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이탁오(李卓吾): 여제자를 받아들인 명나라의 대학자

중은우시 2013. 2. 4. 20:26

 

글: 유려평(劉黎平) 

 

 

 

16세기말, 명성이 자자한 문화명인이자 최고급 교수인 탁오 이지(李贄)는 호북 마성 용담호지불원에서 학문을 강의했다. 그 시대의 의식으로 보자면 이지 교수의 말은 상식을 넘어섰고, 그의 행동도 상식을 넘어섰다. 자신의 학원에 여학생을 받아들였다. 이름을 남긴 사람만도 매담연(梅澹然), 비구니인 자신(自信), 명인(明因) 및 선인(善因)등이 있다. 그녀들에게 강의를 와서 듣게 했을 뿐아니라, 그녀들과 서신왕래를 통하여 학문을 연마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여성을 차별하던 봉건시대에 큰 풍파를 불러일으킨다. 봉건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자들은 이를 격렬히 비난했고, 그의 행실을 공격한다: "선음패속(宣淫敗俗, 음란함을 퍼트리고 풍속을 망친다)". 그리고 그의 여학생들의 지능을 공격한다: "부녀는 견식이 짧아서 학문의 도를 익힐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이탁오는 명나라 만력21년(1593년) 이런 소문과 공격에 대하여  반박을 한다. 그가 쓴 서신을 간략히 살펴보자.

 

이 서신의 이름은 <답이여인학도위견단서(答以女人學道爲見短書)>(여인이 도를 배우기에 견식이 빫다는것에 답하는 글)로 이탁오의 문집 <분서(焚書)> 제2권에 수록되어 있다.

 

서신의 첫머리에 이탁오는 봉건사회에서 여자들이 확실히 공간적으로 열세에 처해있음을 인정한다. "여주내, 남주외(女主內, 男主外)"(여자는 집안일을 하고 남자는 집밖일을 한다). 객관적인 조건의 제한으로 여성들은 수천년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야 했다. 그 시대에 화목란과 같은 여인은 극소수이다. 남자들은 활과 화살을 들고 사방으로 싸우러 다녔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여자들이 보는 공간은 확실히 남자들보다 협소하다. 이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나서 이탁오는 붓끝을 돌려 분석하기 시작한다: 생활공간이 좁다고 하여 견식이 짧다는 것은 아니다. 소위 견식이 짧다는 것은 집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집안일만을 보고, 외부의 일은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소위 견식이 길다는 것은 멀리 간다는 것이 아니라 많이 본다는 뜻이다.

 

이탁오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하루종일 집안에 있다고 하여 견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루종일 바깥을 돌아다닌다고 하여 견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견식이 길고 짧고는 접촉한 생활공간의 크기와는 그다지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이어서, 무엇이 단견이고 원견인지를 설명한다. 물리적인 공간으로 견식의 장단을 구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확히 한 후에 이탁오는 시간과 취향(取向)으로 견식의 장단을 구분해야한다고 말한다. 견식이 짧은 사람은 눈으로 그저 백년이내를 볼 수 있거나, 그저 자신의 자손만을 보거나 심지어 그저 자신만을 본다. "단견자는 백년이내를 볼 수 있을 뿐이고, 가까이는 자손 더욱 가까이는 일신일 뿐이다."

 

원견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심지어 생사, 이해관계의 제한을 벗어난다. 이뿐만 아니라, 원견이 있는 사람의 눈은 세분화할 수 있다. 사물의 각 방면을 볼 수 있고, 가장 자잘한 측면까지 볼 수 있다.

 

이 말을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기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사람이 거시적인 안목과 미시적인 안목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취향으로 보자면, 견식이 짧은 사람은 "길거리의 이야기나 시장아이들의 말"을 듣기 좋아한다. 견식이 긴 사람은그런 사소한 일들은 보잘 것없다고 여기고, 시정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탁오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남녀의 구분은 있지만, 견식의 장단에 남녀의 구분은 없다. 견식에 장단의 구분은 있지만 이것을 남녀에 가져다 붙일 수는 없다. 남자의 견식이 반드시 길고, 여자의 견식이 반드시 짧다고 한다면 그것은 황당한 말이다.

 

이탁오는 나아가 이렇게 조롱한다: 현재 어떤 여자는 비록 성별에서 차별을 받고 있지만, 그녀들의 견식은 당금의 남자에 못지 않다. 부끄러움에 땀이 나고 감히 말을 못할 정도이다. 이런 여자는 옛날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등을 들고 찾아다녀도 찾지 못했던 좋은 인재들이다. 대명왕조의 여성인재를 이렇게 대우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기실 억울하든 아니든 여자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끄러워하고 못난 모습을 보인 사람은 바로 편견을 지닌 남자들이다. 이탁오는 남자들이 차별하든 말든 여자들의 뛰어난 지혜와 안목은 그대로이고,  남자들이 차별한다고 하여 조금도 그것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상고시대에 여성은 천하인의 모범이었다.

 

사실이 웅변보다 뛰어나다. 이탁오는 비록 16세기의 사람이지만 이 이치를 잘 알았다.그래서 그는 예를 든다.

 

당시 주무왕의 수하에 아주 재능있는 인재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여성이다 왕후(王后) 읍강(邑姜) 이를 보면 기원전11세기에 여성은 이미 공개적으로 경영에 뛰어들었다. 읍강이 누구인가? 항간에서는 그를 전설적인 인물인 강태공의 딸이라고 알려져 왔다. 만일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산서 태원의 진사로 가보라. 그 안에 "성모전(聖母殿)"이 있는데, 바로 그녀를 모시는 곳이다. 물론 그것은 송나라때 만든 조각상이다.

 

더 이른 시기를 보면 주문왕의 처가 있다. 문모(文母). 이 여성은 민속문화에 정통했고, 삼천년간 유행하는 <시경>은 바로 그녀가 정리가공한 것이다. 그녀는 산의생등과 함께 당시 걸출한 "사우(四友)"로 꼽혔다.

 

상고시대에 걸출한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탁오는 봉건제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만일 너희들의 안목으로 본다면 우리의 위대한 조상인 문모와 읍강은 견식이 짧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내가 지금 여학생들을 받았는데, 너희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며 나를 이단으로 몰고 있는데, 그것은 너희가 속견에 구애받기 때문이고 여성을 차별하는 시정잡배들의 기호를 가졌기 때문이다.

 

너희는 시정잡배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니 너희는 바로 시정잡배이다. 무엇이 원견인가. 무엇이 단견인가. 너희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집안에 만일 읍강 문모와 같은 총명한 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너희처럼 안목이 없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너희의 인품으로는 너희들에게 내가 해석하기 아주 어렵다.

 

이탁오 선생은 다시 사람들이 누구나 아는 당나라의 여재자 설도(薛濤)를 언급한다. 원래 장안에서 태어났지만 사천에서 자란 설도여사는 시로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당시의 시가계의 대가인 원진(元稹)도 그녀의 명성을 알았다.

 

원진에 대하여 다시 소개해보다. 그는 보통 시인이 아니다. 그는 백거이와 함께 당나라 시단에 새로운 기풍을 몰고 온다.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 그의 명성은 이때부터 백거이와 나란히 하여, "원백(元白)"으로 불린다. 이탁오는 그를 "정원걸장야(貞元傑匠也)"(정원은 당나라의 연호)라고 하였다. 이런 큰 인물은 쉽게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진과 같은 큰 인물도 설도의 재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보고서를 써서 사천으로 부임한다. 사천에 도착한 후 설도는 <사우찬(四友贊)>을 써서 그에게 보내고, 원진은 감탄을 한다.

 

이탁오는 이런 여성이라면 우리가 탄복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를 공격하는 위도사(衛道士)들은 시정잡배의 속견에 머물고 있다고 본다. 이런 품위, 이런 안목은 실로 이탁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탁오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여권이 아직 주요이슈가 아닐 때 이런 이슈를 제기했다. 그가 제기한 이슈는 그 시대의 사상에 또 하나의 휘황을 더한다. 그의 여권사상은 그 시대의 사상이 진보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포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사상은 수백년의 시간을 거쳐 천천히 소화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초시대적인 것이다.

 

이탁오는 16세기에 후대의 여성들이 모두 따뜻하게 여길 글을 남겼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명왕조는 왕양명(王陽明)을 탄생시킨 시대이다. 당백호(唐伯虎)를 탄생시킨 시대이고, 이어(李漁)를 탄생시킨 시대이다. 상업은 번영했고, 개체의식이 각성되고, 사상이 승화되었다. 부녀해방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명은 바로 이탁오에게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