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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진국명장(秦國名將) 이신(李信) (III): 평가문제

by 중은우시 2012. 9. 21.

글: 황각홍(黃覺弘)

 

이신은 그의 4대손인 한나라의 유명한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과 비교해볼 때, 역사상 이신에 대한 평가는 확실히 지나치게 낮게 평가되었다. 군사재능과 실제전공을 보면, 이신은 이광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견과 편애로 <사기>에 이신의 전(傳)은 없다. 그의 사적은 다른 사람의 전기에 그저 섞여서 전해질 뿐이다. 계통적이 아닐 뿐아니라, 필요한 재료도 부족한 면이 많다. 진왕의 초나라공격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 및 초나랄 공격했다가 패배한 두 가지 일을 많이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적은 모조리 불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진나라 통일전쟁 10년중 일부의 사적 외에 나머지는 모조리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광의 생애를 기술한 <이장군열전>은 상세하고 넘쳐서 사마천이 그에게 깊은 동정과 감개를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성공적으로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고, 지용을 모두 갖추었으나 뜻을 펴지 못한 비장군의 이미지를 묘사했다. 기실, 후세인들의 존경을 듬뿍 받는 이 비장군 이광은 명장으로 불리지만 좋은 장수로서의 실질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흉노와의 크고 작은 칠십여회의 전투"를 벌인 이광은 실로 승리한 기록이 얼마 되지 않는다. 비록 전공이 적지 않지만, 어떤 것은 개인적인 용맹함을 보이고 '역전'한 에피소드일 뿐이다. 그의 선조인 이신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역사는 이광은 숭상하고, 오랫동안 그를 서한의 명장으로 불렀다. 심지어 위청, 곽거병과 나란히 언급하기도 했다. "이광"은 거의 명장의 대명사처럼 되어, 문인묵객들은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언급하곤 했다.

 

이신을 보면, 그는 차갑게 내버려졌다. 이광이 역대이래로 숭상을 받는 것과 비교하면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된다. 그 차이가 너무 심하다. 혁혁한 그의 전공을 언급하는 사람이 적을 뿐아니라, 이광에 전혀 뒤지지 않는 용맹함도 거의 사람들에 의해 언급되지 않는다. 두목의 <전극가검교국가제주의전유주자사제>에는 전극가(田克加)에 대하여 "효준무적(梟俊無敵), 감격경생(感激輕生), 이신지기개관중(李信之氣蓋關中), 진안지용문농상(陳安之勇聞隴上)"이라고 하여, "이신의 기"와 "진안의 용"을 나란히 언급했다. 두목은 이신의 용기가 남다르다는 점을 들어 전극가를 칭찬한 것이다. 장언원의 <법서요록>권8에는 완연서법을 평가하면서, 이신, 왕리의 공격을 비유로 들었다. 이것이 이신에 대한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신이 초나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왕전으로 교체된 일을 구실로 하여 부지불식간에 이신을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위나라 부하(傅嘏)의 <대조방정오삼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번쾌가 십만의 무리로 흉노를 횡행하겠다는 것은 계포가 면전에서 그 단점을 지적했고, 이신이 이십만의 군사를 가지고 혼자서 초나라사람을 상대하고자 했지만, 결국은 진나라군대를 욕보였다" 당나라때 위원충의 <상고종봉사>에도 용병의 공졸(工拙)을 얘기하면서, 역시 이신, 번쾌의 일을 꺼냈고, 부하의 책문과 기본적으로 같았다. 송나라의 증공량, 정도의 <무경총요.후집권칠.지중>, 구양수의 <거사집>권17<위군난론하>, 소식의 <소동파전집.후집>제11권 <지림.진졸취초>, 홍매의 <용재수필>권십<임적역장>, 장예의 <십칠사백장전>권일<진왕전>, <송사.허한전>에 기록된 허한이 송흠종에게 종사도의 병권을 해제해서는 안된다는 간언, <원사.학경전>에 기롣괸 학경의 <동사의>, 유기의 <백전기략.양전>등이 모두 이신의 초나라공격실패 및 왕전이 장수를 대체한 점을 서술하고 있다.

 

논자들은 심지어 이신을 그저 지상담병(紙上談兵)하고 마침내 전투에 패배하여 나라를 망친 조괄(趙括)과 나란히 논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양수는 <위군난론하>에서 먼저 "말을 듣기에 쓸모가 있어보이지만, 그 말을 쓰면 사람의 일을 망치는 것은 조괄이다" 그리고 뒤이어, "처음에 듣기에 그 말이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 말대로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왕전이다." 비록 왕전과 조괄을 서로 상반되는 예로 비교하고 있지만, 글에서는 왕전과 이신을 하나는 성공사례, 하나는 실패사례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은연중에, 이신과 조괄을 같은 류로 보고 있다. 소식은 희녕4년 이월에 쓴 <상신종황제서>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마치 조괄이 진나라를 가볍게 본 것과, 이신이 초나라를 쉽게 본 것과 같다" 이를 보면 논자들이 이신의 경솔함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이신은 진나라의 통일전쟁에서 상당한 공헌을 했다. 이신의 사적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신은 진나라의 통일전쟁에서, 조나라를 공격하고, 연나라 태자단을 추격하여 붙잡았으며, 초나라를 공격했으며, 연, 대, 제나라땅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는 용맹하고 잘 싸웠고, 공헌이 혁혁했다. 진시황이 군웅을 물리치고 천하통일하는 과정에서 크게 신뢰한 대장이었다.

 

비록 초나라정벌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진시황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서, 여러번 기용된다. 그후 일련의 멸국전투에 투입된다. 진나라의 전체 통일전쟁에서 "왕씨, 몽씨의 공이 크고 이름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신의 공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고, 상당한 공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초나라정벌실패로 그리고 진나라의 가장 탁월한 노장 왕전과 성공,실패가 선명히 비교되며, 또한 초나라를 정벌한 것이 군사전쟁사상 경전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신은 후세인들의 눈에 지위를 낮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신이 초나라공격에 실패한 것은 반면교재로 사용되어, 일대명장의 영명은 이 전투의 실패로 거의 절반이 가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