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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군사

중국인민해방군의 10차례에 걸친 인원감축

by 중은우시 2010. 10. 8.

글: 왕남방(王南方)

 

 

 

 

신중국건국후의 60년동안, 해방군은 10번의 감원을 겪었다.

 

1950년 6월, 해방군은 제1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당시는 신중국이 막 성립된 때여서 인민해방군의 총병력은 550만명에 달하였다. 소미가(小米加)소총(compact MEGA particle rifle)을 든 보병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주력이었다. 공군, 해군, 육군특종병은 거의 없었다. 1950년 6월, 군사위원회 비준을 받아, 단계적으로 백만여명을 전업시키기로 확정한다. 나중에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병력축소작업은 중단된다. 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인원을 확충한다. 1951년 10월, 군대의 총병력수는 627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중국군역사상 병력이 가장 많은 시기였다.

 

1952년 1월, 해방군은 제2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본부와 각 기관 및 국방군 보병부대의 인원수가 감소되었고, 군특종부대와 학교의 인원수는 증가되었다. 그중 95만명의 지방부대는 공안부대로 개편되었다. 그래도 총인원은 300만명가량을 유지했다.

 

1953년 8월, 해방군은 제3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전군의 총병력을 감소시켰다. 그중 육군부대의 감소폭이 가장 컸다.

 

1957년 1월, 해방군은 제4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1958년말, 전체 군대는 집단적으로 전업시켰다. 1개 군부, 46개 사단, 30여개소 학교를 줄였다. 가장 많이 줄인 것은 보병부대였고, 전군의 총병력은 신중국성립시에 비하여 61%나 감소했다.

 

1975년말, 해방군은 제5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문혁'기간동안, 부대조직의 편제가 혼란되고, 균형을 잃어, 사람은 늘었다. 간부는 편제보다 많았다. 감군하는 과정에서 공병, 철도병이 가장 많이 줄었다. 1976년에는 전체군인의 총인원수가 1975년에 비하여 136%나 감소했다.

 

1980년, 해방군은 제6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그해 3월, 군사위원회는 군대를 다시 정예화하기로 결정하고, 기관을 대거 정예화하며, 비전투인원과 후방인원을 축소시킨다. 일부 부대는 지방에 넘긴다.

 

1982년 9월, 해방군은 제7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51만여명의 철도병과 1978년 1월에 성립된 기초건설공정병은 집단적으로 철돕와 원래 배속되었던 국가부위 혹은 소재 성, 자치구, 직할시로 보내고, 일부 부대는 무경부대로 넘겼다. 이때부터 철도병과 기초건설공정병의 두 병종은 해방군의 서열에서 사라지게 된다.

 

1985년 6월, 해방군은 제8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군사위원회는 총인원 100만명을 줄이기로 결정한다. 이번 감군은 해방군을 수량규모형에서 품질효율형으로 바꾸고, 인력밀집형에서 과기밀집형으로 바뀌게 하였다.

 

1997년 9월, 해방군은 제9차 대감원을 실시한다. 군사위원회는 50만명을 줄이기로 결정한다.

 

2003년 9월 1일, 당시 군사위원회 주석은 2005년전에, 다시 20만을 감원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때부터 제10차 대감원의 서막이 올랐다.

 

여러번의 대감원과 발맞추어, 육군항공병부대, 전자대항부대, 해군함재기부대등 새로운 병종이 나타나고, 예비역부대도 연이어 성립된다. 해방군은 정예화, 통합화, 효율화의 방향으로 발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