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초십팔후(漢初十八侯)"에 왜 장량, 진평이 빠졌을까?

중은우시 2013. 6. 11. 00:22

글: 횡도향천소(橫刀向天笑) 

 

유방이 항우를 물리친 후, "천하를 평정하고, 논공행상을 벌인다. 여러 신하들이 공을 다투어, 한 해가 지나도록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조참(曹參)의 공로가 가장 커서, 공신중 1위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령 악천추(鄂千秋)는 소하(蕭何)의 공로가 제일이라고 여겼다: 소하는 유방의 후방의 물자조달을 책임지고 양초를 공급했으며 임무를 아주 뛰어나게 완성했다; 소하는 유방이 바깥에서 전투를 벌일 때, 태자를 보좌하여 관중을 지켜냈고, 안정적인 후방대본영을 건설했다. 유방이 외부에서 계속해서 패배하더라도 안정적인 후방근거지를 확보하도록 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매번 위기를 넘기고 재기할 수 있었다. 유방의 생각은 악천추와 부합했다. 그래서 소하를 제1로 삼는다. 즉, 십팔후중 1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악천추는 큰 상을 받는다. 그를 안평후(安平侯)에 봉한 것이다.

 

한나라초기 공로의 크기에 따라 봉해진 "십팔후"는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소하, 조참, 장오(張熬), 주발(周勃), 번쾌, 역상(酈商), 해연(奚涓), 하후영, 관영, 근흡, 왕릉, 진무, 왕흡, 설구, 주창, 정복, 충달.

 

한신이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한신(韓信)은 초왕(楚王)에 봉해졌으므로 지위가 이들 보다 위이다. 그런데, 유후(留侯)에 봉해진 장량(張良)과 곡역후(曲逆侯)에 봉해진 진평(陳平)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남송때의 인물인 진식(陳埴)(주희의 제자. 별호는 잠실선생-潛室先生)의 분석에 따르면, 한나라초기에 공신을 봉할 때, 그 맹세한 말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비군공불후(非軍功不侯, 군공이 없으면 후에 봉해질 수 없다)', 군공 가운데 가장 큰 것은 3가지이다: 하나는 풍패탕(豊沛碭)에서 의거할 때이고, 둘은 관중에 들어가서 진나라를 격파한 것이고, 셋은 삼진을 평정한 것이다. 18명의 순서를 보면 모두 이것에 따라 나눈 것이다. 장량, 진평은 모두 나중에 의탁했다. 그래서 포함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장량, 진평은 모두 장막에서 모의에 참여했고, 행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벌(軍伐, 군공)이 우선시된 것이다.

 

진식의 분석의 전반부는 이치에 맞는다. 십팔후중, 모두 초기에 유방을 따른 사람이다. 풍패탕에서 거병할 때의 원로들이다. 이들은 유방부대의 중견역량이다(이 18명중 일부는 사적의 기재가 상세하지 못하다. 그리고 일부분은 당대인의 고증에 따르면, 여씨 부장이다). 그런데 장량, 진평은 중간에 유방의 대군에 참가했다. 진식은 장량, 진평은 그저 참모역할이고, 전선에서 직접 싸우지 않아서, 군공이 혁혁하지 못하고 하였는데, 그것은 편파적이다.

 

설사 유방 본인이라 하더라도, 모사와 장군은 모두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인재라고 알고 있다. 심지어 보사의 지위는 장군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유방이 소하를 공신제일로 정한 후, 여러 장군들이 승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등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많으면 맥여전을 벌이고 적으면 수십합을 거치며 공성약지했다. 크고 작은데는 차이가 있다. 지금 소하는 한마지로가 없었는데, 문묵의론만 했고, 전투를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신들보다 위에 자리한다면 그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그러자 한고조 유방이 말한다: "여러분은 사냥을 아는가?" 신하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압니다.". "사냥개를 아는가?". "압니다." "무릇 사냥이라는 것은 짐승과 토끼를 쫓아가서 잡는 것은 개이다. 그러나 짐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는 것은 사람이다. 지금 너희들은 짐승을 잡을 줄 알 뿐이다. 즉 공이 사냥개와 같다. 소하는 어디에 있는지 지시하는 사람에 해당한다. 공이 사냥꾼과 같다." 유방은 무장들을 사냥때의 사냥개에 비유하고 소하등 모사를 사냥꾼에 비유했다. 이를 보면 모사의 지위를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상 장량과 같이 혁혁한 공로를 세웠지만, 마땅히 얻어야할 봉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동한초기의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있다. 그는 큰 전공을 세웠지만, "운대이십팔장"에 들어가지 못한다(한명제는 남궁 운대에 28명의 전장의 화상을 진열했다). 명나라 개국공신 유기(유백온)은 성의백에 봉해진다. 서달등은 "살아서는 공에 봉해지고, 죽어서는 왕에 봉해진 것"과 비교하면, 작위가 확실히 많이 낮은 편이다. 이들은 공로는 높으나 작위는 낮았다.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장량, 진평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