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

웨이챠오(魏橋): 산동의 신비한 기업제국

중은우시 2013. 7. 12. 22:17

글: 영재(英才) 

 

산동성 저우핑현(鄒平縣) 웨이챠오진(魏橋鎭)은 다시 무더운 황혼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동차와 전동차의 경적소리가 도로에 가득하고, 파란색 제복을 입고, 노란색 헬멧을 쓴 발전소노동자들이 차량이 흐름 속에 끼어 있다. 경적소리, 호객하는 소리, 아이의 울음소리가 공기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주간도로를 따라서 마을의 서쪽 끝으로 가면, 길가에 석탄먼지가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하고, 도로는 검은색으로 뒤덮인다. 수시로 석탄을 운송하는 푸텐(福田) 대형트럭이 포효하며 도로를 짓이긴다. 멀지 않은 곳에, 수십미터 높이의 석탄더미와 어두운 하늘로 치솟은 냉각탑이 눈에 들어온다. 3개의 열병합발전소는 도로남쪽에 서쪽을 향하여 차례로 펼처져 있다. 발전소의 동쪽 멀지 않은 곳에는 노동자의 숙사, 영화관, 사무실, 유아원, 진료소가 연이어 지어져 있어 독특한 기업소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웨이챠오창업집단("웨이챠오")의 보통공장구역이다. 또한 그 동사장 장스핑(張士平)이 경영하는 신비제국속에서 하나의 작은 구역이기도 하다. 그의 전체집단은 14개 기업, 16만 직원, 7개 생산기지, 10개의 공업원, 10여개의 대형방직공장, 10개의 발전소 및 8개의 알루미늄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총자산이 937억위안(16.8조원)에 이르고, 2011년에는 1,615억위안의 영업수익으로 포브스세계 500대기업에 들어갔다. 이와 더불어 장씨가족은 수백억위안의 부로 각종 부호랭킹에 올랐고, "산동최고부자"가 되었다.

 

웨이챠오의 거대함과 가족의 부는 원래 외부에서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다. 2012년이 되어, "웨이챠오가 자체건설한 전력망의 전기가격이 국가전망보다 1/3이 싸다"는 소식이 여론을 촉발시켰다. 비판봐 찬탄이 동시에 원래 조용히 지내던 이 기업을 둘러쌌다. 수십개의 매체가 웨이챠오진으로 몰려들었고, 이때부터 웨이챠오집단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웨이챠오는 여전히 신비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 20여년의 발전을 거쳐, 지방경제와 긴밀히 융합하고, 지방정부와 서로 지지하며, 낯선 외부인에 대하여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웨이챠오진의 공장지대의 상황과 비슷하게, 본사인 저우핑현의 20여평방킬로미터의 웨이챠오공업원구안에는 공장지구, 숙사, 심지어 문화광장등 크고 작은 문에는 최소한 2명의 보안이 지키고 있다. 본사대문은 심지어 8명의 보안이 지키고 있었다. 설사 50여미터 떨어진 곳인데도, 보안은 달려와서 손에 카메라를 들고 사진찍는 사람앞에 나타나서, 소리지른다: "다시 찍으면 몰수하겠습니다. 화초를 찍는 것도 안됩니다. 이것은 규정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제국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외부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점은 웨이챠오가 경영하는 방직업, 화력발전, 알루미늄은 모두 불경기업종이라는 것이다. 방직업은 연속 5년간 업계가 결손을 내고 있고, 화력발전은 연속 10년간 결손을 내는 업종이며, 알루미늄은 연숙 6년간 결손을 내는 업종이다. 웨이챠오가 이렇게 부진한 산업을 운영하면서, 가족의 부를 폭증시켰다? 수건을 팔던 소규모 공장이 어떻게 25년만에 세계 500대기업에 오를 수 있었을까? 창업자인 장스핑은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는 것일까?

 

기자는 베이징에서 장스핑을 인터뷰하고, 곧이어 산동 빈저우시, 저우핑현, 웨이챠오진등지에서 웨이챠오의 부의 궤적을 추적했다. 중국민영기업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변신한 유전자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빈저우와 저우핑 등지에서 웨이챠오의 영향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저우핑의 택시기사도 바로 '장총재'의 이야기를 꺼낸다.

 

은퇴한 정부공무원출신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우핑현은 매년 경제공작회의를 개최하는데, 첫번째 발언하는 기업가는 반드시 장스핑이다. "더 말할 것도 없다. 장총재은 아주 담담하게 올해에도 수십억위안의 세금을 냈다고 말한다. 우리같이 회의장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란다. 그것은 우리 현 세수의 절반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스핑의 사업은 갈수록 커졌다. 웨이챠오의 지방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갈수록 두드러졌다. 지방정부의 그에 대한 지지는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된 것이다.

 

웨이챠오가 국유기업인 빈저우일면(濱州一棉)을 합병한 후, 시정부는 우대정책을 취한다: 토지는 모조리 무상이고, 3년동안 세수는 반환한다. 저우핑에서 정부는 웨이챠오가 필요로 하는 토지를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범위내에서 최대한 지원해준다.

 

집값이 높고, 민공은 부족하다. 인재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웨이챠오는 여러해전부터 스스로 직원주택을 건설했다. 웨이챠오는 이렇게 규정했다. 5년만 일을 하고, 직원이 결혼하면 천위안의 원가로 회사에서 제공한 주택을 구매할 수 있다고, 다만 직원은 이후 외부인에게 매각할 수 없고, 그저 구매원가로 되팔아야 한다.

 

기자가 저우핑에서 조사연구할 때 발견한 바에 따르면, 도시지구인 후이센일로의 남쪽, 웨허오로 남쪽의 동측, 휘이센이로이 북측, 웨허삼로의 동측에 모두 웨이챠오 중고층간부에게 젝오한 신식 주택이 있었다.

 

웨이챠오의 발전은 장스핑이 지방과 업계에서 명성을 얻게 만들었다. "아주면왕"이라는 칭호도 빛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은 부의 수량으로 계산한다면 2011년이전에 장씨가족의 부는 단지 10억위안가량이었다. 이것은 웨이챠오의 거대한 규모와 부합하지않았다.

 

비록 웨이챠오 산하의 핵심자회사인 웨이챠오방직이 2003년 9월 홍콩에 성공적으로 상장했지만 장스핑가족의 지분비율은 32.4%이다. 단 웨이챠오방직의 상장은 장씨가족의 부를 질적으로 도약시키지 못했다. 만일 웨이챠오방직의 2011년 12월 31일자 종가로 계산한다면 이 부분의 지분가치는 12억위안이다.

 

다만 2011년 3월 24일, 즉 중국홍챠오(宏橋)집단유한공사가 홍콩연합거래소에 상장된 후 장씨가족으 부는 백억단위로 계산하게 된다.

 

2006년-2010년까지 장스핑은 모두 91.6만톤의 알루미늄생산설비를 구매하거나 자체건설한다. 2010년 12월 31일, 중국홍챠오의 총자산은 133억위안에 달한다. 2010년, 상장이 가까워지면서,중국홍챠오는 엄청난 수입과 이익증가추세를 보인다. 그해 총수입과 이윤은 각각 151.3억위안과 41.9억위안에 달한다.

 

마침내 장스핑이 수년동안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2011년 3월 24일, 중국홍챠오는 홍콩연합거래소에 상장한다. 장중 주당 최고가격은 8.09홍콩달러에 달하고, 최종적으로 7.9홍콩달러의 종가로 끝난다. 장스핑 및 그 부인 정수량(鄭淑良)이 공동으로 84.96%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중국홍챠오가 장스핑가족에 그날 가져다 준 것은 400억홍콩달러라는 놀라 부였다. 그리하여, 중국홍챠오의 상장은 장씨가족의 부를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하는 '분수령'이 된다. 하룻밤만에 산동최고부자에 등극한 것이다.

 

비록 오랫동안 실업에 매진해온 장스핑이 왜 갑자기 상장에 신경을 쓰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장스핑은 상장성공후에도 평상시에 주가에 관심을 둘 수가 없다고 말한다.

 

웨이챠오를 잘 아는 인사에 따르면, 장스핑은 자주 자신의 강렬한 재물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핵심간부를 교육시킨다: 무엇이 사람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인가? 너희도 모두 돈이 많다. 내가 가장 많다. 너희는 사회의 부유계층이다. 다만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 생각에 진정한 가치를 실현시키는 최고단계는 일하는 것이다. 네가 일을 더 많이 해서 사회에 행복을 더 많이 가져다 주면, 너는 더 많이 벌게 될 것이다. 네가 일하는 것이,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헌재, 장스핑은 매일 여전히 6시반에 정확하게 회사에 출근한다. 평소 출장갈 때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면 혼자서 가방을 들고 떠난다. 수행원은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장스핑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직위와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이 수행원을 가득 데리고 다니면서 과시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고. "관리, 규율과 작풍은 모두 윗사람이 하는 것을 아랫사람이 배운다. 만일 지도자가 다닐 때 십여명이 따라다니게 만들면, 이런 작풍으로 기업의 효율과 원가통제가 가능하겠는가. 생각해보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다."

 

장스핑이 당숙, 웨이챠오촌의 촌위서기인 장준쉐이(張尊水)는 이렇게 말한다. 장스핑이 성공한 후, 일상생활에서 명품을 전혀 쓰지 않는다. "식사도 집에서 한 것을 좋아한다."

 

사실상, 15만평방킬로미터의 산동에서, 장스핑과 유사한 기업가는 적지 않다.

 

웨이챠오에서 십여킬로미터 떨어진 시왕(西王)집단은 중국최대의 옥수수유생산가공집단이다. 저우핑의 제2대기업이기도 하다. 그 산하에는 4개의 상장회사가 있다. 창업자인 왕용(王勇)의 인생경력도 장스핑과 유사하다. 시왕촌에서 태어나서, 촌서기를 지냈고, 나중에 시왕복리유면공장의 공장장을 냈으며, 시왕집단을 만든 후 동사장이 된다. 현재 시왕의 연판매액은 이미 260억위안을 넘어섰다.

 

같이 저우핑에 있는 치싱(七星)집단의 동사장 자오창쉐이(趙長水), 촨양(傳洋)집단 총경리 궁촨양(宮傳洋)과 시왕집단의 왕용은 모두 웨이챠오집단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만 양적인 차이가 계속 벌어지면서 나중에는 점점 '마음을 비우고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저우핑뿐아니라, 롱커우시의 난산(南山)집단 송줘원(宋作文)(장스핑과 같은 나이), 양구현의 펑샹(鳳祥)지주의 동사장 류쉐징(劉學景), 동잉컨리성통(墾利勝通)집단 동사장 왕슈성(王秀生)등 가족기업의 창업자들도 모두 이 지역의 대형민영기업으로서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창업자는 대부분 1950-60년대에 출생했고, 중국경제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변화할 때, 사업을 시작하고, 생각했던 바를 용감하게 했고, 어느 업종에서 선두주자가 되었으며 점차 부를 쌓았다. 그들의 기업관리는 가족통제라는 특징이 선명하다. 창업자는 대부분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으며, 은인자중한다. 매체에 얼굴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다.

 

백억의 부를 지닌 장스핑은 아마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부호로서가 아니라, '전력개혁투사'의 이미지로 전국에 명성을 떨치게 될 줄은.

 

2012년 계단식전력가격조정의 때에 왜 전력가격은 오르기만 하고 내릴 줄 모르느냐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때 "웨이챠오에 자체건설한 전력망의 전력가격은 국가전망보다 1/3이나 싸다"는 보도가 나와서 여론을 촉발시켰고, 비판과 찬양은 순식간에 이 원래 조용했던 기업을 둘러쌌다.

 

각측의 논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이다. 지지하는 측은 웨이챠오가 자체건설한 전력망에서 자체전력공급을 하고, 잔여전력을 저가로 주변이용자에게 매각하는 것은 전력체계개혁시장화의 방향이다. 그리하여 웨이챠오는 '전략소강촌'이라 칭하게 된다. 반대자들은 웨이챠오의 행위는 불법적이며, 환경보호가 기준에 미달하고, 안전성이 낮으며,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한다. 4가지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쌍방의 관점은 서로 배치된다. 그러나 컨센서스를 이루는 점도 있다. 만일 지방정부의 강력한 지지와 기업자체의 규모와 영향이 기반으로 되지 않았더라면, 웨이챠오발전모델은 복제될 수 없다는 것을.

 

익명을 요구한 한 전력분야의 권위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웨이챠오가 무슨 설비를 썼는가? 전세계에서 모두 공용발전소를 만들고 원가는 공개된다. 그 자신이 발명했는가? 어떻게 다른 곳보다 1/3이나 쌀 수 있는가? 소모가 다른 사람보다 적단 말인가?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우리들은 그냥 식충이란 말인가?"

 

"저우핑은 하룻만에 전국각지에서 수십개의 매체가 몰려오게 되었다." 장스핑은 솔직하게 말한다. 이것은 확실히 기업의 생산활동에 교란과 압력이 되었다. "당연히 인터넷의 수백만개의 댓글을 나의 핵심인력들은 아예 관심두지 않는다. 신경쓰지 않는다."

 

논쟁초기, 장스핑은 침묵으로 일관하고자 했다. 그러면 점점 가라앉을 것으로 보았다. 다만, 국가발개위, 환경보호부, 국가전망이 계속 의견을 얘기하고, 일부 권위있는 전문가들도 나서서 말을 하자, 장스핑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성위, 성정부에 서신을 쓴다. 각계에서 웨이챠오로 사람을 보내어 참관하고 조사하게 해달라고. "우리의 실제상황을 보라. 특히 우리 전체기업이 사회책임을 부담하기 위하여 여러해동안 해온 노력을."

 

장스핑은 이렇게 말했다 그해에 스스로 전력망을 건설해서 자신의 회사에 전력공급하게 된 것은 실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1990년대 중국의 전력은 부족했다. 전력공급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자주 제한송전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방직기업의 생산질서에 영향을 주고, 비용을 크게 증가시켰다. 열병합발전소를 만드는 것도 장스핑이 발전소에 투자하여 스스로 발전소를 갖추게 된 중요한 원인중 하나이다. 발전소의 생산개시전에, 웨이챠오는 보일러를 이용하여 방직생산에 필요한 증기를 공급했다. 경제성이 아주 나빴다. 환경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열병합발전소에서는 전력을 생산하는 동시에 방직공정에서 필수적인 증기도 생산한다.

 

1999년 9월 28일, 웨이챠오의 첫번째 열병합발전소가 완공되어 생산개시된다. 생산용량은 7.8만와트였다.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오전, 웨이챠오는 즈보전망에서 통지를 받는다. 반드시 대전력망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단독전력망을 운영하는 리스크를 생각하여, 웨이챠오는 바로 분리를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즈보전망은 동시에 저우핑현정부에 경고를 보낸다.

 

장스핑은 회고한다. "현장이 친히 나를 찾아왔다. 즈보전망에서 경고했다. 만일 웨이챠오의 자체전력망을 분리시키지 않으면, 전체 저우핑현의 전기안전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현장이 찾아오자, 돌연 장스핑의 강경한 성격은 이로 인하여 속으로 큰 변화를 일으킨다. 그는 현장에게 말했다 반드시 잘해내겠다. 압력을 동력으로 바꾸겠다고. 그리고 분리에 동의한다. "나는 당시에 생각했다. 즈보전망이 나를 분리시켜 나가게 하면, 그는 이후에 나를 관리감독할 수 없다. 나의 발전량은 분명 확대될 것이다. 이후에는 그가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업계에서 잘 아는 바와 같다. 13년동안 독립전력망을 운영해온 웨이챠오의 모든 프로젝트는 더 이상 국가전망의 전기를 쓰지 않았다. "우리는 허풍을 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번도 정전사고를 일으킨 적이 없다." 계속 자체발전소를 확충하면서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모델은 웨이챠오의 방직업과 알루미늄이라는 양대 핵심사업의 원가를 낮춰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윤증가에 가속기를 단 셈이 되었다.

 

현재, 웨이챠오집단의 총용량은 395만킬로와트이다. 다음 목표는 448킬로와트까지 늘이는 것이다.

 

비록 장스핑이 방직업이건 알루미늄업이건, 원가통제는 아주 방대한 공정이고, 어떤 요소나 단계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저원가의 전략자체공급은 원가통제방면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없는 것이다.

 

주식공모설명서에 따르면, 2009년, 중국홍챠오의 알루미늄제품은 톤당 평균원가가 10,627위안이다. 안타이커의 데이타를 보면, 그해 업계평균수준은 11,375위안이었다. 2010년 전3분기 알루미늄제품의 평균비용은 더더욱 '기이하게도' 톤당 8.256위안으로 떨어진다.

 

아메리카 메릴린치가 최근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중국홍챠오의 자체발전비요은 업계평균전력비용보다 0.209위안/킬로와트시가 낮다. 홍챠오의 톤당원가는 동종업계보다 3800위안이 낮다. 그중 전력비용에서 오는 것이 2800위안이다. 산화알루미늄운수포장의 200위안, 용화산화알루미늄판매 300위안, 고회전율이 가져온 것이 500위안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데이타를 보면, 전력자체공급이 웨이챠오집단에 있어서 특히 알루미늄산업의 확장에 중요한 의의를 지님을 알 수 있다.

 

관련데이타를 보면, 중국홍챠오는 상장전인 2010년, 순이익이 42억위안에 근접했다. 같은 해 중푸실업, 운뤼주식, 난산알루미늄, 자오줘완팡, 밍타이알루미늄과 동양양뤼의 순이익을 합한 것의 2.5배이다. 같은 해 수입은 그들의 36%에 불과했음애도.

 

2012년, 중국홍챠오는 영업수익 248억위안을 실현한다. 보통주주주에 귀속되는 순이익은 54.5억위안이었다. 생산과잉, 업종불경시의 시간대에 이런 실적은 이미 놀라운 것이다.

 

중국홍챠오의 행정총재 장보(張波, 장스핑의 아들)는 이렇게 예측한다. 2013년 전략자체공급비율은 80%에 달했다(나머지는 제3의 회사가 공급한다), 산화알루미늄의 자급비율은 60%이다. 안정적인 공급을 유지하는 것이, 알루미늄원가에서 톤당 200위안을 더 낮출 수 있다.

 

방직은 쇠퇴하고 있고, 알루미늄은 굴기한다. 다만 장스핑은 방식업이 대체불가능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방직은 민생업종이다. 모두 원시사회로 돌아가서 옷을 입지 않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방직은 영원히 사양산업이 아니다." 장스핑이 보기에, 방직의 의미는 영업수익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대량의 취업기회를 제공하고, 지방정부의 압력을 완화시킨다. "모두 도시화를 얘기하지만, 만일 노동집약형산업이 지탱해주지 않으면, 농민친구들이 도시에 가더라도 일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당시 장스핑과 잘 아는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 장스핑은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질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생하는 것을 겁내지 않고, 부지런하고, 일처리가 시원스러웠다."는 것이 그에 대한 보편적인 평가이다. 다만, 당숙인 장준쉐이의 인상에서 장스핑은 말이 많지 않지만 일을 잘해내는 아이였다고 한다. "잘 생각하지 않으면 가볍게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일단 말을 하면 철저했고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1981년, 수레를 밀고, 면화를 짊어지는 일도 하고, 공장 소방대장도 지냈던 장스핑은 저우핑현공소연합사가 100%자금을 낸 제5면공장 공장장이 된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첫번째 전환점이다.

 

당시, 다른 성에서 종자를 가져다가 생산을 확대한 것이 유면공장의 첫번째 목돈을 마련해준다. 1986년, 장스핑은 수건공장을 만든다. 1989년 그는 기업의 600만위안의 자금을 가지고, 모두 1000여만위안을 모아서, 1.6만사정의 방사공장을 만든다. 얼마후 다시 6000만위안으로 3만여매사정의 면방공장과 336대의 직기를 가진 직포공장을 만든다. 이때부터 웨이챠오는 계속 규모를 확장하게 된다.

 

그후 장스핑은 산업이 불경기일 때 확장을 가속화한다. 장씨의 성격에서 "머리를 쳐박고 일을 하며, 철저하게 하고,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이 웨이챠오의 성격으로 된다.

 

1993년-1997년, 방직업이 곡절을 겪고, 일부 오래된 면방공장은 연이어 도산한다. 1998년 금융위기가 발발한 후, 일부기업은 더욱 힘들어 진다. 다만 바로 이 두 번의 산업격변기에, 장스핑은 새로이 시세를 거슬려 확장한다. 설사 국가에서 제한하고 압박을 가했지만, 전진하는 발걸음은 전혀 멈추지 낳았다.

 

첫째, 웨이챠오는 위의 어려운 시기에 3.3억위안을 들여 사방에서 파산하여 매물로 나온 설비와 공장을 사들인다. 면방직능력이 금방 28만정으로 늘어난다. 1998년, 위이챠오는 거액겷손의 국유기업 빈저우일면을 사들인다. 생산능력은 33만정으로 늘어난다.

 

장스핑이 빈저우일면의 시찰을 왔을 때 직원들은 문앞에서 "꺼져라. 시골쓰기"라는 플랭카드를 걸고 있었다. 장스핑은 신속히 회의를 개최한다. 먼저 한동안 침묵하더니 돌연 물었다: '만일 나를 오지 못하게 하면, 너희는 기업을 어떻게 만들려고 했는가?"

 

당시 국유기업인수때를 회고하면서 장스핑은 당시 가장 간단한 요구는 바로 제 시간에 출퇴근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러지 않으면 급여를 깍겠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일상운영에서 더욱 엄격하고 구체적인 규정을 만들었다. "이것을 원래 직원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계속 이견을 냈다. 웨이챠오가 경영진을 파견하여 계속 설득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한마디 말을 던지게 된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떠나라." 철완의 정리정돈을 거쳐, 웨이챠오의 해외판매채널을 완전히 공유하게 되면서 빈저우일면의 판매수익과 이익세금은 다음해에 59.6%와 44배로 늘어난다. 공장이 잘 돌아가게 되자 분쟁도 점점 사라졌다.

 

그때, 장스핑은 저우핑, 빈저우, 웨이챠오진, 웨이하이등지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건설했다. 매 생산기지에는 3,4개의 공장을 두었다. 매 공장의 규모는 원래의 빈저우일면보다 컸다. 이런 확장속도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외부적으로 급속히 확장하면서, 기업내부의 조정도 뒤따랐다. 1994년, 장스핑은 저우핑현웨이챠오면방직공장의 공장장을 겸임한다. 1998년, 웨이챠오면방직공장은 웨이챠오방직집단(2003년에 웨이챠오창업집단으로 개명함)으로 개조되고, 이때부터 새로운 확장이 시작된다. 그후 5년동안 웨이챠오는 170억위안을 누적적으로 투입하여, 33만매의 사정에서 500만정으로 늘이고, 직기는 4000대에서 4.2만대로 늘인다.

 

2005년, 40년동안 계속된 전세계 방직품쿼터제가 폐지된다. 먼저 미국에서 3차에 걸쳐 중국방직품의 수입수량을 제한하고, 이어서 EU가 뒤를 따르겠다는 위협이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격변기의 국제시장에서 웨이챠오는 다시 70억위안의 거금을 들여, 방직염색의류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생산능력이 급증하는데도 웨이챠오는 판매부진의 곤경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지표는 50%이상 신속히 늘어났다. 1997년-2003년, 웨치챠오의 수출로 인한 외환수입은 연평균 70%이상 늘어났다.

 

웨이챠오의 확장은 아무도 막을 수없었다. 업계도 "장씨도법"의 날카로움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아주 소박하고 아주 야만적인 대생산노선"이라고 말한다. 이런 노선은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그때의 경쟁상대방은 혹은 질투, 혹은 무력, 혹은 존경, 혹은 곤혹으로 심경이 복잡하다.

 

중국면방직업협회 부회장인 왕과강은 장스핑과 알고 지낸지 오래 되었다. 그는 일찌기 개인적으로 장스핑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국가가 생산제한할 대, 너는 확장했는데, 그후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했느냐. 장스핑이 대답했다. 먼저 거두어 놓으면 반드시 쓸 데가 있다. "정책은 변할 것이다. 나는 시장을 믿었다."

 

장스핑은 매번 시장의 변화를 기회로 여겼따. 방직업의 기회는 언제나 있다. 현재도 있다. 문제는 어떻게 잡느냐는 것이다. "다만 시장지위와 발전의 차이는 왕왕 시장의 불경기때 형성된다."

 

기업규모가 계속 확대되면서 업계의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왕과강은 이렇게 말했다. 경쟁상대방의 느낌은 위이챠오의 확장이 지나치게 야만적이라는 것이다. 제품이 풍부하지 않을 때 그저 규모만 노렸다. "눈 딱감고 규모를 확대하고 원가를 줄이고,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업계에서 회의를 열면, 항상 웨이챠오의 '야만'적인 확장에 비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나 장스핑은 항상 온화한 기색으로 반박하지 않았다. 회의는 평상시처럼 열리고, 말도 평상시처럼 했으며, 회의가 끝나면 떠났다.

 

이에 대하여 장스핑의 대답은 이렇다: 위를 보지 않고, 책을 보지 않고, 실제를 본다. "하나의 좋은 기업은 비판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진정 기업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시장뿐이다. 만일 시장의 능력이 안되면, 정부와 동종업계가 아무리 칭찬해주어도 일어설 수가 없다."

 

왕과강은 생각한다. 웨이챠오의 발전은 EMBA교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웨이챠오는 규모발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노렸다. 모두가 정신을 차린 후에는 그가 이미 면방업계의 세계최대기업이 되어 있었고, 복제할 방법이 없었다."

 

모두 웨이챠오의 확장모델을 논쟁할 때,장스핑은 이미 발전소, 알루미늄공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중에 웨이챠오는 알루미늄과 전기업중에서 발전할 때 방직업에서의 규모확장하던 방식이 은연중에 나타났다.

 

지금, 웨이챠오의 저우핑생산기지에는 대량의 방직공장을 제외하고, 웨이챠오의 6개 발전소, 6개 산화알루미늄공장, 2개의 전해알루미늄공장이 들어서 있다. 20여년동안, 웨이챠오는 "방직-염색-의류"의 완전한 면방산업체인을 형성한다; 그리고 최근 10년간, 그는 다시 저우핑, 빈저우 등지에 날로 완비되어 가는 "열병합발전 -금속제련 - 알루미늄산업심가공"의 알루미늄전기산업체인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 웨이챠오는 이미 전국4대알루미늄생산업체중 하나로 성장했다. 국내에서 영리능력이 가장 강한 알루미늄기업중 하나이다. 이윤은 이미 방직업종을 추월했다.

 

일찌기 이런 보도가 있었다. 웨이챠오가 이렇게 확장하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고. 왕궈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무너지는가. 그의 종합적인 장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원가가 낮고, 규모가 크다. 선순환구조를 갖추었다. 

 

2012년, 웨이챠오집단은 판매수입 1,850억위안, 이윤 104억위안을 달성했고, 각종세금 54.5억위안을 납부했다. 그중 저우핑현에 납부한 세금이 39.4억위안이다. 장스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현재도 여전히 급속성장단계이다. 앞으로 5년, 웨이챠오의 알루미늄, 전기는 규모에서나 이윤에서나 모두 방직업부분을 추월할 것이다."

 

그러나, 웨이챠오집단이 현재 가진 문제들은 이미 장스핑이 직접 처리하지 않는다. "나는 주로 전략과 대외투자를 관장한다. 장보, 장홍샤(張紅霞), 장얜홍(張艶紅)의 세 자녀가 집단관리의 대들보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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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매체에서 웨이챠오 발전문제를 보도했는데, 웨이챠오의 방직과 중국홍챠오의 주가에 영향이 있는가?

장스핑: 당시에 약간 영향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별 일 없었다. 기실 주가는 상관없다. 나는 지금 관심없다.

 

기자: 주식을 팔아서 현금화한 적이 있는가"

장스핑: 없다. 한번도 없다.

 

기자: 투자방면에서 부동산에 들어가거나 선물시장에 들어갈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장스핑: 나는 10년전에 이미 결심을 했다. 부동산과 선물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면화선물분야의 사람이 나를 여러번 찾아왔었다. 나는 응락하지 않았다. 선물시장은 돈을 벌 때는 좋지만 손해볼 때는 참혹하다. 돈을 쉽게 벌면 쉽게 잃는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규칙이다. 실체경제를 하고, 땀으로 돈을 번다. 시장이 좋으면 많이 벌고, 시장이 좋지 않으면 적게 번다.

 

기자: 왜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는가?

장스핑: 나는 꽌시를 잘 처리하지 못한다. 리카싱은 부동산을 해서 아주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우상이 아니다. 나는 배울 수도 없고, 배울 생각도 없다.

 

기자: 그렇다면 당신은 정부관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장스핑: 나는 꽌시를 잘 처리하지 못한다. 지금 나는 지방정부의 장상명주이다. 꽌시를 맺으려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기업이 계속 지방에 공헌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자: 그렇다면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는 누구인가:

장스핑: 왕용칭이다. 그도 실업을 했다.

 

기자: 만일 기업의 부서가 단결하지 않고, 간부가 이익과 권리를 다툰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들의 이익관계를 해소시킬 것인가?

장스핑: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 업무와 생활에서 약간의 마찰이 있는 것은 정상적이다. 만일 개별 부서간에 단결하지 않으면 상호 조정하면 점점 괜찮아 질 것이다, 다만 간부가 권한과 이익을 다툰다고 했는데, 그들은 빼앗길 권한도 없다. 내가 그에게 부장을 하게 하면 그가 하면 되는 것이고, 만일 내가 못하게 하면 그는 무엇을 다툴 것인가.

 

기자: 종업원의 우리사주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스핑: 우리 집단의 적지 않은 간부들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10만주, 어떤 사람은 50만주, 도한 1000만주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들의 관점은 나와 비슷하다. 웨이챠오의 간부와 직원이 어떻게 일을 하느냐는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은 다르다. 그들의 생각속에는 이런 개념이 없다.

 

기자: 지분은 부를 의미하는데 어찌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가.

장스핑: 기업이 활력을 유지하려면 내 생각에 주로 웨이챠오는 장기간 형성된 기업문화의 영향이 있다. 당연히 문화는 말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원은 1980년대부터 해왔고 많은 곤란을 겪었다. 우리는 이들 곤란을 해결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문화를 형성했다. 경영진은 왕성한 투지를 유지하고, 기업발전도 관성을 형성했다; 나는 기업과 인원이 활력을 유지하는데, 지분이 잘 말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분은 기업활력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기자: 가족기업으로서 다음 후계문제를 생각하지않을 수 없는데 어떻게 보는가?

장스핑: 현재 아들 장보가 알루미늄, 전력을 관장하고, 딸 장홍샤가 방직을 관장한다. 작은 딸 장얜홍은 공업원을 관장한다. 그들은 관리, 인사임면등 분야에서 다 잘 하고 있다. 완전히통제하고 있다. 나는 아주 안심이 된다.

 

기자: 어렵지 않은가?

장스핑: 좋은 관리와 매커니즘은 관성이 있다. 웨이챠오의 관리는 일찌감치 궤도에 들어섰다. 나는 현재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기자: 우리가 접촉한 많은 실업을 하는 가족기업들이 그들의 2대는 모두 실업을 하기를 원치 않고, 금융에 대하여 큰 흥취를 나타낸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금융분야에 들어가도록 권유한 적이 있는가?

장스핑: 그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 그들 자신의 분야만 잘 관리해도 괜찮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