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무협소설

상업시대의 무림문파: 청성

중은우시 2012. 4. 20. 18:13

출처: 간천하

 

4월 7일, '청성태극참공'과 '청성태극동공'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iPhone 어플리케이션이 애플스토어에 이름을 올렸다. 판매가격은 각각 12위안이다. LOGO는 청성파 장문인 유수빈의 태극권하는 자세이다.

 

"이 두 개의 어플리케이션은 반년의 시간을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청성문화공사 동사장 비해기의 말이다. 전체 개발팀은 15명이고 150만위안을 투자했다.

 

소림, 아미등 문파의 사업이 갈수록 커지는 것을 보면서, 후기지수인 청성파는 아예 중점을 하이테크제품개발에 쏟았다. 정보시대에 또 다른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그러나, 청성이 일파로 될 수 있을 것인지, 역사전승을 가진 것인지는 무림의 회의적인 시선을 받는다. 현지의 아미파와도 각종 은원이 있어 종종 분쟁이 일어난다.

 

비록 각대문파는 모두 무술을 주요한 삶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고, 또한 무협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걸핏하면 혈우성풍을 불러오지도 않지만, 암투는 끊이지 않았다. 그중 아미, 청성의 두 파가 특히 심하다. 같은 사천에 있고, 아미산에서 청성산까지 고속도로로 달리면 4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2002년, 청성의 장문인 유수빈은 혼례를 거행한다. 이는 사천무림의 대사이다. 원래 30개 테이블을 초청하려 했으나, 나중에 800여명이 참석한다. 할 수 없이 도강언대주점에 50탁자를 준비한다. 유수빈 본인의 회고와 당시 매체보도에 따르면, 사천에 있는 소림, 무당의 고위층들은 모두 사람을 보내어 축하인사를 했다. 그러나, 아미파는 그중 한 하급책임자만 왔고, 대표인물인 왕건(汪鍵)과 오신량(吳信良)은 모두 오지 않았다. 양파의 관계는 이를 봐도 알 수 있다.

 

"사천에 이전에는 청성파라는 것이 나타난 적이 없다. 그러나 김용소설이 유행한 후, 유수빈 장문인을 대표로 하는 청성파가 점차 영향력을 내기 시작한다." 3월의 한 비오는 밤, 낙산의 모 차관에서 아미파 장문인 왕건이 강호대사를 얘기하면서 청성일맥에 대하여 얘기한다. 그는 청성은 자고이래로 아미의 한 지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왕건에 따르면, 아미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파중 하나이다. 그의 전승은 소림에 바로 다음 갈 정도로 분명하다. 심지어 무당보다도 명확하다. "강호상에는 소림, 아미와 무당만이 문파이다. 나머지는 모두 권법의 종류이다. 현재 권법에 소림이라고 하는 것은 명나라때이다. 권창(拳槍)은 아미가 낫고, 곤(棍)은 소림이다."

 

청성파가 독립문파인지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다툼이 있었다.

 

"아미파는 '오화팔엽(五花八葉)'이 있고, 청성은 그저 그 오화중 하나이다." 90세된 아미무술의 태두인 왕욱(王旭)의 말이다.'오화팔엽'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청나라말기 담연법사의 '오화팔엽부'이다. "한 나무에 다섯 개의 꽃이 피고, 다섯 꽃은 여덟 잎이 받쳐준다. 교교한 아미의 달은 온 강호에 빛을 뿌린다"

 

팔엽은 아미파의 8개 갈래를 말한다 - 승(僧), 악(岳), 조(趙), 두(杜), 홍(洪), 화(化), 자(字), 회(會). 그리고 오화는 아미무술이 사천에서 분포한 지점이다. 각각 성도의 황림파(黃林派), 청성산의 청성파, 사천북부의 철불파(鐵佛派), 사천동부의 청우파(靑牛派) 및 점역파(點易派)이다.

 

무협소설 <아미>의 작가이자 삼강도시보의 편집인인 우철성도 "기실 사천무술은 바로 아미 일가이다"라고 말한다.

 

"청성파는 실체가 없다. 기실 뿌리가 없는 문파이다. 그러나 유수빈이 선전을 잘 알아서, 매체를 잘 이용했다. 그래서 지금의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미파의 한 고위층의 말이다.

 

이상의 주장에 대하여 청성파 장문인 유수빈은 인정하지 않는다. "담연법사는 태평천국 석달개의 군사이다. 석달개가 실패한 후, 사천에 흘러들어왔다. 그는 '오화팔엽'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목적은 사천의 무술계인사를 단합시키기 위한 것이고, 반청으로 결집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오화팔엽부는 자체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청성이 아미에 속한다는 관방 증거는 1989년에 출판된 <사천무술대전>이다. 이 책은 소위 '오화팔엽'을 68개문파로 확장했다. 이들 문파가 모두 아미무술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68개문파중에는 남소림권도 있고, 무당쿵푸도 있고, 진씨태극권, 양씨태극권도 있다. 형의권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아미무술이 아니다. 그저사천에 전해내려오는 무술일 뿐이다." 유수빈의 말이다.

 

그는 추가로 해명한다. 사천성체육위원회에서 무술을 발굴할 때, 이 68개의 권법종류를 발견한다. 그러나 전해지는 범위와 영향력이 모두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소림, 무당 양파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조직자들은 이것을 묶기로 결정한다. 모조리 아미무술로 묶은 것이다. 그래서 소림, 무당과 3분천하를 꾀했다." 이 책은 소림과 무당이 보기에 우스개이다. 그들은 이들을 아미무술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수빈은 약간 분개해 하며 말했다.

 

아미파의 한 고위층은 청성파 장문인 유수빈은 청성태극을 가르치는 것을 위주로 한다고 한다. "그러나 태극권이 청성무술인가? 유수빈은 무술에 대하여 계통적인 인식도 못하고 있다. 그의 태극권은 엉터리이다. 국내의 모든 태극의 유래는 진씨와 양씨이다. 청성태극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성태극권은 역대 장문인들이 단전(單傳)한 것이다. 나의 사부인 여국웅은 86세때 나에게 전해주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유수빈은 이렇게 해명한다. "청성태극은 진씨, 양씨태극과 많이 다르다. 그리고 청성태극권의 수인(手印)은 유일무이하다. 다른 태극권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자, 유수빈은 두 손을 둥글게 모으고, 몇 가지 수인을 보여주었다.

 

왕건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유수빈과 유일하게 간접적으로 손을 쓴 것은 1994년이다. 당시 유수빈은 사천 팽산 대붕강장에서 보위과장으로 있었다. 철강공장의 사장이 돈을 내고 현지에서 대붕정영배 경기가 벌어진다. 왕건은 대불무술학교의 몇몇 학생을 데리고 참석한다. 거기서 단체 1위를 차지한다. 유수빈이 이끄는 대표단은 등수에 들지 못했다.

 

이 일에 대하여 유수빈에게 물어보았다. 유수빈은 그 경기를 부인했다. 기자가 팽산현지신문을 확인할 결과, 그 경기는 확실히 열렸다.

 

여러가지 의문이 나타나자, 청성파는 여전히 선전과 프로모션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2009년 유수빈이 참가한 대만의 '세계중화문호ㅘ예술신전상'에서 마잉주의 접견을 받고 같이 사진을 찍는다. 이로써 또 한번 청성파가 알려진다.

 

iPhone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한 것은 청성이 보통사람들에게 자리잡기위한 수완이다. 비해기는 토로한다. 최초에 개발팀은 청성양생공에 대하여 인식이 없었다. 그는 모든 성원들에게 청성태극권을 배우게 한다. 장문인 유수빈이 친히 이들 젊은이들에게 '야마분종' '백학양시'등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자세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등을 자세히 알려준다. 반년을 들여, 어플리케이션이 출시된다.

 

2011년 사천성 도강언정부가 앞장서서, 비해기의 마뤼카집단, 유수빈의 청성무술연구회의 3당사자간에 공동으로 청성문화회사를 설립한다. 청성무술브랜드를 보급하기로 한 것이다. 목적은 '청성도양(靑城道養)'의 개념을 전파하는 것이다.

 

유수빈은 말한다. '도양'은 보건이 결합된 일종의 관광상품이고, 주로 관광단을 상대로 한다.

 

"레크리에이션양생산업을 우리는 십년전에 시작했다." 청성태극양생본부의 배사당에서, 청성파 장문인 유수빈이 말했다. "처음에 우리가 무관을 열고 제자를 받아들였을 때, 청성파의 가장 보통의 권술을 가르쳤습니다. 나중에는 일부 중노년인들이 양생에 대한 특수한 수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1997년, 유수빈은 복건상인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는 100킬로그램이 넘었고, 다이어트를 하고 싶어했다.

 

"그는 분명히 나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4시간을 수련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견딜 수 없다고." 그래서, 유수빈은 그에게 태극권을 배우라고 권합니다. 매일 1시간만 수련하라고. 그러나 여전히 4시간의 비용을 받았습니다. 1개월이 지나자, 상인은 몇 킬로그램을 감량했고, 아주 만족해 한다. 유수빈은 이렇게 하면 시간과 노력이 적게 들지만, 수입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후, 유수빈의 교수방식은 무관에서 양생과로 바뀐다. 청성태극을 배우는 외에, 청성도양식품, 도양음료를 제공하여 전면적인 양생을 가르친다.

 

지금, 유수빈의 경영방식은 청성문화회사가 복건천주의 한 회사와 합쳐서 의류브랜드를 내놓은 것이다. 청성무극. 이것은 곧 시장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