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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나라말기 두 건의 "일어성참(一語成讖)"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유계흥(劉繼興) 

 

궤이한 역사는 항상 사람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하는 점이 있다. 청나라말기에 발생한 2건의 '일어성참'의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첫째 이야기는 서태후와 관련되고, 둘째 이야기는 부의와 관련있다.

 

서태후는 청나라말기 동치, 광서 두 황제의 재위기간동안 최고의사결정자이며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녀는 수렴청정, 훈정의 명목으로 중국을 47년간이나 통치했다. 서태후는 중국이 '수천년간 없었던 거대한 변화(數千年未有之巨變)" 를 맞이하여, 러시아의 피터대제나 일본의 메이지천황처럼 심시도세(審時度勢)하고, 세계로 눈을 돌리고, 부국강병하여, 역사를 전진하도록 하지 못하였다. 반대로,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국가, 민족의 이익이나 미래의 발전보다 중요하게 보았다. 그리하여 포잔수결(包殘守缺), 고보자봉(固步自封)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세계에서 많이 낙후되게 된다.

 

서태후의 일생중 후세인들에게 그녀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말들을 적지 않게 남겼는데, 예를 들면, "중화의 물력으로 외국의 환심을 산다(量中華之物力, 結與國之歡心)"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다만 그녀의 한 마디 말은 아주 기이했다. 조류를 거슬렀을 뿐아니라, 청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예언한 참어가 되었다.

 

사정의 경위는 이렇다. 청나라말기의 어느 날, 서태후는 대신들이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조정에서 크게 질책하고 있었다: "우리 대청조는 국력이 창성하고, 백성이 부강하다. 비록 지금은 도창을 창고에 넣고,말을 남산에 풀어놓고 있지만, 기초는 남아 있다. 누구든지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후에 서태후는 황궁내의 촛불을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대청은 멸망하지 않는다. 춧불이 거꾸로 비추지 않는 한(燈頭朝下)"

 

문명의 발걸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1882년, 영국인인 리델은 상해전기공사를 설립한다(상해전광공사라고도 한다). 그리고 첫번째 호광등간(弧光燈杆)을 세우고, 와이탄에서 홍커우초상국부두까지 가로등을 세우고 선을 연결시켜 15개의 등을 설치하게 된다. 같은 해 7월 26일 오후 7시, 전력공급이 시작되면서 밤하늘아래 호광등이 일제히 빛을 낸다. 눈이 부신 빛을 내는 등에 수천수백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한다. 다음 날, 상해의 신문에서는 전등이 빛을 냈다는 보도를 내놓는다.

 

1886년, 서원삼해(西苑三海)에서 대거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궁전을 건축한다. 궁전을 지으면서, 의란전(儀鸞殿)에 전등을 단다. 이것은 청나라궁중에 처음으로 설치된 전등이다. 나중에 고궁에도 전등을 단다. 당시는 서태후가 아직 살아있을 때이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성격으로 볼 때 절대 이런 "등두조하(燈頭朝下)"의 전등을 설치하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화원에도 전등을 단다. 도란천(陶蘭泉)은 바로 성선회(盛宣懷)가 파견하여 이화원에 전등을 달게 한 인물이다. 서태후가 이화원에 전등을 다는데 동의한 이유는 자신이 이화원내에서 놀고 즐기기 위함이다. 낮에만 노는 것으로는 부족했고, 밤에도 놀고자 한 것이다. 전등은 초보다 훨씬 밝았기 때문이다.

 

서태후가 생각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녀의 "일어성참"이다. "등구"가 정말 "조하"하게 되니 대청강산의 퇴락세는 확연해졌고, 결국 무창의거의 총성가운데 꽃은 떨어지고 만다.

 

마지막황제 부의는 그의 회고록 <나의 전반생>에서 청나라멸망에 관한 "참어"를 하나 기록하고 있다.

 

무술정변이 서태후의 승리로 끝난 후,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시킬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광서제는 아들이 없었고, 황제폐위에는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거(阿哥)를 반복적으로 폐립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1899년 서태후는 의지(懿旨)를 내러 재의(載漪)의 아들인 부준(溥儁)을 "대아거(大阿哥)"로 삼는다. 장래 동치의 뒤를 잇는 후사가 되고, 동시에 광서제의 뒤를 잇게 된다. 즉, 동체와 광서를 둘 다 잇게 되는 것이다. 다음해 광서제는 선위대전(禪位大典)을 하고, 동싱 대아거의 등기대전(登基大典)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의화단의 난이 벌어지고,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침입한다. 대아거의 부친인 재의는 의화단을 지지했다. 서태후에게 의화단은 양민(良民)이지 난민(亂民)이 아니라고 말한다. 황란의 와중에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친다. 재의와 대아거 부준도 서태후를 따라서 서쪽으로 도망친다. 그들이 대동(大同)에 도착했을 때, 서태후는 의지를 내려 재의를 군기대신(軍機大臣)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태후는 마음을 바꾼다. 의화단과 팔국연합군의 이번 난리의 화근은 바로 재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재의의 군기대진 직무를 면직시키고, 그를 신강으로 유배보낸다. 1901년, 서태후는 북경으로 돌아와서는 부준의 부친인 재의가 잘못을 저질러 이미 처벌받았으므로 그 아들이 계속 대아거로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대아거'라는 칭호는 폐지된다.

 

1908년 10월, 서태후와 광서제는 동시에 중병에 걸린다. 광서제가 죽기 하루전날, 서태후도 일어나지 못한다. 광서제에게는 후사가 없으므로, 서태후는 중남해에서 군기대신을 접견하며 후계문제를 논의한다. 군기대신은 내외우환의 때이므로 나이가 든 사람을 세우자고 한다. 서태후는 그 말을 듣고 대노한다.결국 3살된 부의를 황제에 올리기로 한다. 그리고 부의의 부친인 재풍(載灃)을 감국(監國)으로 한다. 광서제의 병이 위급해지자 서태후는 의지를 내려 순친왕 재풍의 아들 부의로 하여금 홍위를 계승하도록 한다.

 

봉건국가의 황위계승원칙에 따르면, 부의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이치대로라면 "부(溥)"자배에서나이가 많은 조카인 부위(溥偉)가 되어야 했다. 그의 조부는 함풍제의 여섯째 동생인 혁흔(奕訢)이다. 혁흔은 당초 북경정변을 일으키고 '수렴청정'을 하게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서태후는 굳이 광서제의 동생인 재풍의 장남 부의를 선택한다. 그 원인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측한다. 서태후는 자신의 몸이 아직은 괜찮다고 여겨서 어린 황제를 세워서 자신이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외에 부의의 조모는 바로 서태후의 친여동생이다.모친은 서태후가 가장 믿는 심복인 영록(榮祿)의 딸이다. 당시 부위는 궁밖에 있었고, 당연히 자신이 황위에 오를 줄 알았다. 그런데 부의를 안고 들어가는 것을 보자, 화가나서 한참동안 욕을 해댔다. 이러한 "포효궁문(咆哮宮門)"은 사면받지 못할 대죄(不赦大罪)에 해당하지만, 서태후는 그의 조부의 체면을 봐서 참고 넘어간다. 11월 중순, 광서, 서태후가 기이하게 이틀동안 차례로 죽는다. 새로운 태후이자 광서의 황후인 융유(隆裕)는 자신의 시동생인 재풍과 함께 부의를 부축하여 등기대전을 진행한다.

 

등기대전의 날에 3살된 부의는 높고 큰 황좌(皇座)에 앉혀진다. 그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위내대신과 문무백관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하나하나 그의 앞에 와서 충성을 맹세한다. 유보는 유일하게 그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모와 함께 있으면 부의를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황실의 법도에 따르면 그녀는 등기대전에 참가할 수가 없다. 조서에는 부친이자 섭정왕인 순친왕 재풍이 부의와 함께 의식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지막 황제 부의는 그의 저작 <나의 전반생>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나의 부친은 한쪽 무릎으로 몸을 돌려 보좌의 아래에 무릎꿇고 있었다. 두 손은 나를 부축했다. 내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나는 버둥거리며 울었다. "나는 여기 있기 싫어. 집으로 돌아갈래. 나는 여기 있기 싫어. 집으로 돌아갈래" 부친은 조급하여 얼굴이 온통 땀으로 덮인다. 문무백관의 삼궤구고는 끝이 없었다. 내가 우는 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부친은 할 수 없이 나를 달랫다: "울지마라. 울지마라. 곧 끝난다. 곧 끝난다." 부친의 말뜻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무백관들에게는 참담한 인상을 남겼다. 등기대전이 끝나자 마자,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들은 몰래 속삭였다. 어찌 곧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단 말인가? 어찌 곧 끝난다고 말한단 말인가? 이것은 상서럽지 못한 조짐(不祥之兆)이다. 이것은 대청왕조에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시했다. 이번 등기대전은 전혀 기쁘고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었고, 오히려 비애의 분위기로 뒤덮였다. 그리고 순친왕 재풍의 말을 그대로 실현된다.

 

과연 3년도 지나지 않아, 1912년초, 청나라조정의 신해혁명의 폭풍을 맞이한다. 부의의 명목상의 모친(기실은 그의 백모)인 융유태후는 어린 황제를 안고 퇴위를 선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