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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군사

중국 고대의 열병(閱兵)

by 중은우시 2009. 9. 23.

글: 유개생(劉開生)

 

금년(2009년) 10월 1일은 신중국탄생60주년기념일이다. 그 때가 되면 천안문광장에서 열병식을 거행할 것이다. 사상유례없는 성황을 이룰 열병식은 민족정신을 크게 진작시키고, 국민의 민족자부심과 애국심을 고무시킬 것이다. 세계는 다시 한번 중국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중국고대의 열병에 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았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최초의 열병은 지금으로부터 4천여년전에 하(夏)나라를 건립하기 전날 있었다. 당시 중국북방의 화하부락의 수령인 하우(夏禹)는 강남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지금의 하남성 숭현 경내의 도산(塗山)에서 남방부락의 영수들과 회맹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사병들은 손에 각종 깃털로 장식한 병기를 들고, 음악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었다. 이것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멀리서 온 남방부락의 수령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것이었다.

 

춘추시기에 이르러, 열병활동은 더욱 빈번해진다. 최초에 열병은 사냥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군대가 열을 지어 진을 이룬 다음에 최고통치자 혹은 장군이 먼저 화살로 짐승을 사냥한다. 그 후에 부대를 검열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활동을 "수(搜, 봄날에 행하는 사냥이라는 뜻임)"라고 불렀다. 나중에 정기적으로 군대 혹은 전차를 검열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는데, 보병을 매년 1회 검열하는 것을 "수(搜)"라고 하였고, 전차를 3년에 1회 검열하는 것을 "대열(大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보병과 전차를 5년에 1회 검열하는 것을 "대수(大搜)"라고 불렀다.

 

봉건통치자들은 이처럼 정기적으로 열병을 하였는데, 그 의도는 병력의 장비를 검사하는 외에, 주로 백성들에게 시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의 진문공은 이렇게 말했다: "백성은 아직 위엄을 알지 못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수를 통하여 그들에게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외에 전쟁을 시작하기 전이나 전쟁중에 부정기적인 열병이 있었다. 이를 "관병(觀兵)" 혹은 "관사(觀師)"라고 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전쟁전에 사기를 고무시키는 외에, 주로 적들에게 시위하는 것이었다.

 

열병이라는 명칭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나라때부터 정식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한나라때 정기적인 열병활동은 자주 가을의 "제수(祭獸)"활동과 함께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약간이 싸움도 포함시켰다. 이후 각 왕조는 한나라와 유사하게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열병을 행했다.

 

청나라때, 청나라의 전제(典制)에 따르면, 황제는 매3년마다 1차례의 대열병례(大閱兵禮)를 거행한다. <<대청회전>>의 기록에 따르면, "강희24년, 성조인황제가 남원으로 가서 대열을 행했다. 남원의 서홍문내의 넓은 공터를 활용하여, 팔기관병이 총과 포를 가지고 3부대로 나란히 섰다. 성조인황제는 황자등 환갑을 데리고, 앞에는 노란 덮개를 하고, 내대신, 시위, 대학사 및 각부원대신들이 뒤를 따랐다. 뒤에는 대도(큰 깃발)를 세웠다. 성조인황제는 팔기병진을 한바퀴 둘러보고, 마치고는 행궁으로 돌아갔다. 특별히 칙유를 내려서, 군령을 분명히 하니, 대열을 행한 곳에서 선언했다. 그날 열병전에 관병은 모두 먹을 것을 하사받고, 열병이 끝난 후에는 술을 하사받았다."

 

청나라 궁중화가인 김곤(金昆)이 명을 받아서 그린 <<팔기열진도(八旗列陣圖)>>에는 건륭황제가 남원에서 대열을 하는 광경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팔기장병은 각각 홍, 백, 남, 백등 자신의 기의 열병예복을 입고 진을 나누어 줄을 서고, 호각을 높이 쳐들어 불고, 깃발은 나부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으니, 아주 장관이었다. 세상사람들에게 거대하고 보무당당한 건륭의 열병의식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청나라사료자료에 따르면, "황상(건륭황제)는 몸에 갑주를 입고, 말을 타고 나섰다. 활을 쏘아보았는데 연속 7발이 모두 명중했다. 병부의 당관이 열진을 주청올렸다. 황상은 친히 대오를 사열하고, 병부당관이 앞을 이끌고, 총리대신, 만주대학사, 내대신시위가그 뒤를 따랐다. 모두 갑옷을 입고 말을 탔다."

 

<<대열도>>는 "행영(幸營)" "열진(列陣)" "열진(閱陣)" "행진(行陣)"의 네 권으로 나뉜다. 건륭황제게 군영에서 검열하는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두었다. 특히 "열진(閱陣)"에는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이 1.6만명에 이른다. 모든 사람의 면모가 분명하고 의복장식, 수레, 말, 대포, 창, 의장깃발과 북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얼굴은 분명한 색깔로 그려져 있었다. 건륭황제는 핵심위치에 그려져 있는데, 갑옷을 걸치고 완전한 군장을 갖추었다. 말 위에 타고 있는데 아주 뛰어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현대에 이르러, 열병활동은 각국에서 성행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의 동맹군 지도자인 아이젠하워, 처칠, 드골등은 모두 열병을 중시했다.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도 열병을 사기를 고무시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1945년 6월 24일 소련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승리대열병을 거행한다. 이번 열병은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국내건 국외이건,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나 민족전통문화가 얼마나 차이가 있던, 모두 열병에 대한 인식은 마찬가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열병이 국가의 국위(國威), 군위(軍威)와 종합국력를 나타내고, 군심,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병은 국가와 민족이 가장 영광으로 생각하고, 가장 흥분하며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며, 가장 신성하고 장엄한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