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송자문(宋子文): 정말 세계최고부자였는가?

중은우시 2010. 4. 5. 20:07

글: 유영봉(劉永峰)

 

1949년 새해가 시작되고, 해방군의 도강전투가 막 시작되었다. 광주에 있던 송자문은 그러나 이미 사직할 생각을 굳혔다. 장개석이 '인퇴(引退)'하겠다고 발표한 다음 날, 광주 수서예당에서 거행된 사임식에서 그는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이임사로 26년에 걸친 정치생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후, 그는 홍콩, 타이페이, 파리등지를 거쳐 그해 6월, 온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간다. 이때 이전의 부와 권세로 한 세대를 풍미했던 영광은 이미 국민당의 강산과 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때부터, '난민'의 생활이 시작된다. 비로 그가 한때 깊이 사랑하던 나라에 있었지만, 당시의 미국여론은 그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송자문이 미국원조과정에서 사사로이 재산을 개인적으로 챙긴 일을 대거 보도했고, 심지어 송자문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까지 보도되었다. 이로 인하여 송자문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같았다. 사실 송자문이 세계최고부자라는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온 것이었다.

 

비록 송자문은 '양조국구(兩朝國舅, 두 누이가 손문가 장개석의 부인임)"이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오랫동안 중화민국의 재정부장의 요직을 맡았지만, 1930년대까지는 송자문의 개인재산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중반이후, 사람들은 이에 흥미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후의 역사를 뒤져보면, 그의 재산에 관한 각종 자료, 데이타, 전설이 물밀듯이 나타난다. 이 시기는 바로 송자문의 재산이 급격히 증가한 시키이다.

 

1933년 가을, 군사비문제로 장개석과 심각한 의견차이가 나타나자, 송자문은 다시 한번 국민당정부 재정부장의 직위를 사직한다. 동시에 중앙은행 총재, 행정원 원장의 요직도 사직한다. 그는 잠시 중화민국의 권력핵심에서 물러나 있었다. 정치적인 실의(失意)는 오히려 그에게 사업상의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이때, 그는 아직도 보유하고 있던 전국경제위원회 상임위원의 직함을 이용하여, 전국경제건설에 열정을 나타낸다. 송자문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경제건설계획을 추진하려면, 대량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강대한 실력을 지닌 투자집단인 중국건설은공사를 설립한다.

 

송자문의 특수한 신분을 보면 경제발전계획에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지하는 힘도 만만치 않았다. 송자문의 계획은 이러했다. 중국건설은공사는 중국과 외국의 각 재벌집단의 지금을 모은 투자회사이다. 자본금은 1억위안이고, 중국과 영미의 은행가들이 만든다. 그러나, 이 조치에 대하여 일본측에서는 강력하게 의심을 드러낸다. 일본 주남경영사는 명확히 영미등 국가의 자본이 참가하는 것에 반대한다. 일본의 방해로 영미의 은행가들은 참가를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송자문의 중국건설은공사는 중국의 자산가의 도움밖에 받지 못한다.

 

당시의 형세하에서, 자연히 이런 국면이 조성된다: 송자문의 움직임은 자연히 일본과 친일파의 불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송자문의 경제행위는 계속하여 상대방의 이익에 타격을 가했다.

 

중국건설은공사가 성립된 후, 송자문은 비록 중국의 '모건'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는 이것이 허명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경제영역에서 계속 호풍환우하려면, 절대로 대재벌의 지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당시 중국금융계의 배경을 보자면, 중국은행이 가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은행은 청왕조의 '국가은행'인 대청은행이 개조된 것이다. 비록 상업은행으로 바뀌었지만, 그 지위와 실력은 여전했다. 시종 사실상의 '중앙은행'이었다. 역사적인 연원으로 중국은행은 북양계가 장악했고, 역대 총재는 모두 친일파의 인물이었다. 중국은행의 영혼인물인 부총재 장가오를 예로 들면, 그는 송자문이 미국문화에 열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문화에 열중했고, 일본의 실력을 맹신했다. 심지어 그는 평시에 화복(和服)을 입고, 게다를 신었으며,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였다. 완전한 일본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구미파와는 사이가 나빴다. 그리하여 중국건설은공사가 설립된 후, 중국은행은 금방 조치를 취하여 '경이원지(敬而遠之)'의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송자문은 중국은행을 아주 미워했다.

 

그리하여, 1935년,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등이 한구에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중국은행에 대한 개조계획을 통과시킨다. 이 계획의 기밀유지는 아주 잘되었다. 사전에 장가오가 알지 못하게 하고, 왕정위, 장군, 황부등의 친일파거두들도 모르게 해였다. 행정원장을 맡고 있던 왕정위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든 문건이 이미 완성된 후였다. 이것은 친일파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장가오가 '눈물을 흘리고' 통심질수하고 있을 때, 송자문은 기세등등하게 중국은행 동사장의 직무를 맡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실력이 강대한 금융기관의 실력을 바탕으로, 송자문은 마침내 중국정계, 공상실업계, 금융계에서 모두 존경하는 중국의 '모건'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송자문은 자신이 장악한 경제위원회, 중국건설은공사, 중국은행의 3대도구를 통하여, 계속 민족공상업, 금융업에 침투하고, 지배하고 합병하는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송씨가족을 핵심으로 하는 관료매판집단과 트러스트왕국을 건설한다. 이를 통하여 송씨는 신속히 부를 축적한다.

 

송자문이 경제건설계획과 개인재산추구의 측면에서 잘 나가고 있을 때, 영미파의 영수라는 배경과 대일강경파의 대표인물이라는 명성으로 인하여, 일본측과 국내친일파로부터 적대시당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개성에 있어서 재주를 믿고 오만하며, 일처리는 서방자유주의자와 같은 송자문을 심지어 그들의 최대적수인 장개석보다 더 싫어하게 된다.

 

이리하여 일본 및 왕정위 일파의 반격으로, 송자문의 재산이나 그가 미친듯이 재산을 긁어모은다는 소문이 줄을 잇는다. 예를 들어, 1939년, 일본간첩이 국민당정부의 고급관리의 예금상황에 대한 비밀조사보고서라는 것에는 송자문 1사람만 5000여만위안의 재산을 상해의 외국은행에 예금해두었다고 실었다. 그리고 전쟁기간동안, 일본은 송자문이 대통국민은행과 뉴욕의 시티은행에 7000만달러의 예금을 해놓았다고 지적했다. 이와 동시에, 송자문은 세게최고부자라는 소문이 소리없이 퍼져갔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런 정보는 모두 전시에 일본의 정치선전수단의 하나로 밝혀졌고, 당시 인용된 작자도 그다지 믿고 있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송자문의 재산에 대한 소문은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송자문이 당시 경제건설에서 종횡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금융계에서 호풍환우하였으며, 그의 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널리 퍼져갔다.

 

두터운 금융자본을 가지고, 송자문은 경제분야에서 확장하는 것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쉬웠따. 광동은행을 예로 들자면, 남방에서 광동은행은 영향이 큰 화교자금계 은행이다. 1935년 가을, 채무가 많아서 위기에 처하자, 송자문은 자신의 권력과 영향을 이용하여, 자금을 투입하여 개조한다. 그는 20만주를 매입하여, 비록 최대주주는 아니지만, 아무도 그와 감히 싸우려고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개조후의 동사장은 모든 사람의 만장일치로 송자문이 맡는다. 총경리는 송자문이 그의 심복에게 넘긴다. 이때부터 광동은행은 송씨가족의 개인전장으로 바뀐다.

 

남양형제연초공사를 보면, 원래 중국최대의 담배회사였다. 회사사장인 간씨형제는 '연초대왕'으로 불리웠다. 30년대에 경영과 재무에서 사면초가의 처지에 처한다. 이때 송자문은 겨우 70만원의 댓가로 이 회사의 52%지분을 취득한다. 그리고 70만원도 광동은행이 대신 납부한다. 송자문은 한푼도 내지 않고 남영형제를 자신의 산하에 넣어버린다.

 

이외에도, 송자문은 신화은행, 중국국화은행, 중국보험공사, 상해은행등에 모두 투자를 한다. 송자문은 공업에 투자도 적지 않게 하였다. 일부분 금융기관을 보유한 후, 그는 은행의 자금으로 공장, 광산과 철로건설에 투자했다. 중국건설은공사가 몇몇 철로와 공장 광산에 투자한 외에, 송씨집안은 사천사업공사, 진화조지공장, 민생공사, 화풍화기방직포공장, 대중화화시공사, 화풍화기면분공장, 중화서국등 공업,광업기업에 일정한 지분을 보유한다. 송자문과 송자량은 이들 기업의 동사장 혹은 동사를 맡는다. 서북섬서,감숙 두 곳의 십여개의 방직,면분,제약,인쇄,양조,석탄채굴,성냥등 공장도 송씨가족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상업분야에서도 송자문은 아주 활발했다. 그가 친히 경영하는 중국면업공사는 몇 달만에 자본이 배로 뛴다; 화남미업공사는 독점적으로 '외국쌀'의 수입업무를 수행하여, 이윤이 엄청났다. 항전후 상해에 부중무역공사, 중국수출입무역공사, 통일무역공사,금천무역공사,이태공사등을 설립하여, 물자부족,물가상승을 틈타서 큰 돈을 번다.

 

경제분야에서 이처럼 활약이 크니, 그의 재산에 대하여 당연히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시 글을 보면, "송씨의 경제활동은 위에 언급한 7개은행, 12개 유통회사, 22개 큰 공장, 1개의 운수회사이다. 주식은 모두 얼마일까? 송자문 자신도 재산숫자를 몰랐을 것이다." 또 다른 글에서는 "그당시 독자적으로 6억원을 보유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의 재산을 폭로하는 것으로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사대가족'에 대한 고발이다. 1946년, 진백달은 <<중국사대가족>>이라는 책에서 "사대가족은 혹은 '관'식으로 혹은 '상'식으로, 금융, 상업, 공업, 지산의 여러 분야에서 독점하고 있는 재산 및 그들이 외궁에 가진 예금과 사업은 개략 통계를 내보면 최소한 200억달러가량이다."

 

정말 이러한 숫자라면, 사대가족중 어느 한 명만 하더라도 세계최고부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사료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는 3개의 국가독점자본집단이 있었다. "4행2국(중앙은행,중국은행,교통은행,중국농업은행,중국신탁국 및 우정저금회업국)", 자원위윈회 및 중국방직건설공사의 자신이다. 합계는 겨우 62,972억원이었다. 1947년의 환율로 계산하면, 100억달러에 미치지 못한다. 만일 당시 국민정부가 관할하는 모든 자산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200억달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를 보면, 위에서 얘기한 "4대가족"의 재산이란 단순히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진입부,진과부의 5명의 개인재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당 및 국민당정부 통치하의 '국가독점자본'의 재산을 의미한다고 ㅎㄹ 것이다. 단순히, 송자문만을 본다면, 비록 그가 장악한 공상금융기관이 많지만, 전부 점유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 투자하거나 요직을 맡고 있을 뿐이다. 그의 개인재산은 이들 기업의 총자산보다 적을 수밖에 없고, 개략 1000만달러 정도일 것이다. 송자문이 정계에 있을 때, 국가은행 혹은 재정부에서 투자하여 설립한 기업은 송자문의 개인재산으로 볼 수가 없다. 미국학자 대홍초(戴洪超, Tai Hung-Chao)가 말한 것처럼; "그가 오랫동안 회사의 중요요직을 겸직하였고, 공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의심을 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송자문은 비록 재산이 엄청나지만 소문에서처럼 억만부호는 아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당시 관료자본의 제도하에서, 그가 재물을 취득한 경로는 정치특권을 이용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고, 권력을 가지고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진백달의 <<중국사대가족>>에서는 혁명의 언어로 이렇게 선언하게 된다: "모든 다툼이 없는 사실이 증명한다. 사대가족은 우리 중국이라는 이 국가를 훔쳐서 그들의 개인재산으로 했다. '국가' 혹은 '정부'의 명의로 무정하게 인민의 모든 것을 약탈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은 흡혈로 생활하는 최고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인민에게 봉건매판의 피비린내나는 약탈을 자행했고, 무수한 중국인들은 그 약탈로 인하여 가파인망(家破人亡), 전패유리(顚沛流離), 기아사망(飢餓死亡)하고, 죽어서 묻힐 곳도 없게 되었다.

 

이런 제도하에서, 대소관료가 수중의 특권을 이용하여 각종 명의로 '국난재'를 벌거나, 밀수하거나, 공용재산을 횡령하거나, 민간기업에서 뜯어내거나, 부패하거나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개인재산의 확장을 꾀하게 된다. 이것은 혁명자들이 송자문의 재산을 가지고 크게 선전한 이유이다. 격렬한 정치선전하에서는 재산의 규모는 무한히 과장되기 마련이다.

 

사실, 반대자들만이 그들의 재산을 공격한 것은 아니다. 국민당정부통치후기에는 모든 사람이 송자문에 불만을 가진다. 당시, 전체 국가의 경제는 이미 붕괴지경에 이르렀다. 통화팽창, 물가상승, 재정적자는 놀랄 정도이다. 공상업이 속속 도산한다. 송자문의 일련의 조치는 위기국면을 해결해주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형세를 악화시켰다. 그리하여 거국적인 불만의 목소리 속에서, 행정원의 수장이고 경제를 전면적으로 책임진 송자문은 죄악의 수괴가 되어버린다. 이뿐이 아니다. 경제의 붕괴와 함께 군사적으로 패퇴하고, 관료가 부패하고, 정권이 위기에 처한다. 이에 대한 모든 불만은 송자문에게 향하게 된다.

 

사대가족중에서 진씨형제를 예로 들면, 진씨형제는 재정금융대권을 오랫동안 노려왔다. 그러나 송자문이 재정경제대권을 꽉쥐고 있어서, 그들은 전혀 끼어들 수가 없었다. 송자문이 재정관리에 실패하자, 그들이 송자문을 타도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여론의 힘을 이용하여, 계속 송자문의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송자문을 때리는 보도가 연일 지속된다.

 

부사년을 예로 들면, 1947년 2월, 부사년의 반달동안 연속하여 <<이런 송자문은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송자문의 실패>>, <<호문자본(豪門資本)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등 세편의 글을 써서 송자문이 권력을 이용하여 재물을 빼앗고, 그 화를 국가와 민족에 미쳤으며, 국가의 거액의 재부를 개인의 것으로 만들었고, 철저히 중국경제를 파괴했으며, 전국의 재부를 개인이 끌어모으고 국외로 유출시켰다고 공격했다.

 

당시 여론에서 송자문의 재산에 대하여 어느 정도 소문이 있었는지는 아래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이 송씨가족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면, 광명한 앞날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억이상의 달러를 워싱턴, 런던과 암스테르담등 각지은행의 개인구좌에 예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49년 5월,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결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49명의 입법위원은 연명으로 임시긴급동의를 내어, 송자문, 공상희, 장가오의 3 호문에서 10억달러를 징용하여 국군의 군비로 써야 한다고 요규했다. 이런 생각은 전체 출석위원의 찬성으로 통과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송자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떠나버리는 것이다. 1949년 5월 16일, 송자문은 부인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홍콩을 떠나, 파리로 간다. 떠나기 전에 그는 기자들에게 말한다: "그런 건의는 그들의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현재 중국정부와 개인이 미국에 예금한 외화자금총액이 5억달러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와 공, 장의 두 집안으로 하여금 10억달러를 내놓으라는 것인데, 이는 포풍착영이 아닐 수 없다." 송미령이 억울해한 것처럼, "그들은 나의 오빠를 속죄양으로 삼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