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희종: 위충현과 객씨(客氏)

중은우시 2013. 4. 27. 00:45

글: 우좌(于左) 

 

명나라때인 천계6년 오춸초엿새 오전,  북경서에서는 돌연 거대한 폭음이 들렸다. 졸지에 하늘과 땅이 어두워진다. 강한 공기충격이 밀려왔다. 무거운 석사자도 성밖으로 날아가고, 길가던 행인들의 옷도 순식간에 벗겨져서 서산의 나무에 걸렸다. 날아간 은전, 기물등은 멀리 창평까지 갔다.

 

이번 폭발의 중심은 왕공창(王恭廠)이었다. 왕공창은 안민창(安民廠)이라고도 하는데, 총포, 화약의 제조를 담당하던 곳이다. 폭발후 왕공창 부근 일대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왕공창의 폭발로 건물1만여칸이 무너지고, 사망한 자는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폭발이 발생할 때 명희종은 건청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공기충격이 올 때 건청궁안의 어안이 부서지고, 명희종은 급히 몸을 일으켜 건극전으로 도망쳤다. 곁에서 시중들던 이들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고 도망친 사람도 있었다. 한 명의 근시가 명희종을 부축하여 미친듯이 달려갔다. 폭발은 연이어 일어났도, 건극전위의 기왓장이 사방으로 튀었다. 명희종의 곁을 지키던 근시도 이에 맞아 죽는다.

 

이 의외의 사건에 명희종은 크게 놀랐고, 재난이 지나간 후 명희종은 몸이 좋지 않음을 느낀다. 다음해 6,7월에는 명희종의 병이 위중해지고, 계속 병석에 누워있게 된다. 황제가 병이 드니 가장 초조해진 사람은 그의 곁에 있는 대태감 위충현과 유모 객씨였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때 북경의 동안문 밖에는 예의방(禮儀房)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자부(奶子府)"라고 불렀다. 사례감 태감과 금의위가 책임을 지고 궁중의 유모를 모집하는 곳이었다. 선발범위는 북경부근 각 현의 군인 민간의 집안이고, 선발조건은 기혼여자로 나이는 15살에서 20살까지이며, 용모가 단정하고 이미 자식을 둘 낳았고, 3개월내에 세번째 자식을 낳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가 모두 건강해야 했다.

 

기본조건에 부합하는 여자들은 신체검사를 거쳐 건강하고 병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북경으로 데려온다. 내관들이 상의한 후 최종적으로 40명을 선발하여, 내자부에 남긴다. 광록시에서 돈과 물건을 제공하는데, 기준은 1인당 매일 4근의 고시, 8홉의 쌀이고 나머지 필요한 물건은 지방에서 보내왔다.

 

내자부에 있는 여자들은 "내구(奶口)"라고 불렀고, "내파(奶婆)"라고도 불렀다. 일반적으로 40명이 내자부에 거주하는 것을 "좌계내구(坐季奶口)"라고 불렀다. 또 다른 80명은 단지 관부에 이름만 남겨서 예비인원인데, 이들은 "점묘내구(點卯奶口)"라고 불렀다.

 

매 분기가 끝날 때면 내구는 교체되고, 새로 선발한다. 일단 궁중에 황자, 황녀가 출생하면, 좌계내구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뽑아서 궁으로 보내어 유모가 된다. 선발된 내구는 새로운 옷을 입고, 머리를 올리며, 복식과 화장을 궁녀와 같이 한다. 한 내구가 궁중에 머물며 젖을 먹일 수 있게 되면 통상 몇년을 있게 되니, 이것은 영광일 뿐아니라, 얻는 것도 많았다.

 

객씨는 바로 이런 '좌계내구'였다. 그녀는 정흥현 사람으로 남편은 후이(侯二)이다. 나중에 객씨는 운좋게 궁중으로 뽑혀 들어가고, 그녀가 젖을 먹인 대상은 신종황제의 장손이자, 황태자 주상락의 장남이며, 나중의 명희종이 되는 아이었다.

 

위충현은 숙녕 사람이고 입궁하기 전에 이미 결혼하여 처가 있었다. 그리고 딸도 하나 두었다. 위충현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고빈호색(孤貧好色), 도박능음(賭博能飮), 담희소희(啖嬉笑喜), 선의치마(鮮衣馳馬)"했다. 그는 도박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빚이 많았다. 위충현은 노하여 스스로 자궁(自宮)하고, 이름을 이진충(李進忠)으로 개명한 후 황궁으로 가서 태감이 된다.

 

처음에 위충현은 포필, 안료를 저장하는 갑자고(甲字庫)에서 일했다. 만력33년, 명희종이 출생하며, 그의 모친인 왕재인의 곁에는 식사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근시 위조(魏朝)는 위충현을 추천한다. 그리하여 위충현은 왕재인 모자의 음식과 생활을 돌보아주게 된다. 위충현은 이로 인하여 명희종의 유모인 객씨와 알게 된다.

 

이전에, 객씨는 위조와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다. 피차간에 소위 "대식자(對食者)"였다. 명나라궁정의 관례에 따르면, 태강과 궁녀는 짝을 이루어 '부부'가 되었다. 태감은 궁녀를 위하여 밖에서 필요한 여러가지 물건을 사주고, 궁녀는 태감을 위하여 세탁, 침선등의 잡일을 해주며 서로 도와서 민간의 부부와 같이 생활했다.

 

객씨의 관계로 한동안 위충현과 위조는 아주 친밀했고, 두 사람은 결의형제가 된다. 위충현의 나이가 많아서, 사람들은 '대위(大魏)'로 부르고, 위조는 나이가 적어서 '이위(二魏)'로 불린다.

 

위충현은 사람들에게 돈후하고 신뢰감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경박한 위조와 비교하면, 더더욱 객씨가 좋아할 만했다. 시간이 흐르자 객씨는 점차 자신의 대식자인 위조를 멀리하고, 위충현과의 관계가 갈수록 친밀해진다. 일혈양교(一穴兩蛟). 한 동굴에 두 용이 있게 되니 두 사람간의 투쟁은 피할 수가 없었다.

 

희종황제가 즉위한 후, 글을 모르는 위충현은 사례병필태감으로 발탁되고, 석신사인(惜薪司印)도 관장한다. 위조는 건청궁의 관사로 병장국(兵仗局)을 관장한다. 형제 두 사람은 황제와 객씨의 앞에서 총애를 다투고 마침내 서로 반목한다. 대태감 왕안(王安)은 앞으로 걸어나가 위조의 뺨을 강하게 때리며 그에게 병을 이유로 물러나도록 한다. 왕안의 이 뺨 한대는 이렇게 선언한 것이다: 두 위씨간의 투쟁에서 위조가 패배했다. 위조는 이때부터 세력을 잃고, 나중에는 위충현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제 젊은 희종황제가 병이 들었다.위충현과 객씨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위총현은 창고로 뛰어가소 대향의 붉은 천에 황금색 수(壽)자를 놓은 것을 찾아서, 명희종 곁의 근시들이 모두 그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황상이 하루빨리 회복하기를 기원했다.

 

위충현의 심복이자, 병부상서인 곽유화(霍維華)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지만 선방(仙方)을 구해온다. 이름은 '영로음(靈露飮)'이었다. 그리고 세트로된 복잡한 기기가 필요했다. 위충현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시키는대로 만들게 했다. 황금,백은으로 만든 증구(蒸具)에 정미(精米)를 넣고, 영로음을 만들었다.

 

영로음이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왜냐하면 위충현, 곽유화등의 아이디어였으므로, 어의가 감히 나서서 이를 말릴 수도 없었다. 영로음을 복용한 처음 며칠간은 명희종이 맛이 달고 좋다고 느꼈다. 그러나 금방 질려버린다. 물기가 너무 많다고 여겨서 그는 영로음을 신변의 태감들에게 주어서 먹게 한다. 병도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어의방은 영로음을 중단시킨다.

 

그후 명희종이 몸에는 수종(水腫)이 나타나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위충현은 이로 인하여 곽유화에 불만을 가진다. 곽유화도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팔월, 명희종이 건청궁에서 붕어한다. 나이 겨우 스물셋이었다. 자식을 두지 못했으므로, 유조에서는 자신의 다섯째 동생인 신왕(信王) 주유검(朱由檢)에게 황위를 잇도록 하니, 그가 바로 숭정황제이다.

 

숭정제의 즉위로 위충현과 객씨의 지위는 일락천장한다. 객씨는 숭정제에게 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숭정제는 이를 허가한다. 구월 초사흘, 오경때 궁문이 열리고 객씨는 허름한 옷을 입고 인지전에 놓인 명희종의 영구앞으로 걸어가서 황금색 짐을 연다. 짐안에는 작은 갑(匣)이 있었다. 명희종의 태발(胎髮), 창가(瘡痂) 및 어렸을 때 뽑은 이빨이 있고, 깍아낸 손톱, 잘라낸 머리카락도 있었다. 지금 객씨는 애절하게 곡을 하며, 이것을 모두 영전에서 불태워버린다.

 

두달 후, 객씨는 완의국(浣衣局)에서 곤장을 맞아 죽고 가산은 몰수된다. 아들 후국흥(侯國興)은 죽임을 당한다. 이 기간동안 위충현도 병을 핑계로 물러난다. 십이월 그는 봉양(鳳陽)으로 보내어져 안치된다. 십이월 초엿새, 위충현등은 부성현 남관으로 걸어가서 조용한 깊은 밤에 위충현과 그의 심복인 이조흠(李朝欽)은 여점(旅店)에서 목매어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