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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새금화(賽金花): 영웅이 아니라 그냥 거짓말장이 기생이다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종춘계(宗春啓) 

 

1900년 경자사변(庚子事變)은 북경역사상의 일대재난이다. 또한 중화민족사상의 대치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재난과 모욕의 와중에 한 사람의 여류명인 혹은 여영웅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바로 오늘날까지 '영명'을 떨치는 새금화이다. 필자는 인터넷에서, 최근에 누군가 그녀를 주제로 한 영화를 찍는다는 말을 들었고, 몇몇 여자스타들은 서로 앞다투어 새금화역할을 맡으려고 한다고 들었다.

 

새금화는 어려서 기생이 되고, 14,5세경에 양인이 되어 홍균(洪鈞)의 첩이 된다. 그리고 홍균을 따라 독일로 간다. 홍균이 죽은 후, 새금화는 다시 기생으로 돌아간다. 전해지는 바에 다르면, 그녀가 종과 사통하는 바람에 홍균이 화가나서 죽었다고도 한다.

 

경자사변때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다. 늙은 기생이며 독일어를 몇 마디 할 줄 아는 새금화는 독일군대의 일부 하급장교들과 교분을 가진다. 그러나 소설가의 붓끝에서는 새금화가 연합군사령관인 발데르세와 풍류가 있었다고 쓰여진다. 새금화는 옛날 독일에서 사교댄스를 출 때 발데르세를 알았고, 두 사람은 첫눈에 호감을 느꼈다. 북경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 관계를 이용하여, 새금화는 발데르세에게 중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구금된 중국관리들을 풀어주라고 부탁했고, 조정의 의화대신을 도와공사부인과 연줄이 닿게 해주어 신축조약이 순조롭게 체결되도록 했다.

 

소설가의 붓끝에서 쓰여진 이야기는 원래 진실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다만, 소설은 청나라말기에 신문에 연재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진실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리고 전해지면 질수록 더욱 살이 붙는다. 개략 2,3십년전에 무슨 법사가 처음에 북경의 모 신문사에서 연재되었을 때는 개 한마리를 때려죽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문에 다시 연재되었을 때는 무슨 일본의 사무라이, 미국의 복서, 프랑스의 대역사가 모조리 그의 손아래 패하게 된다. 이것이 신문의 위력이다.

 

기실, 진정으로 신기한 힘을 가진 것은 작가의 붓이다. 민국시대, 환갑이 넘은 새금화는 북경의 전문외 거인리에 곤궁하게 살고 있었다. 한 소규모 신문사에서 이것을 알고는 즉시 그럴듯하게 글을 썼다. 다른 신문들도 속속 뒤를 따랐고, 새금화의 명성은 다시 한번 떨친다. 일부 사회명사들이 그녀를 찾아오기도 했다. 새금화 본인도 수시로 호텔 식당을 드나들었다. 조야의 귀빈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원래 먹고 입는 것도 해결하지 못했던 새금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다니. 그녀는 그저 영국부에 들어간 유모모처럼, 그녀는 남들이 듣고 싶어하는대로 이야기를 지어내서 말해주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가면갈수록 정교해지고, 가면갈수록 생동감이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경험이다: 생동감있는 이야기일수록 진실성은 의심이 든다. 그러나 생동하면 확실히 사람을 감동시킨다. 학문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는 줄은 아예 모른다: 뻥을 치고 허풍을 떠는 것이 술자리에서 트림을 하거나, 화장실에서 방귀를 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1934년초 두 명의 학자인 유반농과 상홍목이 6번이나 새금화를 인터뷰한다. 그녀 본인의 진술에 따라 <새금화전>을 펴낸다.

 

새금화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증거가 없다. 동시대의 증인들은 상단된 의견을 내놓은 적은 있다. 그는 바로 제여산(齊如山)이다.

 

제여산은 청나라말기 동문관(同文館)에서 독일어를 배운 적이 있다. 경자연간에 독일인들과 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새금화도 알았다. 유반농이 새금화의 전기를 쓰려한다는 말을 듣고, 유반농에게 그만두라고 권한 바 있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많은 이야기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광서 경자년, 신축년 1년여의 기간동안, 나는 새금화와 매일 매일 만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1주일에 최소한 한두번은 만났다. 그래서 그녀를 아주 잘안다." 제여산은 계속 말한다. "나는 새금화가 발데르세를 만난 적이 없다고 믿는다. 우연히 한 두번 만났을 수는 있겠지만, 그녀가 감히 발데르세와 국사를 얘기할 수는 없었다. 첫째, 그녀의 독일어는 우선 수준이 되지 않는다." 새금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독일어는 독일여종에게서 배웠다. 그녀는 독일에서 외교활동에 참석한 바가 없다. 왜냐하면 전족이어서, '양장'을 입을 수도 없었다. 더더구나 춤을 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리타분한 홍균 대사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독일에서 발데르세와 만났을 리가 없다. 더더구나 무슨 옛정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제여산은 이렇게 말한다. <신축조약>의 체결과정에서, 새금화가 무슨 역할을 했을 수는 없다. "당시 그녀는 그거 늙은 기생일 뿐이다. 발데르세도 좋고, 공사부인도 좋고, 어찌 이런 사람을 만나겠는가?" 제여산의 말은 이치에 맞는다. 당시 68세인 발데르세가 강렬한 성욕과 낭만의 감정을 가졌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그녀는 당당한 독일의 귀족이고, 팔국연합군의 군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인데, 어찌 늙은 기생과 사귈 수 있겠는가? 침략을 받은 중국인으로서, 어떻게 발데르세를 추화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절대로 이 정도로 자경자천(自輕自賤)하는 것은 곤란하다. 다만, 제여산의 의견을 유반농은 듣지 않는다. 새금화의 주요사적은 이렇게 하여 한번 '확인'된다.

 

역사상 많은 인물과 사건은 이런 경우를 거친다: 엄숙한 기재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오히려 기이하고 황당한 이야기나 만들어낸 이야기는 왕왕 사람들이 진실한 역사라고 믿어버린다.

 

1992년 10월 16일, <문회보> 부간에는 글 하나가 실린다: <나의 부친 유반농>. 그중 이런 말이 있다: "기억 속에 유반농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새(금화)의 서술은 다 믿을 수 없어서 사람을 실망시켰다." 반세기이후 이런 글이 있더라도, 그 영향력은 어찌 되었건 당년의 <새금화전>을 누를 수가 없다.

 

경자이후, 새금화는 여전히 기원을 열었다. 나중에 한 기녀를 학대하여 죽임으로써 소송을 당한다. 만일 신중국성립시까지 살았더라면 아마도 그녀는 사형을 받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늙은 기생이, 오늘날 일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노릇이다. 누가 말했는지는 잊었지만 이런 말이 있다: "영웅이 없는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 아니다. 그러나, 한 민족이 그저 뻥이나 치고 허풍이나 치는 늙은 기생을 영웅으로 받든다면, 그 민족은 도대체 어떤 민족인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