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여인도 후(侯)의 작위를 얻은 적이 있다.

중은우시 2013. 4. 26. 23:58

글: 후홍빈(侯虹斌) 

 

여후가 권력을 농단할 때, 여러 여씨들이 분봉을 받는데, 그중에 놀랍게도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呂)도 후에 봉해졌다. 그녀는 임광후(臨光侯)가 된 것이다.

 

필자는 그녀가 최초로 후에 봉해진 여인이라고 본다. 이것은 확실히 기괴한 일이다. 제왕사상 여성의 작위는 "군(君)"도 있고, "부인(夫人)"도 있다. 그러나 "후작"에 봉해진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한고조는 여러 공신들과 함께 약속한 바 있다: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고, 공로가 없으면 후가 될 수 없다. 약속을 어기지 않으면 천하가 함께 그를 멸할 것이다." 후에 봉해질 수 있는 공을 세운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수는 도대체 어떤 공로를 세웠단 말인가?

 

여후는 확실히 맹약을 준수하지 않았다. 여수는 무양후 번쾌에게 시집을 간다. 호혜6년에 번쾌가 죽는다. 아들 번항(樊伉)은 무양후를 세습한다. 여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특별히 자신의 여동생 여수를 임광후에 봉한다. 이 임광후가 공로가 없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천성적으로 말이 많은 여자인데다 참언하는 것을 좋아했다. 진평이 한고조의 명령을 받아 번쾌를 체포하려 하자, 몇차례 여후의 앞에서 진평을 험담한다. "승상이라는 자가 일처리는 제대로 하지 않고 매일 술이나 마시며 부녀자를 희롱한다" 진평은 그 말을 듣고, 술을 더 많이 마셨다고 한다. 여후가 그 말을 듣고는 속으로 더 기뻐했다. 그녀는 여수와 진평을 대질시키기까지 한다. 진평에게 말한다."여자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마라는 말이 있다. 너는 여수가 너를 험담한다고 걱정하지 말라"

 

만일 싸우기로 한다면, 여수가 어찌 진평과 싸워서 이기겠는가. 그래도 여수는 총애를 믿고 교만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금방 전체 여씨일족이 멸문당한다.

 

필자는 일찌기 한나라때 후에 봉해진 여자는 여수 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정리하다보니, 한나라때 후에 봉해진 여자가 그녀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가장 먼저 규정을 어긴 것은 유방 자신이었다. 그는 먼저 공신의 모친을 봉한다: <한서.고혜고후문공신표제사>에 이렇게 쓰여 있다: 노후 해연이 전사하였다.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모친 저를 후로 하였다' 저씨(底氏)가 노후에 봉해지고 10년간 그 자리에 있다가 여후5년에 사망하고, 작위를 폐지한다.

 

또 다른 사람은 유방의 큰형수였다. 유방의 큰형 유백의 처를 후로 봉한 것이다. 이것도 기괴하기 그지없다. 유방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을 때, 자주 친구들을 데리고 큰형의 집으로 가서 밥을 얻어먹었다. 큰형수는 시동생이 밥을 먹으러 오는게 싫어서 일부러 죽과 국이 없는 것처럼 솥을 소리나게 긁었다. 손님들은 그것을 듣고는 미안하게 여겨서 핑계를 대어 모두 떠난다. 유방이 보니 솥안에는 먹을 것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다. 그는 아주 화가 났다. 나중에 나라를 건립한 후, 제왕, 대왕에 봉하지만 자신의 조카는 아무런 작위도 주지 않는다. 태상황이 이를 보다못해서 유방에게 말한다. 유방은 그제서야 말한다. 내가 잊은 것이 아니라 형수가 원래 형수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큰형이 아들 유신을 후로 봉한다. 그런데 봉호가 아주 조롱하는 조였다: "갱갈후(羹頡侯)"

 

그러나 유비는 그가 가장 싫어했던 형수에게 파격적으로 "음안후(陰安侯)"에 봉한다.

 

<한서>에는 형수를 음안후에 봉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위청의 아들 위불의가 음안후에 봉해진 적은 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대왕의 등극을 추천할 때, "음안후, 열후 경왕후는 낭야왕, 종실, 대신, 열후, 이이천석과 의논했다" 여기서 음안후는 확실히 위불의는 아니다. 황족의 여성어르신이다; 집해 소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조의 형의 처인 강갈후 신의 모친, 구수(丘嫂)이다" 이 큰형수가 대왕을 황제로 올리는데 공을 세웠다니 정말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또 하나 있다. 즉 상자(相者) 허부(許負)이다. 허부의 관상술은 아주 정확했다. 주발이 하내수로 있을 때, 허부는 그의 관상을 봐준다. 그리고, "당신은 3년후 후에 봉해진다"고 말한다. 동한학자 응소의 주석에 따르면 허부는 고조에 의하여 자정후(雌亭侯)에 봉해졌다. 당연히 정후는 아주 낮은 후이다. 유방이 성공하기 전의 봉호와 같다. 그러나, 어쨌든 후이다. 유방은 이렇게 가볍게 상을 내렸다. 마치 가치없는 돈을 주듯이

 

마지막으로 후에 봉해진 여인은 소하의 부인동(夫人同)이다. 소하는 나라를 세웠을 때부터 동로로 찬후가 된다. 그 아들 소록이 작위를 승계한다. 혜제6년, 소록도 죽고 아들이 없었다. 작위는 비게 된다, 여후2년, 여후는 소하부인동을 찬후로 삼는다. 그리고 소하의 어린 아들 소연을 축양후로 삼는다.

 

이 5명의 다음에 다시는 여자가 후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없다. 봉호는 있다. 예를 들어 왕황후의 모친 장아를 평원군으로 삼았다든지, 왕황후의 전남편 김씨의 딸을 유성군으로 삼았다든지, 한선제의 외조모를 박평군으로 하였다든지, 왕망의 모친을 공현군으로 하였다든지, 왕태후의 자매 왕군협을 광은군, 왕군력을 광혜군으로 삼고, 왕군제를 광시군으로 삼았다든지, 양한의 역사기록에는 여자를 군(君)에 봉한 기록은 이삼십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여성의 작위이다. 다시는 남성분야의 작위를 침탈하지 않았다.

 

이 몇 가지 특례는 모두 고조와 여후시기에 이루어졌다. 그후에는 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효문원년 소하부인동의 봉호를 끝내고 어린아들 연을 찬후로 바꾸어 봉한다. 즉, 효문제가 즉위한 후, 다시는 여자에게 후를 봉하는 일이 없었다. 그후 2쳔년간 명나라때 진량옥이 병력을 이끌고 전투한 것이 유일한 사례이다. 이것은 아마도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방대한 조정내의 예제와 법도는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건립된 것이다. 중앙집권의 제국에서, 어찌 시행착오가 없겠는가. 시행착오를 통하여 완비해 가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더욱 명확해 지는 것이고 여자들은 철저히 남자들의 뒤로 밀려나서 숨어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