물로 변신한다.

 

유미(柔媚)

 

가정7년, 엄숭은 국자감제주에서 예부우시랑으로 발탁된다. 이는 한직에 있던 부청장급의 간부가 졸지에 실권을 지닌 기관의 차관급 간부로 영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그는 중앙부서의 고급간부행렬에 들어간다.

 

이 해, 가정제 주후총은 엄숭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호광 안륙(지금의 호북성 종상)으로 가서 현릉(顯陵)의 확대공사를 감독하게 된다. 이 공사는 가정제의 돌아가신 생부 흥헌왕의 묘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정덕제의 사후에 후사가 없었으므로 족보로 보면, 주후총은 그의 당제(堂弟)이다. 혈연관계가 가장 가까웠다. 그래서 그가 황제에 오른 것이다. 가정제가 황제에 오른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백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부 흥헌왕을 황제로 추존한 것이다. 그리고 흥원왕의 묘를 황제릉의 법도에 맞추어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 현릉확장공사는 효도에 관련된 중대공사였다. 무게있는 사람이 서 주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엄숭은 이 때 48세였다. 연령으로도 어느 정도 노숙했고, 안정감이 있는지는 불명확했다. 왜냐하면 전에 그의 행위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정을 비판하는 젊은이라는 인상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중년이 되었으니, 그는 여전히 조정에 비판적인 젊은이에서 조정에 비판적인 중년인으로 된 것일까? 확실히 엄숭은 이때 관직에서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기회를 잘 잡으면 일거에 올라갈 수 있었다. 만일 이전의 버릇이 나와서 계속 세상을 비판하게 되면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관직은 여기서 좌절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엄숭 시랑은 어떻게 했을까?

 

엄숭은 종상에 도착한 후, 가정제의 지시에 따라, "천수산칠릉의 법제"에 맞추어 현릉을 대규모로 확장한다. 확장공사에 동원된 백성이 전후로 2만여명에 이른다. 총비용은 백은 60만냥이 들었다. 예부시랑으로서 공부 혹은 호부시랑이 아닌데, 엄숭이 이 정도의 공사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음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적으로 일을 마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 엄숭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조정에 돌아왔는데, 곁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그는 현릉확장공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남 재난지구의 재난상황이 심각하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가뭄으로, 풀잎, 나무껍질을 모조리 다 먹으며,  굶어죽은 시신이 길거리에 쌓여 있다. 시장에서 떡은 사람들이 빼앗아 가고, 자녀를 판 돈으로는 배불리 한번 먹을 수도 없다. 아이를 들판에 버리고 간다..."

 

이 해는 가정7년이다. 명나라제국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났는가? 투루판무장부대가 숙주를 범하는 사건을 평정하고, 요민(瑤民)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 일어나고, <대명회전>를 새로 제정하며, <명륜대전>을 반포하고, 통혜하를 준설한다. 제국이 태평성세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고 있을 때였다. 특히 이 해에 가정제는 대예의사건후에 마침내 자신의 생부생모에게 황고, 성모라는 존호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천하에 이를 고한다. 이런 길상여의의 해에 황고, 성모의 명성에 먹칠을 할 수는 없다. 엄숭이 감독하여 만든 현릉확장공사는 기실 길상여의의 중요부분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공사완공후에 하남의 재난상황이 심각하여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벌어진다고 상소를 올리다니, 이는 사실상 머리가 이상하다고 보지 않으면 다르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행운스럽게도, 가정7년의 엄숭은 위험하기는 했지만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황제의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 이것은 또 무엇때문인가? 원래 엄숭이 올린 것은 상소문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그는 나쁜 내용을 올린 후 즉시 좋은 내용도 올렸다. 엄숭은 상소에서 그가 이번에 현릉의 공사를 감독하면서, 도중에 재난을 보는 외에 더 많이 본 것은 상서(祥瑞)라고 말한다. 특히 비석을 세우는데 쓴 돌은 보통이 아니었다. "백석산조양(白石産棗陽), 유군학집요지상(有群鶴集繞之祥)", "비물입강한(碑物入江漢), 유하수취장지이(有河水驟長之異)"가 있었고, 비석을 세울 때, "욱운양우(燠雲釀雨)", "영풍삽연(靈風颯然)"했다. 엄숭은 이로 인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황제에게 글을 짓고 비석을 세워 이 상서로운 일을 기록하자고 건의한다. 엄숭의 이 두 개의 상소는 일우일희(一憂一喜), 선우후희(先憂後喜)이다. 이전의 서생시대의 엄숭처럼 직설적으로 말하거나 마음 속의 이야기를 다 하지 않았고, 심기를 숨기고 먼저 하남의 재난상황이 엄중하다는 것을 말하여 우국지정을 토로한 후, 다시 상서를 알리는 상소를 올려 그의 충군지정을 드러냈다. 일우일희는 실제로 이곡동공(異曲同工)의 교묘한 술수였다. 그것은 바로 두 글자로 요약된다: 유미(柔媚). 유미는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기본공이다. 서생의 본성이 아니다. 가정7년의 엄숭은 자신의 제1차변신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분청(憤靑,분문노한 청년)에서 미중(媚中, 아첨하는 중년)으로 변신한 것이다. 확실히 가정제는 엄숭이 이런 변화를 즐겁게 보았다. 엄숭의 일우일희 상소에 대하여 황제는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착실하게 해결한다. 그는 조서를 내려, 당해 지방의 조세를 감면해준다. 그리고, 상서소에 대하여는 가정제가 더욱 칭찬하여 말한다: 지금 엄숭의 말은 충성스럽다. 그 성의를 무시할 수 없다. 글을 지어서 기념하고 비석을 세워서 후세에 남겨라" 결국, 엄숭이 이런 식으로 두 건의 상소를 올린 것은 관료사회의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았다는 것이다.

 

가정7년 "2건 상소" 사건이후, 엄숭의 관운은 트인다. 가정15년, 엄숭은 예부상서의 관직에 오른다. 마침내 명실상부한 장관급이 된 것이다. 다만 2년후인 가정 17년 엄숭은 돌연 중대한 시험에 직면한다. 이 해에 가정제는 그의 생부를 태묘에 넣고 싶어한다. 예부에 회의를 열어 이 일을 논의하도록 시킨다. 엄숭은 예부상서로서, 반드시 이 골치거리를 해결해야 했다. 엄숭이 황제가 시키는대로 하면, 자신의 "파저청예"한 이미지는 즉시 붕괴될 것이다; 만일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예부상서를 계속할 수가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처음에, 엄숭과 다른 대신들은 막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황제는 대노해서, <명당혹문>이라는 글을 써서 조정대신들을 힐책한다. 내용은 신하들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기치가 선명하기 그의 생부가 태묘에 들어가는 것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료에 따르면, 엄숭은 혼이 난 후, "황공해하고 두려워하며, 이전에 했던 말을 모조리 바꾼다" 그의 유미한 태도는 다시 한번 드러났다. 엄숭은 먼저 경전을 인용하여 이전에 그러한 사례가 있었음을 밝힌다. 그뿐 아니라, 엄숭은 이 일에 관하여 <경운부>, <대예고성송>을 써서 가정제를 기쁘게 한다.

 

이제, 엄숭의 이전 청순한 서생얼굴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를 대신한 것은 유미한 권신의 얼굴이다. 30여년의 관료생활을 거치면서, 엄숭은 마침내 아무런 모난 곳이 없는 아란석(鵝卵石)이 되었고 더 이상 날카로움은 없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기실 완전히 그러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층면에서, 엄숭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심지어 사람을 다치게 할 정도였다. 단지 엄숭의 날카로움은 황제를 향한 것이 아니라, 동료를 향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일찌기 그를 추천해주었던 예부상서를 지낸 각신(閣臣) 하언(夏言)이 그 대상이다.

 

음한(陰)

 

하언은 엄숭보다 12년이나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들 둘은 기실 같은 강서출신으로 고향사람이다. 다만 피차간에 그다지 많은 교류는 없었다. 당시 하언은 하급간부로서 중고급간부인 엄숭과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발생할 것같지 않았다.

 

다만, 가정7년은 의미심장하다. 이해에 엄숭은 승진하였고, 하언도 하늘과 땅에 나누어 제사지내자는 상소문으로 칭찬을 받고 4품녹봉을 받는다. 나중에는 시독학사가 된다. 얼마후 하언은 장한림원사가 된다. 그후에 예부좌시랑을 겸한다. 이어서 마지막에는 예부상서에 오른다. 가정15년에는 태자태보, 소부, 태자태부의 직을 추가로 받는다. 엄숭은 가정15년에 하언이 입각하여 국가중대업무에 참여하게 되면서 예부상서직을 넘겨받게 된다. 긜고 태자태보, 소보가 된다. 하언보다는 6년이 늦었다. 가정7년에서 가정15년의 시간궤적에서, 엄숭과 하언은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같았다. 점차 거리가 벌어졌다.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고부수(高富帥, 키가 크고, 부유하고, 잘생김)"한 사람은 어느 시대든 유리하다. 하언은 몸이 크고, 눈매도 잘 생겼으며, 아주 예술같은 수염도 기르고 있다. 마치 바람앞의 옥으로 깍은 나무(臨風玉樹)같았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군계일학의 느낌을 주었다. "고수부"중에서 하언은 '고'와 '수'를 갖추었다. 동시에 하언은 재주가 있었다. '고재수'라고 할 만하다. 그는 청사를 아주 잘 썼다. 목소리도 맑고 높아서, 매번 궁에 들어가 강학을 할 때면 황제도 그를 주시했다. "그를 크게 쓰고 싶어했다(欲大用之)" 과연 하언은 가정15년 입각을 하고, 2년후에는 수보(首輔)에 오른다. 엄숭을 멀찌감치 제낀 것이다.

 

그러나, 엄숭의 음한한 얼굴은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가 예부상서직을 넘겨받은 후, 하언은 그를 마음대로 부렸고, 은혜를 베풀었다는 신분으로 그를 대했다. 엄숭은 그제서야 하언에게 보복을 시작한다. 다만 엄숭의 보복은 심장불로(深藏不露)했다. 그는 심지어 유미한 모습으로 하언의 오만을 대했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마비시켰다. 엄숭이 있는 예부가 내각에 글을 올릴 때면, 그가 친히 초안한 원고가 하언에 의하여 엉망진창으로 고쳐지곤 했다. 심지어 하언은 원고를 엄숭에게 되돌려보내어 다시 쓰게 하기도 했다. 엄숭은 매번 웃는 얼굴로 이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엄숭은 하언과 관계를 잘 맺었다. 자주 집안에서 연회를 열어 그를 초청하곤 했다. 하언은 아예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그를 냉대하였다.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엄숭은 여전히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다만 구밀복검이라는 말이 들어맞는다. 엄숭은 일단 하언의 약점을 잡자, 전혀 망설이지 않고 손을 썼다. 하언은 사람됨이 오만하여, 가마를 타고 서원 재궁(齋宮)을 출입했고, 황제가 특별히 각신에게 하사한 도가향엽관(道家香葉冠)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이것은 "신하가 입어야할 옷이 아니어서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언이 청사를 쓰는 일에 더 이상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자주 옛날에 썼던 것을 다시 써내곤 했다는 것이다. 가정제도 점점 그를 소홀히 대하게 된다. 엄숭은 이 기회를 잡았다. 그는 매번 청사를 쓸 때마다, 온갖 머리를 짜내어 황제가 놀랄만한 글이 될 때까지 퇴고했다. 동시에 매번 서원에 갈 때 반드시 공손하게 도가향엽관의 업그레이드버전을 썼다. 그것은 관 위에 얇은 비단을 두른 것으로 보기에 몽롱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가정21년, 명나라의 하늘에 일식이 나타난다. 황제는 죄기조(罪己詔)를 내린다. 엄숭은 이 기회를 틈타 조용히 진언한다. 죄를 받아야할 사람은 황상이 아니라 수보 하언이라고. 바로 하언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하늘이 이렇게 경고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가정제는 하언을 삭탈관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게 한다. 2년후, 엄숭은 원하던 수보의 자리에 오르고, 태자태부의 직위를 추가로 받는다.

 

한편으로는 하언의 면직, 한편으로는 엄숭의 승진. 엄숭의 구밀복검이 그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다만 세상사는 항상 파란이 있는 법이다. 가정24년말, 하언이 재출도하여 수보의 자리에 앉는다. 엄숭은 차보(次輔)로 내려간다. 황제의 마음은 알기 어렵다. 엄숭의 관료생활은 졸지에 위기를 맞이한다. 이것은 재출도후의 하언이 예전처럼 그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을 의미할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엄숭의 아들인 엄세번의 약점을 하언에게 잡혀버린 것이다.

 

엄숭이 수보로 있을 때, 엄세번이 재물과 부세를 관리하는 상보사소경으로 있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뇌물과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하언은 이 약점을 잡고는 황제에게 고발하는 글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엄숭을 쫓아내고자 한다. 엄숭은 위기대책을 마련한다. 그는 몸을 낮추어, 친히 아들을 데리고 하언의 집으로 가서 자신을 한번만 구해달라고 간청하러 간다. 하언도 노련했다.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사실상 이 두 사람의 다툼은 이제 하언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만일 그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직접 이 일을 황제에게 말할 수 있었다. 엄숭은 아마도 더 이상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엄숭은 사람의 마음을 잘 다루었다. 그는 하언이 독하지 않다는 성격상의 약점을 잡아, 먼저 하언이 집안사람에게 뇌물을 바치고, 집으로 들어간 후 직접 하언의 앞으로 달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가련한 모습과 뉘우치는 모습 그리고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는 모습을 보여, 하언의 마음이 약해지게 만든다.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이렇게 하여 엄숭의 위기대응책은 성공을 거둔다.

 

만일 우리가 엄숭의 이번 위기대응책을 나중에 하언을 모함하여 그를 사지에 몰아넣은 일을 고려하여 살펴본다면, 엄숭의 엄한한 얼굴이 완벽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가정25년, 섬서삼변총독 증선이 하투를 수복하는 일을 논의한다. 하언은 극력 지지한다. 증선은 이전에 여러번 병력을 이끌고 하투의 몽골부락을 침입했다. 그가 전체 하투지구를 수복하려는 뜻은 공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하언에게는 2차입각하면서 자신의 공을 세워 체면을 높이려는 생각도 있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사심이 없는 정치적 의제였다. 그러나 엄숭이 보기에는 하언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엄숭은 고심을 다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회유했다. 황제의 곁에 있는 환관들에게는 공손하게 대하고, 자주 황제의 곁에 있는 어린 환관들에게도 호의를 베풀었다. 웃는 얼굴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하여 환관들은 자주 황제의 앞에서 엄숭을 좋게 말해준다. 하투를 수복하는 문제에서 황제가 왔다갔다하고, 최종적으로 엄숭의 뜻에 따라가게 된 것은 실로 곁에 있는 환관들이 자주 그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해준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하나이다.

 

둘은 엄숭이 기회를 잡고, 기회를 만드는데 능숙했다는 것이다. 황제로 하여금 의심이 커지게 만들었다. 하언이 하투수복을 건의할 때, 가정제는 당초에 동의했다. 그러나 얼마 지난 후, 몽골부락이 병력을 일으켜 연안부 영하진을 공격한다. 엄숭은 즉시 기회를 잡아, 언관으로 하여금 증선이 가볍게 변방에서 사단을 일으켜 심각한 결과를 초래시킨 것을 공격하게 한다. 이때 섬서 징성산이 무너진다. 가정제는 이를 하늘의 계시로 생각하고, 하투를 수복하려는 생각을 거둔다.

 

셋은 정치적으로 증선과 하언을 타도하였다. 엄숭은 군법을 위반하여 증선에 의하여 탄핵받은 바 있는 변방장수를 교사하여 증선이 패배한 사실을 감추려고 했고 군량미를 빼돌리고, 하언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무고하게 한다. 그리고 금의위도독을 교사하여 증선이 보신(輔臣)에게 뇌물을 바치고, 근시들과 가까이 교분을 맺었다는 죄명을 씌우게 한다. 증선은 피살된다. 증선의 죽음은 하언의 세력이 약화되는 마지막 복선이었다.

 

"지금 하투의 적을 몰아내는 것이 병력을 일으키는 명분이 있는가? 병사들이 먹을 것은 충분한가? 성공할 수 있는가?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지 않는가?" 조당에서 황제는 백관들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일련의 의문문은 분명히 하언을 향한 것이다. 하언은 즉시 나서서 변명한다. 그리고, 엄숭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엄숭은 내각에서 지금까지 저와 의견이 같았습니다. 지금 그는 모든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엄숭은 이퇴위진(以退爲進)의 수법으로 말한다: "하투를 수복하는 논의는 실로 공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때문이고, 억지로 병력일으켜 싸우려는 것이니, 하늘이 노하였습니다. 신이 감히 하언에 반대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였으니, 황상께서는 먼저 저의 실직을 처벌해주십시오." 만일 관료정치학의 배경하에서 두 사람의 대답을 본다면, 고하는 분명하다. 게다가 엄숭은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회유해서 잡아놓았다. 황제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명약관화했다. 그후, 하언은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서시에서 참형에 처해진다. 당시 나이 66세였다.

 

그후, 엄숭은 다시 수보의 지위를 굳건하게 지킨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온화한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겉모습의 아래에는 엄숭의 음한한 얼굴이 은은히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엄숭은 변신을 잘했다. 위기가 사방에 깔린 관료사회에서 불변으로 만변에 대응하는 것같은 언제나 쓸 수 있는 대책은 없다. 변신을 잘하는 자가 생존한다. 그러나 변신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세상의 논리는 생사가 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엄숭이 권력의 최고봉에 서 있다는 것은 이제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상(沮喪)

 

엄숭의 마지막 얼굴은 '저상'이다. '저상'은 그가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서계(徐階)이다.

 

엄숭의 관료이력서에서, 가정23년 구월 수보가 된 후 가정 40년까지 그의 관료사회의 곡선은 위를 향했다. 가정27년이전에 엄숭에게 올라간 것은 관직이다. 가정27년이후 엄숭에게 이미 더 이상 오를 관직은 없었다. 그저 대우에서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가 받는 것은 급여만이 아니라 황제의 그에 대한 은총이었다.

 

기실 가정41년 엄숭에게 일이 터지기 전에, 그에 관련한 각종 탄핵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들 탄핵은 모조리 실패로 끝난다. 탄핵자는 삭탈관직당하거나 유배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처지는 황제가 엄숭을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관직은 평안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배경하에서 서계의 엄숭과의 암전(暗戰)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확실히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같은 게임이다. 엄숭은 서계의 계책에 당해서 패배한다. 그의 마지막 얼굴은 저상이다. 마치 사람들에게 네 글자를 말해주는 것같다: 인과윤회(因果輪廻)

 

서계는 엄숭보다 23살이 어렸다. 그들 두 사람은 확실히 세대가 다르다. 관료사회의 출발점에서, 서계는 당연히 많이 뒤처져 있었다. 그가 관직에 나선 것은 엄숭보다 꼬박 18년이 늦었다. 가정31년, 서계는 예부상서 겸 문연각대학사로 기무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전에 엄숭은 이미 8년간이나 내각수보로 있었다. 그는 경력이 가장 많은 재상이었다. 서계가 이같은 비교하에서 엄숭에 도전했다면 그것은 아주 멍청하고 천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엄숭은 손을 썼다. 엄숭은 비가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서계가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서계가 관료사회에 들어온 것은 마치 엄숭의 복제판같다. 청사를 잘 써서 황제의 인정을 받는다. 예부에 임직할 때 다른 각신과 함께 서원으로 불려가서 황제를 위하여 청사를 쓴다. 그리고 비어복을 하사받는다는 등등. 은연중에 이미 그는 잘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엄숭이 서계를 경계한 것은 단지 이것때문만은 아니다. 또 하나 그가 아주 꺼렸던 원인은 서계가 관직에 들어온 것은 바로 하언의 추천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하언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엄숭은 모든 방법을 다하여 서계의 직위가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예를 들어 가정30년 이월, 엄숭은 황제에게 몰래 밀고한다. 서계는 재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충성스럽지 못하다.

 

다만, 서계는 노련했다. 그는 하언처럼 오만하고 요란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꼬리를 감추고 도광양회하며 발전을 도모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두 가지를 확실히 처리했다. 한 손으로는 엄숭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황제를 잡았다. 엄숭을 조심스럽게 잘 모시고, 황제가 좋아하는 도교행사의 청사를 열심히 썼다. 이렇게 양쪽에 끼어서 생존했고, 성장했다.

 

세상사는 하나가 내려가면 하나가 올라간다. 한편으로 서계가 성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엄숭은 노쇠해진다. 가정40년, 엄숭은 81세가 된다. 내각수보로서, 많은 정무는 이미 아들 엄세번이 대신 처리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엄숭이 여러번 황제가 물어보는데 대답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그가 올린 청사는 다른 사람이 대신 써서 그다지 정교하지 못했다." 황제는 점점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중대한 실수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엄숭은 아마도 관직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해 십일월, 엄숭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가 정치적인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정제가 거주하던 서원 영수궁에 실화로 불이 났는데, 엄숭은 그에게 남성이궁으로 옮겨서 거주하도록 권했다. 남궁(南宮)은 일찌기 영종제가 야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국한 후 유금되었던 곳이다. 황제는 엄숭의 이 건의를 자신을 유폐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서계는 이 일에서 황제의 뜻을 더욱 잘 헤아렸다. 그는 황제에게 영수궁을 중건하자고 건의한다. 그리고 당시 다른 전각을 지으며 남은 재료를 가지고 재건하면 국고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는 아주 기뻐한다. 그리고 서계의 아들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한다. 백잏후, 영수궁이 재건되고, 서계는 소사의 관직을 추가로 받는다. 이제는 엄숭과 거의 대등한 정치적 예우를 받게 된 것이다.

 

엄숭의 마지막 패배는 이 일 때문이 아니었다. 가정41년 오월, 어사 추응룡이 서계의 암중지시를 받고 <탐횡음신기군두국소>를 올려, 엄숭부자가 권력을 농단하고 부정부패하며 많은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음을 탄핵한다. 이러한 탄핵이 만일 가정40년이전에 이루어졌다면, 추응룡에게는 흉다길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총애를 잃고 있었으므로 추응룡의 탄핵이 시의적절했다. 황제는 바로 성지를 내려 엄숭이 엄세번을 방종하여 국은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엄세번은 하옥시킨다.

 

기실 엄숭이 마지막으로 당하기 전에 다시 한번 자신의 몸을 낮추어 '유미'의 수단을 써서 서계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 그는 집안에 주연을 열면서 자손과 집안사람들에게 서계의 앞에 꿇어앉게 한 후, 자신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엄숭은 곧 죽을 것이다. 이들은 공만이 먹여살릴 수 있다." 그의 저상한 표정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엄숭의 쇠퇴는 이미 분명했다.

 

가정44년, 엄숭은 삭탈관직되고, 아들 엄세번은 참형에 처해진다. 가산은 몰수된다. 가정46년, 엄숭이 병사하니 향년 87세이다. 엄숭은 비록 장수하였지만, 선종하지는 못했다. 죽기전에 그는 묘사(墓舍)에서 기식했고, 죽고나서도 관을 갖출 수 없었고, 조문하는 사람도 없었다. 엄숭의 인생은 청순에서 시작하여 저상으로 끝나기까지 마치 하나의 윤회를 거친 것같다. 번화함이 끝나고, 영광이 끝나고 마지막 결말은 처량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