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사마착(司馬錯): 진나라 천하통일의 최대공신

by 중은우시 2013. 6. 10.

작자: 일명(佚名) 

 

기원전316년, 상앙(商鞅) 변법이후 20여년이 지난 진나라는 동쪽으로 갈 것인가, 서쪽으로 갈 것인가의 전략적 방침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간다는 것은 전략핵심지역으로 들어가 전략중심요지를 탈취한다는 것이고; 서쪽으로 간다는 것은 풍부한 자원을 취득하여, 강국으로서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것이다.

 

귀곡자(鬼谷子)의 제자인 장의(張儀)는 동쪽으로 갈 것을 주장했다; 한나라를 타격하고, 초나라와 위나라를 약화시키며 전략중심지역인 주왕조(周王朝)를 통제해야한다는 것이다. 진나라가 우두머리가 되려면,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으로 발전해야 하고, 천하의 전략요충지 제고점(制高點)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의가 내세운 말은 "쟁명자어조(爭名者於朝), 쟁리자어시(爭利者於市)". 즉 '이름'을 다투는 자는 조정으로, '이익'을 다투는 자는 시장으로 간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명리'를 다투려면 명리가 집중된 곳, 즉 주왕실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이는 '쟁명리(爭名利)'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착은 동쪽으로 가는데 반대한다. 그는 서쪽으로 갈 것을 주장한다. 그는 3가지 이유를 들어 서진의 필연성을 얘기한다: 나라가 우유해지려면 반드시 광활한 토지자원이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 나라가 강대해지려면, 반드시 충분한 국민의 재물로 군사력을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만일 왕업을 이루려면 반드시 건전하고 우량한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사마착은 더 나아가 서진의 타당성까지 분석했다. 파촉은 지역이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하며, 인구는 희소하다. 그러나, 관리가 혼란스럽고, 역량이 약소하여 군사적으로 정복하기 쉽다. 싸우게 되면 시랑이 양떼를 모는 것과 같이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정복할 수 있다. 투입은 적고 수익은 크다. 그러면 영토는 크게 증가되고, 재물도 바로 크게 증가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리스크가 적다는 것이다. 이 토지는 동쪽으로 육국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서벽지국(西僻之國)'이다. 이 땅을 공격해서 차지하더라도 제후들간에 큰 분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수익성이 좋은 땅을 차지하는데 아무런 리스크도 없고, 큰 댓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현재의 용어로 말하자면, '저가'로 서부를 M&A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경쟁이 치열한 동부제후국으로 진출하려면 한나라를 침략하고, 주천자를 납치했다는 악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고, 도덕적인 압박이 클 것이다. 동방제후의 게임규칙은 이미 성숙되어 있고, 도의는 왕왕 이익과 같이 엮여 있어서, 도의를 잃으면 이익을 잃는 것이 된다. 그래서 동진은 리스크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수익은 낮은 방안이다.

 

비교한 후에, 진혜왕은 서진을 선택한다. 그해 십월 출병하여 서촉을 정벌한다. 서촉은 진나라의 물자조달기지가 된 것이다. 진나라는 더욱 "강부후(强富厚)"의 국가로 되었다. 이때부터는 동방의 제후국들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사마착이 내놓은 "강부후" 전략이다.

 

포스트상앙시대에 진나라는 선진적인 체제를 갖추었지만, 만일 사마착의 '서진'전략이 없었더라면, 충분한 자원을 조달받아 지방강국으로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장의의 말을 듣고 모험적으로 동방진출을 꾀했더라면 아마도 피비린내나는 길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몇년 후에 나타난 것이 진시황이 아니라, 제시황, 초시황이 될 수도 있었다...이 각도에서 보자면 사마착의 공로는 상앙보다 절대 아래라고 볼 수 없다.

 

전략요지는 반드시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 아닐 수 있다. 어떤 때는 주변화된 지역일 수도 있다. 그들은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순도가 높고, 투입은 적으며 수확은 크다. 리스크는 적으면서 자신을 배양할 수 있는 전략적인 장점이 있고, 강대하게 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