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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환관과 문관: 서로 다른 탐욕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자작자애2 

 

명나라때의 태감(환관)은 일반적으로 모두 보잘 것없는 집안 출신이다. 신세배경이 간단한데다, 집안을 이을 후계자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영향력과 기반은 문관들과 비교할 수가 없다. 그들의 부정부패수단은 비교적 간단하고 직접적이다. 일반적으로 접대를 받고, 돈을 요구하는 수준이다. 쉽게 발각될 수 있고, 사후에 집안을 수색하고 죽이면, 국가(황제)의 손실은 적지 않게 회복될 수 있다.

 

문관은 제도적인 탐욕이다. 예를 들어, 해금(海禁, 해상무역금지)이 가장 좋은 예이다. 태감은 시박사(市舶司)를 장악하고 돈을 요구해서 챙길 뿐이다. 국가세수가 절반 정도 손해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절반의 수입은 국가가 가져간다. 문관들은 어떻게 했는가? 해금을 했다.

 

먼저, 문관들은 대부분 대지주이다. 자신이 제품의 생산자이다. 그 후에 해상무역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시박사에서 세금을 거둔다.

둘째, 기타 민간의 상인들과의 경쟁으로 이윤이 내려간다.

 

당시 어떤 문인의 필기기록을 보면, 쌍서(雙嶼)와 월항(月港)의 민간무역이 아주 흥성했다. 한 소규모상인이 일부 물건(예를 들어 철침)을 수입하려면, 항구에 운수를 전용으로 담당하는 선박이 있고, 사람수와 화물중량(계산방식은 아주 복잡하고, 중량, 종류, 체적요소가 모두 있다)으로 계산한다. 일본을 한번 갔다오면 소규모상인들은 최소한 배의 이윤을 얻는다.

 

문관은 어떻게 했는가? 해금.

 

첫째,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다. 해금이 되었으니, 이론적으로 해외무역은 없다. 시박사를 없애버린다. 문관들의 선박은 더 이상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둘째, 경쟁하는 소규모상인들에게 타격을 가했다. 해금에서 금지한 것은 소규모무역이다. 대규모상단은 아무런 제한없이 무역을 진행했다. 거의 무역독점이 되니 이윤이 몇 배로 늘게 된다.

 

기실 나중의 왜구는 문관사대부의 이런 해금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해상이 점차 커지면서 단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관들은 제약하기 힘들고, 쌍방의 갈등은 충돌한 후에 불꽃을 튀긴다. 왜구의 난의 진정한 발단은 실제로 왜구수령 왕직(진정한 한족이고, 안휘성 토박이이다)과 몇몇 큰 해상(거의 전부 한족이다)이 하나의 집단을 결성해서, 사대부가 통제하는 추세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후 강남의 한 멍청한 순무인 주모가 월항을 함락시키고 메워버리고, 왜구두목 몇 병을 붙잡아 죽였다. 이리하여 쌍방의 갈등이 격화된다.

 

그가 멍청이라는 이유는 사대부는 그저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말잘듣게 하고 싶어했는데, 그 멍청이는 그 거위를 죽여버린 것이다. 그가 자살하는 결말에 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왜구두목들 중 역사에 기록된 사람이 수십명인데, 이름으로만 보더라도, 모조리 중국인이다. 야마다 이치로 같은 이름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왜구와의 전투를 무든 침략전쟁에 대한 항거로 보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환관과 문관의 구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환관은 아무리 탐욕스럽더라도 큰 몫은 그래도 황제에게 간다. 환관은 황제가 기분나쁘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죽음만이 기다린다. 문관은 그러나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황제는 한푼도 가져가지 못한다. 숭정연간에 북방에서 재난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지만, 남방에서는 여전히 경작지를 없애고 뽕나무와 차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 해의 차세(茶稅)는 여전히 얼마되지 않았다. 이는 제약없는 문관정치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사서는 문관이 쓴다. 국가에 문제가 있고, 정책에 잘못이 있으면 자주 이를 환관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어떤 때는 황제에게 미룬다. 그래서 명나라황제는 대부분 그다지 좋은 황제로 그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환관은 더운 나쁜 놈으로 그려졌다.

 

[참고] 명나라대 황권에 대하여 얘기해보자. 정상적인 성지(聖旨)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와 내각비문(內閣批文)이 둘 다 있어야 한다. 내각비문이 없으면 황제가 내린 성지를 중지(中旨)라고 부른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명나라관리들은 이를 난명(亂命, 예를 들어 환관, 외척등 간사한 소인들이 황제를 고혹시켜 내린 황명)으로 보고 집행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명나라관리들은 한때 중지의 집행을 거절하는 것을 미담으로 여겼다. 이와 반대로 황제의 어새가 없이, 내각이 내린 명령은 거의 모두 항거한 바 없다. 이궁안(移宮案)에서 경성위수부대는 내각명령으로 근왕(勤王)을 거절했다. 이것이 좋은 사례이다. 문관의 한 마디 "강빈(江斌)의 이야기를 생각해봐라"는 말로 무장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