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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이신(李信)의 경적(輕敵)이 패전의 원인인가?

by 중은우시 2012. 10. 5.

작자: 미상

 

사서에 기록된 이신(李信)의 연나라공격과 초나라공격의 시간순서는 약간 혼란스럽다. 이신은 한나라의 비장군 이광의 조상이다. 그의 평생사적은 정사에 그다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사기.왕전백기열전>에 몇 마디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이신은 총사령관으로서 병력을 이끈 경력이 다음과 같다: 진왕영정21년, 이신은 선발부대를 이끌고 역수의 가에 도착하여, 경기를 몰고 돌진하여 연나라의 태자단을 대패시킨다. 태자단은 계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굳게 지킬 수밖에 없게 된다. 얼마후 왕전이 대군을 이끌고 도착하여 연나라의 수도 계성을 공격한다. 연왕과 태자단은 요동으로 물러나서 지킨다. 이신은 계속 뒤를 쫓아가서 연왕희가 태자단의 머리를 잘라 진나라에 바치고 속죄하게 만든다. 진나라의 공세는 잠시 중단되고, 연나라의 멸망시기는 약간 늦추어진다. 기원전222년이 되어서야 멸망한다.

 

그후, 이신은 진왕 영정에 의해 북방전장에서 남방전장으로 옮겨 초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진왕 영정은 일찌기 이신에게 물은 바 있다. 만일 그가 총사령관이 된다면 초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얼마의 군대가 필요한지를. 이신은 20만이면 족하다고 말한다. 영정은 같은 문제를 노장 왕전에게도 물어본다. 왕전은 "60만이 아니면 안됩니다."라고 말한다. 진왕 영정은 탄식하며 말한다: "왕장군은 늙었구려. 왜 겁을 냅니까. 이장군은 과연 용맹하고 젊다. 그의 말이 맞다." 그래서 이신과 몽무에게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왕전은 진왕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자,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말년을 보낸다. 그런데, 젊은 이신은 초나라의 명장 항연에게 패배당한다. 두 개의 보루가 함락당하고, 7명의 도위가 전사한다. 진나라병사는 패배하여 도주하였으며 사상자가 무수히 나왔다. 진제국의 통일전쟁은 여기서 큰 타격을 입는다. 형세가 심각하자, 진왕 영정은 어쩔 수 없이 노장 왕전을 다시 모셔내온다. 거의 전국의 정예병 전부인 60만을 그에게 준다. 왕전은 중임을 받아 결국 초나라를 무너뜨린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신은 기원전226년 연나라를 공격한 것이 앞이고, 남으로 이동되어 초나라를 공격한 것이 후이다. 만일 월나라의 청동검을 이신이 초나라의 수중에서 빼앗은 것이라면, 그가 나중에 요동으로 어떻게 가져간단 말인가. 설마 요녕으로 다시 한번 군대를 이끌고 갔단 말인가? 사실이 그러했다. <백기.왕전열전>에는 왕전이 남하하여 백월을 평정한 후, 곧이어 이렇게 보충한다: "왕전의 아들 왕분이 이신과 연, 제나라 땅을 평정했다." 즉, 이신은 항연에게 패배당한 후, 다시 진왕 영정에 의하여 다시 북방전선으로 보내어지고, 왕분과 함께 제나라와 연나라의 잔여세력을 소멸시킨 것이다. 이 시간표대로라면, 월나라의 청동검이 요녕에 나타난 것도 설명이 된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만즌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신은 적을 가볍게 보고 함부로 싸웠다가 진나라군대를 참패하게 만들어 나라를 욕되게 하였는데, 진왕 영정은 어찌 그에게 다시 군대를 이끌게 하였을까? 이신이 병력을 이끈 것이 공로를 세워서 잘못을 속죄하라는 것이라면 그가 초나라장수 항연에 대패한 것이 이렇게 그냥 해소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진나라는 법치국가였다. 엄격한 법집행과 신상필벌을 강조했고, 법집행은 각박했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시기심이 많은 진왕 영정이 어찌 자신의 앞에서 큰소리치고도 일을 망쳐버린 이신을 살려준단 말인가? 그에게 '기군지죄'를 묻지 않았단 말인가?

 

이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보면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이신의 패배를 기록한 사실기록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혹은 객관적으로 이신이 패배한 원인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부분만 강조한 것이다. 일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자들은 <사기>를 문학작품에 가깝게 보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처럼 엄격한 사학저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기.왕전백기열전>은 이신의 패배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신이 평여를 공격하고, 몽염이 침을 공격하여 형군(초군)을 대파한다. 이신은 다시 언영을 공격하여 격하한다. 다시 병력을 서쪽으로 끌고와서 몽염과 성부에서 만난다. 형나라사람들이 따라오면서 심일낮 삼일밤을 쉬지 않고 이신의 군대를 대파한다. 두 개의 보루를 치고 들어오고 7명의 도위를 죽인다. 진나라군대가 패주한다."

 

사마천이 쓴 이 문자는 글로만 봐서는 오리무중이다. 당시의 언영은 이미 진나라의 땅이었다. 이신이 어찌 병력을 이끌고 자신의 영토에서 싸움을 벌인단 말인가? 사마천은 "초나라사람들이 따라오면서"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신이 이미 주전쟁터를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패하여 도망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군이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진나라군대가 연전연승을 거두었는데, 어찌 초나라군대에 쫓긴단 말인가? 당시에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이 열전의 앞뒤 글을 종합해보면, 독자들은 이런 착각을 갖기 쉽다: 진왕 영정은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여 실제현실을 돌보지 않았다. 이신도 나이가 젊어서 적을 가볍게 보고 함부로 행동했다. 그래서 대패하게 된 것이다. 사마천의 이런 문장은 사료에 대한 취사선택이며, 당시의 진실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다. 실제로 이신이 패배한데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이신은 왜 패배했는가? 사학자인 전여경 선생이 깊이있게 연구한 바 있다. 그가 얻은 결론은 어러하다. 이신과 몽무가 이끈 진나라군대가 영진(郢陳)부와 동남부에서 초나라군대를 대파했고, 그 기세를 틈타서 초나라의 수도인 수춘으로 치고들어가서 일거에 초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영진에 있던 창평군(昌平君)이 돌연 진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는 점령지역 백성들의 적극적이 옹호를 받아 순조롭게 영진을 점령한다. 그리하여 이신군의 후방보급로를 차단한다. 전방에서 초나라를 공격하던 진나라군대는 졸지에 앞뒤로 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신의 대군은 보급로가 끊기면서 부득이 회군하게 된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그 날카로운 기운을 피하고, 그들의 돌아가려고 생각하는 것을 쳐라." 초나라장수 항연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군을 이끌고 그의 뒤를 쫓아서 진나라군대를 대파한다. 1975년, 호북 운몽현의 고고발굴에서 두 통의 진나라사병의 서간이 발견된다. 이는 이번 창평군의 반란을 증명한다.

 

창평군은 왜 반란을 일으켜, 항연을 도와주었는가? 그는 초왕 부추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진나라의 상국(相國)을 지냈고, 진나라에서 고관대작으로 후한 녹을 받았지만, 그는 몸은 진나라에 있지만 마음을 초나라에 있었다. 고국이 위기에 처하자 창평군은 자신이 초나라의 자제이므로 분연히 일어서야 하고, 그대로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진왕 영정 22년 영진에서 반기를 든다. 영진부근의 원래 초나라백성들과 원래 한나라 백성들은 속속 그를 따른다. 창평군과 항연은 손을 밥고 초나라의 옛 수도 영진을 중심으로 한 실지를 회복한다. 그리고 이 기세를 틈타 서쪽으로 진격하여 원 한나라의 경내로 들어간다. 진왕은 놀랐다. 부득이 왕전을 다시 기용하게 된다. 나중에 창평군은 전투에서 불리하여 강남으로 패퇴한다. 초왕 부추5년, 진나라군대는 초나라의 수도 수춘을 점령한다. 부추는 포로로 잡힌다. 창평군은 회남에서 초왕에 옹립된다. 수도는 난릉으로 정하고, 장강을 담장삼아, 오월의 땅을 점거한다. 진ㄴ라군대의 몽무가 공격해 들오오자, 창평군은 패배하여 자살하고, 초나라는 멸망한다.

 

이렇게 보면, 이신이 초나라공격에 실패한 것은 주요 원인이 창평군의 반란이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진나라 초나라 양군의 승부결과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자세한 것까지 잘 살피는 진왕 영정은 이를 잘 알았다. 패배의 주요책임이 이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마천이 얘기한 것처럼 이신이 큰소리를 쳐서 진왕을 속인 것도 아니다. 이는 진왕 영정이 적을 가볍게 보고 함부로 공격하게 하였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진왕영정은 이신을 여전히 신뢰한 것이다. 단지 그는 항연에게 이미 한번 패배하였으므로 그와 다시 싸우는 것에는 거리낌이 있을 것으로 보아 북방전선으로 옮겨준 것이다. 이것은 장수를 보호하고 아끼는 행동이다. 이는 진왕영정이 사람을 잘 쓴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국관이 좋은 영명한 제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