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심지악(沈之岳): 국공 특무전의 최대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3. 6. 11.

글: 혜룡(惠龍) 

 

 

 

국민당 보밀국 주주산소절정보참(駐舟山蘇浙情報站) 참장 심지악은 아마도 양군 잠복진영에서 최대의 수수께끼중 하나일 것이다.

 

국민당에서는 심지악을 초기에 명을 받들고 공산당에 잠입하여 모택동(毛澤東)의 신변에 매복했던 대립(戴笠)의 부하라고 말한다. 대만으로 간 이후에는 "조사국의 아머지"가 되고, 후세에 "남색007", "대립이후 제2대첩왕"으로 불린다; 그러나 다른 일설에 의하면, 심지악은 근본적으로 공산당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산당을 위하여 대만에서 죽을 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두 명의 첩자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설은 비록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심지악이 말년에 대륙으로 가서 병치료를 받을 때 중공고위층으로부터 귀빈대접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1933년, 22세의 심지악은 상해복단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한다. 공산당인 동창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심지악은 공산주의서적을 적지않게 읽었다. 처음에는 노동자운동을 지지하는데 적극참여했다. 이런 진보학생의 모습에 복단대학학생이라는 뛰어난 배경으로 그는 점점 공산당조직의 호감을 얻는다. 공산당원인 친구의 소개를 받아 심지악은 포동매탄공사의 노동자가 된다. 그리고 뛰어난 지도능력으로, 조직을 위하여 많은 우수한 노동자들을 끌어들인다. 그후 파업운동의 선도자로서, 심지악은 국민당당국에 체포되어 구금된다.

 

당시 심지악은 비록 노동자의 처지를 동정하였고, 좌파청년들과 가까웠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었다. 대립은 이 젊은 고향친구가 총명하고 민첩하며, 노련한 것을 보고, 호감을 가진다. 여러번 얘기를 나눈 끝에 심지악은 대립에게 설득당한다. 그리고 국민당 지하공작자의 행렬에 들어간다. 대립과 점조직으로 비밀지시를 받았다. 대립은 심지악에게 중국공산당조직에 가입하여, 거기에 잠복하도록 지시한다.

 

대립에 흡수된 후, 심지악은 곧 석방된다. 그는 대립의 지령을 받아, 노동자운동에 게속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아니라, 중공조직이 정보를 파악하기 위하여, 정식으로 공산당에 가입한다. 공산당의 상해지구 정보교통(즉 정보전달) 임무를 맡는다.

 

1937년 봄, 서안사변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록 국공양당은 제1차합작에 합의하였지만, 국민당 당국은 중국공산당을 아주 꺼려했고, 중국공산당이 여전히 심복대환이라고 생각한다. 은폐전선은 여전히 쌍방의 승부를 결정짓는 주전장이었다. 대립은 장기간 심지악을 관찰하고 그가 성숙되고 온건하며, 마음 씀씀이가 세밀하여 중임을 맡을만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에게 연안으로 가서, 공산당조직의 심장부에 잠복하여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령한다.

 

심지악은 상해에서 여러해동안 노동자운동에 종사했던 휘황한 경력에 공산당의 감옥에 갇힌 적이 있으며 게다가 복단대학을 수료한 학력도 지니고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 <공산주의ABC>를 공부한 때로부터 그는 표준적인 진보청년이라 할 만했다. 그러므로 그가 조직에 연안에 가서, 혁명성지의 '항일군정대학'(원명 홍군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신청하자 금방 비준을 받는다.

 

연안에 도착하여, 심지악은 항일군정대학의 제2기로 공부한다. 그는 정명하고 성적이 뛰어나서 학교간부의 인정을 받는다.

 

연안당국도 나름대로 대책은 있었다. 조국의 대강남북에서 온 진보청년들 중에는 분명히 적지 않은 공산당특무가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밀하게 심사하고 고찰하는 외에, 교원들은 자주 돌발적인 수법으로 항일군정대학의 학생중에서 특무를 적발했다. 어느 날, 어느 교원이 수업중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갑자기 손을 들어, 뒷줄의 학생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봐라. 봐라. 국민당에서 파견한 특무이다." 담량이 작은 자는 즉시 놀라서 얼굴색이 변한다. 학생으로 보내어진 공작원중에서 얼굴에 놀란 기색을 드러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여둔다. 이런 상황하에서, 심지악은 한번도 얼굴색이 변하는 법이 없이 태연자약했다.

 

심지악은 항일군정대학의 동창관계를 이용하여, 공산당중앙의 요원과 괜찮은 교분을 쌓는다. 기회를 보아 적지 않은 동지들이 중국공산당의 각 훈련기관에서 훈련받도록 하고, 중공중앙의 기밀정보를 수집했다.

 

항일군정대학에서의 성적이 뛰어났기 때문에, 심지악은 졸업후 모택동에 의하여 비서요원중 한 명으로 발탁된다. 그리하여 그는 묵묵히 그의 잠복공작을 수행한다. 항일전쟁이 발발된 후, 중공중앙이 발표한 약간의 중요문건은 심지악이 잘 아는 중요정보였다. 모두 비밀리에 중경에 보내어진다.

 

심지악이 1033년 대립에게 설득당하여 국민당지하공작자가 된 때로부터 중공 주상해조직에 들어가고, 1941년 겨울 중경에 되돌아올 때까지, 중공조직 및 중공핵심에 9년이나 깊이 잠입해 있었다.

 

일찌기 심지악과 같이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는 장애평(張愛萍)은 심지악에 대하여 이렇게 평론한 바 있다: "심지악은 9년의 공산당경력중에서, 7년은 모범당원이었다. 그의 성격은 주은래 총리와 닮았다. 내성적이고 온유하며 함축적이다."

 

1994년 2월, 심지악은 타이페이에서 병사한다. 타이페이 <중앙일보>에 실린 추도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중공 전 국방부장 장애평으로부터 흘러나온 심지악 선생에 대한 평가는 '지용쌍전(智勇雙全), 치국유방(治國有方), 일사이주(一事二主), 양변무상(兩邊無傷)...". 바로 이 '일사이주, 양변무상'은 외부에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남겼다. 다만 설사 아무리 심지악에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심지악의 입에서 조그만큼의 해석도 들을 수 없었다.

 

1949년 3월 해방군이 장강을 넘었고, 많은 국민당군은 주산으로 철수한다. 이때, 심지악의 새로운 직무는 보밀국 '소절정보참' 참장이었다.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주산참의 이 1년간의 재직과정이 필생의 정치생명의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 줄은.

 

1950년 3월, 보밀국은 중공대만성공작위원회 서기 채효건(蔡孝乾)공산당간첩사건을 적발한다. 채효건은 중공 화동국에서 파견한 여간첩 주담지(朱湛之)를 털어놓는다. 주담지는 대만전구전략방어도를 포함한 중요한 군사정보를 가지고 주산으로 간 후, 배를 바꾸어타서 상해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타이페이의 보밀국은 주산의 심지악에게 밀전을 보내어 그에게 주담지를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그렇지 못하면 중공대군이 아마도 주담지가 전달한 정보를 가지고 대만에 상륙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마음씀이 세밀한 심지악은 시간과 달리기하는 정신을 발휘하여, 아주 위급한 정세하에서, 융단포격식으로 주산섬의 4,5만명 군민을 조사하여 마침내 주담지의 행방을 찾아내고 즉시 체포한다.

 

그후, 심지악은 노공산당원의 자격으로 주담지를 설득한다. 그녀는 마침내 오석(吳石)과 함께 정보를 절취한 모든 과정을 털어놓는다. 오석공산당간첩사건이 뒤를 이어 드러난다. 심지악은 큰 공을 세웠고, 장개석 부자는 이로 인하여 심지악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게 된다.

 

심지악이 공을 세울 때는 마침 장경국이 특무계통의 문제인물들을 대거 정리정돈하는 때였다. 1950년 5월, 장개석은 심지악을 '총통부자료조" 석패훈련반 부주임으로 임명한다. 주요임무는 '총통부자료조" 주임 장경국을 도와서, 특무간부를 훈련시키는 석패훈련반을 맡는 것이었다. 이때는 심지악과 장경국의 관계가 더욱 밀접하게 된 시기였다. 

 

그후 심지악은 대진방위사령부 정치부주임으로 4년여간 있는다. 장경국이 그때 대진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방문했다. 그는 심지악과 아침저녁으로 함께 하며 점점 깊은 감정을 쌓아간다. 심지악은 말그대로 '태자계'의 인물이 된다.

 

1958년 봄, 심지악은 명을 받아 조사국 부국장이 된다. 그리고 1964년에는 조사국 국장이 된다.

 

바로 이로 인하여, 심지악은 대만에서 '조사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는다.

 

1979년 3월, 심지악은 은퇴연령이 되어 퇴직한다. 다만 장경국은 심지악이 그의 곁을 떠나게 놔두지 않았다. 그를 "총통부국책고문"으로 초빙한 후, 아랫사람에게 총통부 장경국의 사무실 옆에 연결된 방을 심지악에게 준다. 장경국이 죽을 때까지, 심지악은 시종 국민당 당국이 가장 중시하는 특무계통원로였다.

 

심지악은 1990년 말기전립선암을 앓는다. 그리고 1993년 11월 폐로 전이된다. 이 기간동안, 심지악은 처인 서로(徐露)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경으로 가서 명의에게 치료받는다. 대륙여행기간동안, 심지악은 북경 조어대 국빈관에 머문다. 심지악은 대륙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여 여관비용은 모조리 자신이 부담한다. 대륙의 최고당국은 심지악을 접견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완곡하게 거절한다. "내가 북경에 온 것은 병치료때문이다. 다른 것은 없다."

 

과거의 동창인 장애평은 특별히 명나라때 명의 이시진의 후인으로 하여금 심지악의 병을 치료하게 안배해준다. 그리고 여관으로 가서 심지악과 얘기를 나눈다. 전 국가주석 양상곤은 심지악의 처인 서로와 만난다.  그는 심지악이 대륙을 떠난 후 대만에 있는 기간의 기록을 더 많이 알고 싶다고 말한다. 대륙에서는 대만시기의 심지악에 대한 기록이 공백이었기 때문이다.

 

1994년 2월, 심지악은 타이페이에서 병사한다. 향년 82세이다. 이 은폐전선의 전사는 이제 역사가 되었다. 그는 기록으로 남겨져있지 않은 많은 비밀을 안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