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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군사

10대원수 계급부여시의 군내파벌균형

by 중은우시 2013. 6. 10.

글: 복녕객(福寧客)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은 최초로 계급제를 실시한다. 중남해 회인당에서 모택동은 주덕등 10대원수에게 계급장을 수여하고, 주은래는 속유(粟裕)등 10대대장에게 계급장을 수여했다. 중국군대의 저명한 십대원수, 십대대장은 이렇게 확립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십대원수와 십대대장을 놓고 여러가지 화제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에 답는 것은 그들중 일부 사람들이 과연 그런 영예를 누릴 자격과 업적이 있느냐이다. 이들 풍운힌물들의 이력과 그들이 각자 맡았던 직무를 보면 우리는 당시 계급부여결정이 몇 가지 요소의 제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 인원수제한

2. 각자 당시의 직무

3. 각자의 당내군내의 경력이 얼마인지.

4. 각자의 군사업적

5. 지도자들의 각자에 대한 호오

6. 군내각파벌의 균형

 

이 6가지 요소중에서 첫째는 수량요소이고, 변통의 여지가 없다. '십대'원수 '십대'대장이라는 숫자에서 이 점은 알 수가 있다; 다섯째는 가장 작용이 적었다. 모택동은 복잡한 인간관계를 계급을 통하여 일반사람들의 앞에 완전히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둘째, 셋째, 넷째는 주로 서열을 정하는데 쓰였다. 그리고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여섯째이다.

 

중국군대의 파벌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장개석의 국군처럼 뿌리깊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고질이었다. 중국전통의 배경하에 공상당인들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군내의 큰 파벌은 기본적으로 홍군시기의 3개방면군, 남방3년유격전에 섬북방면이 있고; 항전중의 팔로군, 신사군이 있고; 해방전쟁중의 5개야전군이 있다. 이 몇 개의 대파벌은 직접 원수, 대장의 수여여부에 영향을 주었다. 기타 몇 개의 소파벌은 최고급의 계급에 그다지 역할을 못했다. 여기에 역사, 인원등 여러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상장, 중장, 소장을 수여할 때는 더 이상 균형을 고려하지 않았다.

 

먼저 몇 개의 소파벌을 알아보자, 이것은 주제외의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남도경애종대(瓊崖縱隊). 역사가 가장 길고 몇번의 부침이 있었다. 최고지휘관도 여러번 바뀌었다. 살아남은 최고지휘관 풍백구(馮白駒)는 계급을 부여받지 못하고, 지방에 부임했다.

 

동강종대(東江縱臺). 항전시기 중국공산당의 화남에서의 유일한 무장이었다. 46년 심천 대붕만에서 북으로 철수한다. 화동야전군 양광종대로 개편된다. 사령관은 증생(曾生)으로 학생출신이고 36년에 입당했다. 경력이 너무 짧아서, 소장의 계급만을 받았다.

 

검계천전변구종대(黔桂川滇邊區縱隊). 해방전쟁때, 중국공산당의 서남에서의 유일한 무장이었다. 일찌기 먼저 직접 노한의 운남의거를 일으킨 공산당부대이다. 이 부대는 역사가 가장 짧고, 별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고, 장군을 배출하지도 못했다. 오늘날 군대역사상 이런 부대가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도 드물게 되었다.

 

동북항일연군. 명성이 가장 크지만, 결말은 가장 비참하다. 소련으로 퇴각한 각 유격대는 겨우 1개여단을 편성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겨우 살아남은 제2군군장 주보중(周保中)은 해방전쟁때 요녕군구 부사령관이 된다. 1955년 1급팔일훈장, 1급독립자유훈장과 1급해방훈장을 수여받는다. 그러나 군대계급은 수여받지 못했다.

 

제4야전군 제5사. 명의는 신4군이지만, 실제로는 중앙군위가 직접 지휘애다. 장기간 적의 후방에서 홀로 싸웠다. 항전승리후 일찌기 중원야전군으로 개편된다. 몇개의 독립부대중 가장 큰 부대였다. '중원포위돌파'후 각각 서북, 긴기노예, 화동의 각 야전군으로 편입된다. 계급수여때 전 5사의 여단급지휘관은 2명의 중장이 있다. 단장급 지휘관은 몇명의 소장을 배출한다. 사단장 겸 정치위원인 이선념(李先念)은 이미 군을 떠났고, 사단급지휘관은 참모장 유소경(劉少卿)이 남아있었느데, 다른 요소때문에 겨우 소장계급만을 받는다.

 

원수와 대장의 인선을 결정할 때, 또 한가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교란요소가 있었다. 즉, 국군의 '투항장군'이었다. 당시 도치악(陶峙岳), 진명인(陳明仁), 동기무(董其武), 요운주(廖運周)등이 모두 군대에 재직중이었다. 그래서 반드시 계급을 수여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지위가 더욱 높은 국군장군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에 어떤 사람은 부작의(傅作義)에게 대장 계급을 부여하자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작의보다도 지위가 더욱 높은 정잠(程潛), 용운(龍雲), 위립황(衛立煌)등은 이때 모두 전인대 국방위원회에 있었다. 최종적으로 도저히 균형을 맞출 수 없어, '일도체(一刀切)'하여, 이 몇몇 국군의 고급장군들에게는 계급을 부여하지 않기로 한다.

 

여러가지 요소의 제약을 받아 인선의 결정과정은 시간을 오래 끈다. 53년 하룡(賀龍)이 조국위문단을 이끌고 북한에 갔을 때, 지원군 고급장군들과의 얘기과정에서 계급문제가 나온다. 그는 유머러스하게 털어놓았다. "군위는 이미 형제(본인)를 원수로 내정하였다." 이를 보면 그때 이미 인선에 대하여 상당히 논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2년후에야 비로소 인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몇개의 대파벌중에서 홍1방면군과 8로군의 세력이 가장 컸다. 20명의 인선중에서 2/3는 이 파벌에 속하거나 이 파벌과 연원이 깊다. 섬북방면이 가장 약해서 대장 1명만을 배출한다.

 

주덕(朱德). 어떤 측면에서 고려하더라도, 첫번째 원수의 자리는 그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당사군사에서의 지위가 아주 특수하므로 오늘날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다. 이 점을 설명하려면 내용이 너무 많다. 본문에서는 제약이 있으므로 별도의 글을 써보기로 한다.

 

팽덕회(彭德懷). 군사에서 지위가 주덕에 바로 다음간다. 계급수여시 군위업무의 주재자이다. 또한 제1야전군의 대표이다. 군사업적에서는 승리도 패배도 있었지만, 평강폭동에서 한국전쟁까지 항상 제1선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이점은 전체 군내에서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그의 군사조예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이십여년간 백전을 거친 경력은 군계일학격이다. 원수의 둘째자리를 그가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임표(林彪). 제4야전군의 대표이다. 십대원수중 그의 전적과 지휘능력은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열명중 경력이 끝에서 두번째이다. 셋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당시 그가 10명중 주덕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정치국 상임위원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백승(劉伯承). 제2야전군의 대표이다. 군사생애는 주덕에 바로 다음간다. 그는 군사지휘와 학술에서 모두 아주 높은 성취를 거두었다. 중국군대의 정규화에 영향이 가장 크다. 백숭희(白崇禧)는 그를 가리켜, "공산군제1호한장"이라고 불렀다. 모택동은 그에 대하여 다르게 보고 있었다. 계급부여시 유백승은 당내, 군내에 이미 실권을 모두 잃었다. 넷째의 자리를 차지한 원인은 첫째, 그의 경력이고 둘째는 군내에서 인망이 높았고, 셋째는 모택동이 개인적인 유백승에 대한 견해를 공개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룡(賀龍). 남창폭동 총지휘와 홍2방면군 총지휘의 경력으로 원수가 된다. 그는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군사조예와 전적에서 뛰어난 점도 없었다. 그는 홍2군단을 창설할 때 아주 강한 봉건적 색채를 드러낸다. 10년간 홍호소비에트구를 겨우 지킬 뿐이었고, 발전은 생각도 못했다. 후인들은 왕왕 그 책임을 하희의 홍호숙반에서 찾는데, 기실 악예환소비에트구의 숙반은 홍호지구보다 더욱 심각했다. 항전때 120사는 8로군의 3개사단중 가장 약체였고, 전적도 가장 적었다. 장기간 예비부대의 역할을 담당한다. 하룡은 해방전쟁때 진수군구사령관이라는 병단급의 직무를 맡는다. 건국후에는 체육위원회 주임이 된다. 다만 겉만 보고 하룡에게 긍정할 점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계급수여때 군위중 위치는 팽덕회와 임표에 바로 다음갔다. 여산회의후에 그는 군위 제2부주석이 되어 모택동이 임표를 견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다.

 

진의(陳毅). 그는 혼자서 남방3년유격전, 신4군, 제3야전군의 3개파벌을 대표한다. 그는 중간에 군에 투신한 문인이다. 군사조예는 한계가 있었다. 항전이래 그가 지휘한 비교적 큰 전투는 상당한 정도에서 속유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는 군대내에서의 경력과 지위가 있었고, 그는 모택동, 주은래, 주덕등과 역사적인 연원이 있었다. 그리고 이 3개파벌을 대표할 인물은 그밖에 없었다. 속유나 나영환이 맡을 수는 없었다.

 

나영환(羅榮桓). 모두 알다시피 그는 정공(政工) 원수이다. 정공의 군대내의 지위를 대표한다. 중국군대가 가진 중국특색을 보여준다. 나영환은 10대원수중 경력이 가장 짧고, 27년에 입당했다. 한번도 전략방면의 최고직위를 맡은 바 없다. 동시에 그는 10대원수중 학력이 가장 높다. 그는 대학을 다녔다.

 

서향전(徐向前). 하룡과 유사하다. 홍4방면군 총지휘의 신분으로 원수가 된다. 그의 경력은 임표와 나영환보다 길 뿐이다. 황포군관학교 1기졸업생중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군사업적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이라면 일찌기 홍군중 가장 강한 홍4방면군을 지휘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군을 지휘하여 하서주랑에서 전멸한 이후, 다시는 언급할만한 전적이 없다. 해방전쟁때 그는 병단사령관을 맡았을 뿐이고, 대국이 이미 정해진 후에 태원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홍4방면군은 인원이 아주 많으므로 반드시 원수에 대표인물을 포함시켜야 했다. 일찌기 총지휘를 맡았던 서향전이 최선의 후보자였다.

 

섭영진(聶榮臻). 화북야전군의 대표이다.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재직한 바 있지만, 실제로 체계적인 군사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는 화북야전군을 지휘하면서 부작위와 3년간 대치했는데, 뛰어난 전적이 없었다. 그의 일생동안의 군사업적중, 휘황한 것은 왕왕 임표와 관련있다; 홍군시기 그는 홍1군단 정위였다. 항전개시시 그는 5사부사단장을 맡았다; 평진전투에서는 동야와 화야의 연합작전이었다. 그리고 북경군사박물관의 한 연구원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섭영진전>을 쓰려면 먼저 <임표전>을 써야 한다."

 

섭검영(葉劍英). 북벌에서 건국까지, 그는 계속하여 '중국공산당 군대이 정계에서의 대표' 역할을 수행한다. 그를 제외하고 당내 군내에서 그와 같은 특수한 지위를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없다. 경력에서 그의 군사생애는 주덕과 유백승의 바로 다음간다. 운남강무학당을 졸업한 후, 그는 월군에서 오랫동안 고급막료의 직무를 수행한다. 그가 장개석을 도와서 황호팍생군이 제1차동정을 할 때, 임표는 아직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다. 장정때 그는 한때 유백승을 대신하여 홍군총참모장을 맡기도 했다. 해방전쟁 3년동안 그는 총참모장을 맡았다. 중대한 역사사건에서 그는 두번이나 미묘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