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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중산왕(中山王) 유승(劉勝): 고대에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인물

by 중은우시 2013. 5. 3.

글: 유계흥(劉繼興)

 

 

 

중국고대는 장기간 봉건시대였다. 처첩이 많고 자녀가 많은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후궁가려가 무수했던 강희제는 일생동안 55명의 자녀를 가졌으며 그중 35명의 아들, 20명의 딸을 두었다.(살아남은 아들과 딸은 각각 24명, 12명이다). 자녀가 많기로 역대 황제중 최고이다. 그러나 강희제보다 생육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이 있다. 강희제도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다. 그 사람은 바로 서한시대의 중산정왕 유승이다. 정사의 기록으로 고증하면 유승은 중국고대 부끄러움이 없는 생육챔피언이다.

 

유승은 한경제 유계(劉啓)의 여덟째 아들이다. 기원전165년에 태어난다. 한경제3년(기원전154년) 중산군(中山郡)을 중산국(中山國)으로 고치고, 12살된 유승은 중산왕에 책봉된다. 중산국의 강역은 동쪽으로 탁군(涿郡)과 이웃하고, 서쪽으로 상산군(常山郡)에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거록군(巨鹿郡)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대군(代郡)에 이른다. 대체로 지금의 하북성 중서부의 역수이남, 호타하이북지역으로 관할구역은 북평현(지금의 만성현 북쪽), 당현(지금의 당현 동북), 심택(지금의 심택현), 고경(지금의 무극현 동북), 안국(지금의 안국시 동남), 곡역(지금의 순평현 동남), 망군(지금의 당현 동북), 신시(지금의 정정현 동북), 안험(지금의 정정현 동남), 노노(지금의 정주시)등 14개현이다. 노노(盧奴)를 도성(都城)으로 삼았다. 경내의 지형은 평원도 있고, 구릉도 있으며 태행산에서 발원한 조하, 당하, 대사하, 자하가 비옥한 들판을 흘러 농경으로 부유한 땅이었다. 기원후2년의 통계사료를 보면, 중산국은 주민 160,873명이고 인구는 668,080명이다. 당시 한나라초기의 봉국때, 현의 수로 따져서 3위이고, 인구수로 따져서 2위에 해당한다.

 

 

유승은 재사민첩(才思敏捷)하고 비교적 높은 문학적 소양을 갖추었다.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펼치거나, 경치를 보고 느낌을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데 능했다. 그리고 인정넘치고 풍성함으로 상대방의 이해와 지지를 끌어내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능했다.

 

유승이 중산왕에 봉해졌을 때, 한무제가 즉위한다.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칠국지란의 교훈으로, 제후왕들의 세력이 커져서 내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여 제후왕에게 대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꼬투리를 잡았고, 걸핏하면 제후왕의 잘못을 고발했다.

 

건원3년, 유승과 대왕(代王) 유등(劉登), 장사왕 유발, 제천왕 유명은 함께 장안으로 가서 동생 한무제를 만난다. 한무제는 연회를 열어 그들을 접대한다. 유승은 음악소리가 들리자 곡을 한다. 한무제가 연유를 묻자, 그는 동생에게 국상이 걸핏하면 자잘한 일을 꼬투리삼아서 참언을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조리있고, 웅장했다. 한무제는 관리들에게 다시는 제후왕을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한다. 일시에 유승은 '한지영번(漢之英藩)"이 된다.

 

기원전155년부터 기원전145년까지, 한경제는 14명의 아들은 제후왕에 봉한다. 유철이 황위를 승계한 외에 나머지 13명의 아들은 모두 봉국(封國)되니, 역사에서 말하는 "경십삼왕(景十三王)"이다. 그들은 모두 유승의 동부동모 혹은 동부이모의 형제이다. <한서권오십삼경십삼왕전제23>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승은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여, 아들이 백이십여명에 이른다." 그리고 <사기>에도 유승은 "자지백이십여인(子枝百二十餘人)"이라고 적고 있다.

 

이를 보면 유승은 정치적으로 도광양회를 아는 사람이다. 권력을 다투는 위험한 게임에 참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했다. 모든 정력을 주색에 쏟는다. 아들만 백이십여명이다. 딸을 얼마나 두었는지는 역사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분명히 수량이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상 대다수의 황족자제들이 황음과 향락에 빠졌던 것과는 달리, 하루종일 미색에 둘러싸인 유승은 주색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았다. 그는 편안하게 42년간 중산왕으로 지냈다. 기원전113년에 사망한다. 향년 52세이다. 당시로서는 장수한 셈이다. 유승의 사후 하북 만성현 능산에 묻힌다. 시호는 정(靖)이다. 그래서 역사상 중산정왕이라 칭한다. "정"의 의미는 "관락영종(寬樂令終)"이다. 이는 유승의 덕행을 찬미한 것이다.

 

유승의 아들중 20명의 아들은 각각 후(侯)에 봉해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무제 원정5년(기원전112년) 11명의 아들은 종묘에서 조상에 제사지내는데 쓰는  황금을 가짜로 바친 것으로 인하여 작위를 박탈당한다.

 

유승은 촉한황제 유비의 13대 선조이다. 우리는 유비가 처음 하는 말을 잘 기억한다: "재하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아무도 그에게 누구의 후손인지 묻지 않는데,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유비는 가장 먼저 컨셉 마케팅을 한 사람이다. 그의 이 수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는 컨셉은 졸지에 "직석판리(織席販履)"하던 그를 '황숙'으로 끌어올린다.

 

유승의 아들은 120명이다. 그리고 유비가 살던 동한말기와는 이미 수백년의 시간차이가 있다. 유비가 정말 유승의 후손인지 아닌지는 고증하기 어렵다. 설사 진짜라고 하더라도, 황족혈통은 이미 희석되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비가 어찌 한고조 유방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다. 유방의 이름이 더 대단하지 않은가? 아마도 그거은 유승의 아들이 많아서, 쉽게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섞여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유방의 후예라고 말하면 그가 황제가 되고 싶다는 것으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어, 쉽게 오해를 사고, 불필요한 골치거리를 불러올 수 있다.

 

아들이 많은 것, 그리고 마케팅고수인 유비의 선조라는 것이외에 유승은 역사상 또 하나의 유명해질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와 한 문물의 발견과 관련이 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출토된 "금루옥의(金縷玉衣)"는 바로 이 유승이 남긴 것이다.

 

유비를 안장한 하북 만성 1호묘에서는 과거의 중산정왕 및 그의 처가 남긴 두 벌의 금루옥의가 출토되었다. 유승이 옥의는 모두 2,498개의 옥편(玉片)으로 이루어졌고, 금사(金絲)의 무게는 1,100그램이다. 두관(竇綰)의 옥의는 모두 2,160개의 옥편으로 만들었고,금사의 무게는 700그램이다. 제작에 들인 인력과 물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백명이상의 장인들이 2년여의 시간을 들여 완성했다.  이 두벌의 완벽하게 보존된 금루옥의는 설계가 정교하고, 공법이 세밀하여 세상에서 얻기 힘든 에술의 보배이다. 1968년, 이 금루옥의가 출토될 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1968년 5월, 해방군의 모부대는 능산에서 시공을 했다. 거기서 의외로 이 한묘의 통도(通道)를 발견하게 된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비시(批示)를 받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및 하북성 문물공작대가 발굴한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곽말약도 현장으로 가서 고증에 참가하고 서한 중산정왕 유승의 묘라고 확정한다. 그후, 유승묘의 북쬭에서 그의 처인 두관의 묘를 발굴한다. 유승의 묘는 남쪽에 있고, 두관의 묘는 북쪽에 있다. 부부병혈합장이다. 소위 "동분이장(同墳異藏)"이다.

 

이 두 벌의 완벽한 금루옥의가 출토됨으로써, 한나라때 제후왕 귀족의 장례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아니라, 한나라때의 여금, 주조, 제옥, 칠기, 방직등 수공업과 공예미술발전상황을 연구하는데 극히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