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무협소설

상업시대의 무림문파: 아미

중은우시 2012. 4. 23. 12:58

출처: 간천하

 

사천의 낙산, 크라이슬러300C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리자, 아미파 장문인인 왕건은 익숙한 솜씨로 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리고 아주 직업적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기는 대불무술학교입니다...학생을 받는데, 1년에 몇천위안입니다....세 살이면 너무 어립니다. 내가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전화를 끊고, 왕건은 액셀레이터를 밟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기자에게 말한다. "광동에 일하러 가는데, 3살짜리 아이를 맡기려고 합니다. 우리 무술학교가 무슨 탁아소도 아니고, 그렇게 어린 아이는 돌볼 방법이 없습니다."

 

왕건의 또 다른 신분은 낙산시 대불무술학교 동사장이다. 국내의 다른 문파와 마찬가지로, 무술학교를 개설하는 것이 주요한 경영방식이다. 대불무술학교는 현재 500여명의 학생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등직업학교까지 폭이 아주 넓다.

 

왕건의 본적은 호북이다. 부모를 따라 낙산으로 왔다.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아 부친은 그에게 무예를 가르친다. 중학교때부터 아미파의 조문(趙門) 무공을 익힌다. 대학은 성도체육학원을 들어간다. 거기서 체계적으로 무술이론을 익힌다. 19세에 왕건은 졸업하고, 낙산기공학교에 취직한다. "들어간 후, 상사는 제2과목을 만들게 했고, 나는 무술대를 조직하게 된다." 왕건은 몇년동안 이 무술대를 이끌고 낙산시 1위, 사천성 1위를 차지한다. 두명의 대원은 중국무경총대에 들어간다. "나는 무술대원을 배양하는데 특별히 영감이 있다."

 

1990년대초, 기술학교는 무술대를 유지할만한 재력이 없게 된다. 그래서 왕건은 스스로 독립하게 된다. "막 시작했을 때, 학교운영은 매우 어려웠다. 우리는 장소도 없고, 그저 체육관을 빌려서 가르쳤다." 왕건의 말이다. "그때 체육관의 매달 임대료는 2500위안이었는데, 우리는 그 돈이 없었다." 그는 체육관의 문앞에 탁자를 놓고, 몇몇 대원이 무술을 익혔다. 그렇게 청년들의 눈길을 끌어 입학신청을 받는다. "1사람당 1달에 50위안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첫번째 달의 임대료를 모으게 됩니다." 그때가 1993년이다.

 

대원은 모였는데, 두번째 달의 임대료는 어떡할 것인가? "나는 대원들에게 아미산으로 가서 무술결투장을 만들게 했습니다." 왕건의 말이다. 결투장은 아미산체육관에 만들었다. 누구든지 공격할 수 있었다. 져도 상관없다. 이기면 1천위안의 상금이 있었다." 우리는 입장료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중 70%는 체육관에 내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그 결투장에 대한 기억이 새롭디ㅏ.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아미 현지의 무관 사람들, 낙산에서 무술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도에서도 왔습니다." 왕건의 말이다. 결투는 4월부터 시작한다. 도전을 받는 사람은 모두 6명인데, 모두 그의 학생들이다. "모두 6번의 경기를 벌였는데, 우리가 5번을 이기고 1번을 졌습니다. 그것은 양보한 겁니다. 너무 많이 이겼기 때문에, 아미 현지사람들이 기분 나빠했고, 체육관 책임자는 우리에게 현지인에게 1번은 일부러 져주라고 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아미산 현지관중들은 소란을 피웠고, 왕건과 대원들은 호송을 받고서야 결투장을 떠날 수 있었다. "원래는 3일 저녁을 하려고 했으나, 하루밖에 못했습니다."

 

이번 경기에 모두 3천관중이 모였고, 입장료는 10위안이었다. 안전과 위생비용을 제외하고, 왕건과 대원들은 모두 5000여위안을 벌었다. "1달치 임대료를 납부하고, 식사 한끼를 하니 없어졌다." 왕건의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벌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후, 왕건은 다시 연속하여 낙산에서 4번의 유사한 시합을 벌인다. 그리고 한 페인트공장의 후원도 받아낸다. 이렇게 무술로 무술을 기르는 방식으로 이 학교를 지탱해갔다.

 

현재 대불무술학교에는 모두 500명의 학생이 있고, 왕건의 내제자는 겨우 20여명이다. 학생들은 초식, 산타 및 태권도등 무술지식을 배울 뿐아니라, 문화과목도 배운다. "우리는 문화과목교육을 아주 중시한다. 좋은 선생들을 많이 모신다." 대불무술학교 교장 동영청의 말이다. 현재 학교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2003년 가을, 김용이 아미산으로 가서 아미예술단의 공연을 보았다.

 

"당시, 왕붕은 기공개곤(氣功開棍)을 시범보인다" 쿵푸아미예술단 단장인 정항(丁恒)은 곁에 있는 아주 튼튼해보이는 젊은이를 가리키며 말한다. "그는 흥분해서 방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바로 김용의 얼굴 앞으로 곤을 날려 김용의 앞에 놓인 잔을 깨트렸다. 김용은 개의치 않았을 뿐아니라, 아미무술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칭찬했다."

 

"공연이 끝나고, 김용이 나에게 말했다. 만일 아미쿵푸가 이렇게 대단한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소설에서 아미파를 무림맹주로 썼을 것이다." 왕건의 회고담이다.

 

대불무술학교외에 아미파의 또다른 실체는 아미무술문화전파공사이다. 쿵푸아미예술단은 바로 이 회사가 운영힌다. 아미경구관리위원회가 극장을 제공하고, 대불무술학교 학생을 주체로 하여, 매일 저녁 극장에서는 '쿵푸아미'라른 베목의 공연이 이루어진다. 동자공(童子功), 탄철구(呑鐵球)등의 기공공연도 있다.

 

무술양생도 회사가 경영하는 주요 항목이다. 주로 국외관광단을 대상으로 한다. 정항에 따르면, 양생반은 초급,중급과 고급으로 나뉘는데, 매달 비용이 각각 3천, 6천 및 1만이다.

 

성수기에는 거의 매일 이런 양생단이 아미산을 온다.

 

"아미산은 매년 관광객수가 이백여만명이다. 시장이 아주 크다. 무술관광, 무술양생은 모두 발전여지가 많다. 대불무술학교의 1년 비용은 3백만위안이다. 무술문화회사의 비용이 바로 그것이다. 작년 우리는 이 두 곳의 이윤합계가 이백만위안이었다.내년에 아미산의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수입이 배는 늘어날 것이다."

 

아미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공연장소의 입구에서 한 여자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무술학교 웹사이트의 책임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김용무협소설 <신조협려>에 나오는 곽양(郭襄)이라고. 그들은 상상으로 만들어 냈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의 못브에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있고,왼손으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진다. 몸매는 풍성하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