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당사문원
심취(沈醉), 서원거(徐元擧) 및 주양호(周養浩) 세 사람은 국민당 군통국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간부들이다. 그들의 직무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하며 모두 대립(戴笠)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군통 '삼검객'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걷는다.
"군통노인" 심취
심취는 호남 상담 사람이다. 그는 18세때 군통의 전신인 부흥사특무처(復興社特務處)에 들어간다. 28세때 소장으로 계급이 오르고, 특무의 우두머리인 대립의 신임을 받았다. 군통국에서 나이는 어리나 경력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심취는 군통국본부 총무처 처장, 국방부 주운남구 전원(專員) 겸 보밀국 운남참 참장, 국방부 운남 전원공서 주임, 유격사령관등의 직을 지냈다. 1949년 12월 9일 노한(盧漢)에 체포되고, 운남의거에 참가한다. 나중에 노한을 도와 곤명의 대다수 특무를 체포하는데 협조한다. 1960년 11월 28일 인민정부의 특사를 받고 나중에 전국정협 문사자료위원회 문사전원이 된다.
심취등이 특사를 받은 후, 주은래가 연회를 열어서 초청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주은래가 심취에게 말한다: "공산당인은 개인은원을 따지지 않는다. 여러분들을 특사한 것은 당과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후 인민에게 유익한 일을 하기 바란다." 심취의 후반생은 주은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생활을 특별히 아꼈고, 열심히 독서하고 창작했다. 그리고 냉정하고 예리한 필치로 자신을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후인들을 교육했다. 그동안 심취는 <해방전 군통의 운남에서의 활동>, <항전 전군통특무의 상해에서의 죄악활동>, <내가 아는 대립>, <중미합작소내막>, <애국장군 노한>, <나의 이 삼십년>등 저작이 있고, 독자들로부터 널리 호평을 받았다.
1980년, 유관부서에서 조사를 거쳐 확인한다. 심취는 노한의 의거전통에 서명을 했고, 의거방송을 발표했고, 친필로 명령을 반포했으며, 부하특무조직에 특무기자재를 제출하고 지정한 장소로 소집했다. 당의 정책에 따라, 심취의 신분은 전범에서 의거장군으로 고쳐진다. 그리하여 부부장(차관)급의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연속하여 제5,6,7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임된다.
1980년말, 심취는 대륙에 남아있는 유일한 딸인 심미연(沈美娟)을 데리고 홍콩에 친척방문을 갔을 때, 해협양안이 주목하는 한 가지 일을 한다. 심취는 미국, 카나다 및 홍콩 마카오등지에 친구와 친지와 학생들이 있었는데, 모두 그에게 남아서 만년을 즐기라고 권했다. 심취는 그들에게 말한다: "대륙의 물질생활은 좀 못하다. 그러나 나는 돈때문에 오지 않았다. 내 모친은 생전에 나에게 말했다: 한 사람이 관리가 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륙에는 나는 진정으로 인생의 도리를 깨달았다.' 그는 친구들에게 대륙으로 돌아와서 대륙의 변화를 보라고 권한다. "국가의 분열은 우리 세대가 만든 것이다. 우리 세대에서 끝을 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후대에 면목이 선다. 죽어서 조상을 뵐 면목이 있다. 우리가 과거에 걸었던 길은 서로 달랐지만, 오늘부터,한 사람이 백세에 좋은 이름을 남기느냐, 만년의 악명을 남기느냐는 통일조국을 위하여 힘을 썼느냐 아니냐로 결정될 것이다."
심취의 만년 가정생활은 행복했다. 국민당은 심취가 일찌감치 '살신성인'했다고 선전했기 때문에, 그의 대만으로 간 전처 속연평(粟燕萍) 여사는 생계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개가했다. 1965년 봄, 아는 사람의 소개로 심취는 그보다 10살이 어린 두설결(杜雪潔)과 결혼한다. 결혼후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두설결은 심취를 잘 보살폈다 매일 아침과 저녁, 그녀는 심취와 함께 월단공원과 대교 아래를 산보했고, 남편이 신문간행물과 편지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심취는 관심병을 앓고 있었는데, 두설결은 나무판에다가 의사가 당부한 내용을 적었다. "관심병환자는 휴식을 많이 하고,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매번 손님을 만나는 것은 15분이 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연속으로 사람을 만나서는 안됩니다. 친구들은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심취는 현숙한 부인을 깊이 사랑했다. 그가 외출하여 회의에 참가하거나 참관을 할 때면 세심하게 부인을 위하여 옷감이나 선물을 가져다 주곤 했으며, 한번도 잊지 않았다.
1996년 3월 18일, 심취는 병으로 북경에서 사망한다. 향년 82세이다.
"서남홍인" 서원거
서원거는 1914년에 호북성 대야현에서 태어났다. 황포군관학교를 제7기로 졸업한다. 1932년 특무조직에 가담하고, 1935년에 "호송판첸전사행서"의 소령참모가 된다. 그후 티벳에서 정보활동을 전개한다. 1945년 6월 대립이 군통국 제3처 부처장으로 발탁하고, 1946년 1월 화북으로 가서 군통국 북방구 구장이 된다. 7월에는 중경 수정공서 2처 처장이 된다. 그는 미친 듯이 학생운동을 진압했고, 중공의 중경지하시위기관보 <정진보>를 파괴하는 계획을 세웠다. 서원거가 친히 주재하여, 지하당원 130여명을 체포한다. 그중 절대다수는 살해당한다. 서원거는 이로 인하여 4등운휘훈장을 받는다. 그리고 보밀국 서남특구 구장으로 임명된다. 사천, 서강, 운남, 귀주의 4개성의 보밀국이 장악한 모든 공개되거나 비밀인 단위 그리고 각지의 경찰국, 수사처, 도로운수부서의 경무처, 경무조. 병기공장의 경찰조사조등 40여개의 기구도 통일적으로 지휘했다. 나중에 중경수정공서는 서남군정장관공서로 승격된다. 서원거는 장관공서 2처 처장이 된다. 당시 서남군정장관은 장군(張群)이었다. 장군은 일찌기 서원거를 알았고, 그를 특별히 아꼈다. 그래서 서원거는 더욱 잘나간다. 당시 국민당 군정계에서는 모두 서원거를 "반격강산. 서남홍인"이라고 불렀다.
1949년 9월에서 11월까지, 서원거는 중경에서 일련의 대도살, 대파괴계획을 기획한다. 12월 곤명에서 운남 노한의거부대에 체포된다. 나중에 전범으로 중경 백공관으로 보내어져 감금당한다. 1956년 북경 공덕림전법관리소로 옮긴다. 개조를 거쳐, 서원거는 자신의 죄행이 엄중했음을 인식하고 공안부서에 표시한다. 자신의 문제를 '절대로 유보하지 않고, 절대로 덧붙이거나 빼지 않고, 사실 그대로 말하겠다" 나중에 감옥에서 구금인원들로 하여금 국민당의 역사자료를 쓰게 했을 때, 서원거가 가장 열심히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아는 내용은 모조리 썼고, 자신의 문제를 절대로 회피하는 법이 없었다. 건국10주년 경축시기에 두율명, 송희렴등 33명의 전범이 특사된다. 서원거는 언젠가 석방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의 차례는 오지 않았다.
문혁이 발발한 후, 수감중인 전범에 대한 특사를 정지한다. 이미 특사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다시 감옥에 갇혔다. 서원거는 절망한다. "사인방"은 일부 노간부를 숙청하기 위하여,도처에 사람을 핍박하여 자료를 쓰게 만든다. 그러나 서원거는 욕을 먹고 매를 맞을 지언정 함부로 사람을 공격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 심취의 회고에 따르면, "사인방은 진성감옥의 한 동을 비우고, 당과 인민에 충성하는 혁명노간부들을 구금하기 위하여, 황유와 많은 군장(軍長)급 전범을 모조리 여순의 전 일본전쟁포로관리소로 보내어 군통과 중통등 10여명의 특무업무를 한 사람은 남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료를 쓰게 하여 반대파를 공격할 구실을 찾으려 한다. 서원거는 이에 분노한다. 이것은 공산당의 전통이나 광명정대한 기풍에 어긋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73년 겨울, 서원거는 노동기간동안 일을 잘 못하여 비판을 받는다. 성격이 급한 서원거는 흥분하여 소란을 부린다. 그날 저녁에 다시 냉수로 목욕을 한다. 원래 그는 고혈압이 있었으므로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쓰러져 버린다. 나중에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혈관파열로 사망한다.
"서생살수" 주양호
주양호는 절강성 강산현 사람이다. 대립 및 모인봉과 동향이다. 1933년, 대립이 소개하고, 당종이 감독하여 상해법학원 법학과를 졸업한 주양호는 부흥사특무처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체포될 때까지, 주양호는 국민당에서 16년간 특무로 일한다. 그는 식봉감옥 주임, 중경위수사령부 보방처 처장, 보밀국 서남특구 부구장등의 직을 지낸다. 주양호는 행동거지가 우아하나 마음은 악독했다. 군통내부의 유명한 '서생살수'이다. 그는 친히 애국장군 양호성을 암살하는 행동을 지휘한다. 1949년 국민당이 서남에서 대철수할 때, 주양호는 특무우두머리 모인봉의 명령을 받아, 중경, 성도, 곤명등지에서 대파괴와 대도살을 감행한다. 나중에 곤명에서 체포된다.
해방후 주양호는 백공관에서 감금되어 있는 기간동안, 심취, 서인거 등과 같은 방에 있었다. 심취가 자신의 문제를 자백할 때 주양호를 언급한 적이 있어서, 주양호는 심취가 자신을 팔아버린 것으로 의심하여 그는 화가 난 나머지 살의까지 품는다. 그래서 곁에 있던 의자로 심취의 머리를 내려친다. 다행히 곁에 있던 송희렴이 팔로 막아서, 심취를 죽이지는 못했다. 주양호가 두번째로 때리려 할 때, 의자는 이미 송희렴이 빼앗아갔다. 그후 주양호와 심취는 서로 원수지간이 되고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일부러 피했고, 그런 사람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1975년 3월 20일, 중공중앙 통전부와 공안부는 연합하여 <특사석방인원의 안치에 관한 의견>을 하달하는데, 그중 제6조에는 "대만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중앙통전부, 공안부에 보고하여 처리한다." 그 때 공안부 부장이던 화국봉은 세상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대만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대만으로 갈 수 있다. 교통비도 주고 편리도 제공하겠다. 간 후에 돌아오기를 원하면 우리는 역시 환영한다." 이 정신에 따라, 주양호는 다른 몇몇 특사인원과 함께, 대만으로 가겠다고 신청한다. 그러나 대만측이 그들의 입경을 거절하여, 주양호등은 홍콩에 체류한다. 몇개월후 주양호는 미국으로 가서 정착한다. 1990년 미국에서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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