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중국근대사상의 번역문제

중은우시 2013. 4. 13. 17:33

글: 풍학영(馮學營) 

 

초기 중국의 외국과의 교류를 보면 번역인재가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 중국과 러시아의 <네르친스크조약>은 3개의 언어본으로 체결되었다: 만주어, 러시아어, 그리고 라틴어. 그리고 "라틴어가 우선한다."

대청국과 제정러시아가 조약을 체결하면서 모두 제3국언어인 라틴어를 우선하기로 했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당시 만어주에 정통하며, 러시아어에 정통한 번역인재가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 쌍방이 모두 이의없을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당시 북경성내에는 라틴어에 정통한 천주교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조정은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러시아도 라틴어를 아는 대표를 보내어 도왔다. 이렇게 하여 상세한 협상이 전개될 수 있었다.

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조정은 이렇게 북경의 선교사들의 번역업무와 공헌을 표창했다.

".....임무를 부임받아 러시아로 가서, 성심을 다하여 노력했다...."(<정교봉포> 참조)

 

1793년 매카트니의 중국방문기간동안 번역문제로 오해가 생긴다. 사료에서는 매카트니와 건륭제의 아래와 같은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매카트니가 말한다: "......귀국의 관세 투명화를 요청합니다. 정부가 정한 관세 이외에 관세인원의 돈요구를 금지시켜 주십시오...."

번역인원: (생략)

건륭황제: ".....너희 나라의 배가 비교적 많다고 하여 관세징수를 더 많이 할 수도 없고, 너희 나라만 세금을 유독 감소시켜줄 수도 없다. 규정에 따라 공평하게 징수해야 하고, 다른 나라와 동일하게 처리해야 한다...."

(사료출처: <월해관지>)

확실히, 번역인원은 매카트니의 말을 잘못 번역했다.

매카트니가 말한 뜻은: 대청국의 세관관세는 명확하게 해주십시오. 얼마의 비율로 관세를 거둘 것인지를 법으로 명확히 해주십시오. 왜나하면 당신들의 광동 세관인원든 항상 우리 영국상인들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사업을 하려면 미리 예산과 비용을 잡아야 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번역인원은 매카트니의 이 말을 이렇게 번역한다: "건륭황제께서 우리 영국상인들에게 관세를 감소시켜주시고 관세우대를 해주십시오"

건륭황제는 그래서 위와 같이 답변한 것이다: 관세는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너희 영국상인의 배가 많다고 하여 너희들에게 더 많이 받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너희들에게 적게 받을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다른 국가의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대해야 한다.

우수한 번역인재가 없다면 외교사무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1839년, 임칙서는 광주에서 아편금지를 시킨다. 당시에 광주행의의 미국선교사 겸 의사인 Peter Parker로 하여금 <만국공법>을 번역하게 시킨다. 일상적으로 '이무(夷務)'를 처리할 때, 임칙서가 의존한 것은 이 몇명의 통역이었다. 이들은 모두 귀국화교들이다.(<임칙서일기>참조)

당시 귀국한 후 가장 자주 하던 일은 통역이다. 예를 들면, 용굉은 미국 예일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찾은 첫번째 일자리가 바로 상해해관의 '번역처'에서 통역을 하는 일이었다.

만일 전인류가 한가지 언어를 말한다면, 아마도 일부 전쟁은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842년 중국과 영국의 <남경조약> 제2조를 보면, 중문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2. 지금부터 대황제는 영국인민이 소속가족을 데리고, 대청연해의 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등 5개처 항구(港口)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무역통상에 장애가 없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대영국군주가 영사, 관사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당해 5개처의 성읍에 설치하여 상업업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당해 지방과 공문왕래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영국인들은 다음 조문의 에에 따라 화물세를 납부하고 초향등 비용을 납부해야 한다."

 

이 중문의 이해에 따르면, 영국인은 단지 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 5개 통상도시의 '항구'에 거주할 권리가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항구'이지, '성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도시는 성벽이 있었고, 항구는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 성밖에 있었다. 예를 들어, 광주의 황포항은 바로 광주성밖에 있었다. 성밖에 있을 뿐아니라, 광주의 동성문에서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다만, <남경조약>제2조의 영문판 조문은 아래와 같다:

 

"II. His Majesty the Emperor of China agrees, that British subjects, with their families and establishments, shall be allowed to reside, for the purpose of carrying on their mercantile pursuits, without molestation or restraint, at the cities and towns of Canton, Amoy, Foochowfoo, Ningpo, and Shanghai; and Her Majesty the Queen of Great Britain, will appoint Superintentents, or Consular officers, to reside at each of the above named cities or towns, to be the medium of communication between the Chinese authorities and the said merchants, and to see that the just duties and other dues of the Chinese Government, as hereafter provided for, are duly discharged by Her Britannic Majesty's subjects."

 

영국인은 이 조항에 따라 이렇게 이해했다: 영국인은 상술한 5개도시의 "cities and towns" 즉, 성내에 거주할 권리가 있다.

"cities and towns"는 바로 '성내'라는 말이다.

그 결과 문제가 생긴다. 조약체결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상인은 이 조약에 근거하여 광주성내에 진입할 것을 요청하고, 집을 빌려 거주하려 한다. 그들은 말한다: 중영 <남경조약>에 글자로 명확히 쓰여 있다. 우리 영국인은 성내에 거주할 권리가 있다고.

그러나, 청나라 광주지방관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해 조약에는 너희 영국인들이 광주의 '항구'에 거주할 권리만 규정하고 있다. 광주의 '항구'는 어디에 있는가? 성밖의 황포촌이다.

그래서, 영국인들이 성에 들어가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근대사상 유명한 "광주반입성투쟁(廣州反入城鬪爭)"이다.

 

1905년, 동경에서도 언어문제로 분쟁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취체청국유학생사건(取締淸國留學生事件)"이다.

당시 일본정부는 외국유학생을 관리하는 새법규를 제정했다. 일본어로는 "취체규정"이다. 만일 중국어로 번역한다면, '관리규정'이라는 뜻일 것이다.

"취체"라는 단어는 일본어에서 아주 재미있다. 그것은 중국어에서의 '취체'라는 뜻이 아니다. '관리'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일본기업에 '취체역'이 있는데, 이 직위는 바로 '이사'라는 뜻이다.

'취체'라는 두 글자의 일본어와 중국어의 뜻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어 "취체": 관리, 감독, 감관(監管)

중국어 "취체": 제명, 취소, 금지

당시 동경의 청국유학생들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지내기는 했지만, 일본어를 잘 하지는 못했다. 일본신문에서 "취체청국유학생"이라는 글을 보자, 더 이상 생각지 않고, 소동을 벌인 것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나중에 남경국민정부가 성립된 후, 일본정부는 자주 국민정부에 반일단체를 '취체(관리감독)'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여러번 이렇게 회신한다: "......애국단체 는 중화민국법률에 의하여 등록성립된 합법적 사회단체이다. 우리 정부는 그것을 취체할 권한이 없다...."

확실히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