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자지
오악중 동악 태산, 중악 숭산, 서악 화산에 대하여는 일찌감치 고대에 확정되었고, 그 이후에도 변화가 없었다. 남악은 처음에 한무제가 안휘 천주산으로 정했다가, 수문제에 이르러 호남 형산으로 바꾼다. 북악 항산은 확정과정이 더욱 복잡하다.
북악 항산의 역사는 원래 아주 오래되었다. 항산은 "태항산(太恒山)", "항종(恒宗)", "원악(元岳)", "자악(紫岳)", "천하제이산(天下第二山)"등의 명칭이 있다. 서한시대에 한문제 유항의 이름을 피휘하여 한때 상산(常山)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일찌감치 원고시대인 요임금때, 일찌기 희화씨(羲和氏)의 4아들에게 각각 4악을 관장하도록 명한 바 있다: 희중(羲仲)은 동악장관, 희숙(羲叔)은 남악장관, 화중(和仲)은 서악장관, 화숙(和叔)은 북악장관으로 삼는다. <상서>의 기록에 따르면, 순제가 북순할 때, 일찌기 멀리서 북악에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북악을 만산지종주(萬山之宗主)로 봉한다; 그후, 대우치수시디에 다시 "강의 북은 항산에 속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선후로 주성왕,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당현종, 송진종, 원세조, 명태조등이 북악을 왕, 제, 신으로 봉한다. <주례>에 따르면, 당시 천하에 "구주에 각각 진산이 있는데, 항산은 정북 병주의 진산이다." <이아>에도 오악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항산이 북악이다"라고 기록했다. <우공>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시황이 동순할 때, '태행, 항산을 지나 갈석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갔다." 진시황이 태행, 항산을 거쳐 갈석으로 갔다. 오늘날에도 태행, 항산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를 보면 북악의 역사는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악 항산에 관한 기록은 조금씩 여기저기 남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바다에서 바늘을 건지듯이 이에 대하여 정리하고 연구했다. 기실 역사에서 말하는 항산은 광의로 볼 때 하북의 서부와 산서의 동부가 만나는 곳에 길게 이어진 태행산을 가리킨다. 현재 지리학적으로는 하북 당현, 래원, 부평에서 산서 혼원(渾源) 일대의 산맥이 항산산맥이다. 협의로는 하북 곡양의 대무산(大茂山)을 가리킨다. 오늘날 산서 혼원에 있는 항산이 아니다.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항산의 북쪽 골짜기는 항수(恒水)가 나가는 곳이다. 동으로 구에 들어간다" 북위의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항산은 북악이다. 중산상 곡양현 서북에 있다.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서쪽으로 안문관이 있고, 동으로는 기북평야가 있다. 남으로는 오대산에 접하고, 북으로는 대동분지에 닿아있다. 수백리에 이르며, 당년 고인이 이 산에 오를 때 하북, 산서 두 성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산세가 창망하고 기상이 만천하다." 그리고 이렇게도 적었다. "옛날 천자가 순수할 때, 자주 십일월에 북악에 왔다...주소왕이 남정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순수의 예가 폐지된다. 읍곽은 여전히 따랐다. 진나라는 정전제를 폐지하고 현을 둔다 성은 산곡의 북쪽(양)에 있어 곡양이라 불렀다." 진나라 광서연간 <곡양현지>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금나라 명창4년(1193) 곡양현 북부의 땅을 떼어 부평현을 둔다." 금원이후, 곡양현은 분할되어 북부에 부평현을 둔다. 이렇게 하여 곡양과 항산이 나뉘어진다. 그러나 항산신에 제사지내는 북악묘(北岳廟)는 여전히 곡양에 있었고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런 글을 썼다: "송,요가 대치하던 시기에 고항산은 전쟁요지가 된다. 북악의 대표적인 인문경관은 모조리 사라진다. 여기에 항악주봉은 북악묘와 백리나 떨어져 있어서, 관리들이 제사지낼 때 북악묘까지만 가고 항산에는 가지 않는다; 금나라때 곡양의 북부를 떼어 부평을 설치한 후, 북악항산과 북악묘는 서로 다른 현에 속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북악항산에 대하여 점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현재 산서혼원 경내의 항산은 원래 이름이 "현무산(玄武山)"이다. 전국시대 진,한 내지 위,진은 계속 이를 "고씨산(高氏山)" 혹은 "고시산(高是山)", "곽산(崞山)", "천봉령(天峰嶺)"등으로 불리웠다. 역도원은 깊이있게 고찰한 후, <수경주>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고씨지산은 구수가 나오는 곳이다. 동으로 가아천을 거쳐, 내는 남쪽으로 와서 들어간다. 물은 항산의 북록으로 나온다...구수(지금의 당하)는 동으로 마관으로 간다. 다시 동남으로 항산상 곡양현북을 지나, 항수는 서쪽에서 와서 들어간다....거기서 내려가 구수는 항천을 받아들이는 통칭이다. 즉, <우공>의 소위 항위즉종(恒衛卽從)이다." 구수는 대군 영구현의 서북 고씨산에서 나온다. 이 고씨산은 지금의 당하의 발원지이다. 그래서 고씨산은 항산의 원명이 아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으로 보면, 왕조가 변하면서, 국도를 중심으로 오악방위를 확정하는데 약간씩 변화했다. 그러나 특수한 현상도 있다. 특히 명나라때에 이르러, 국도를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조정은 몇번이나 인위적으로 북악 항산의 정확한 지리방위를 잃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가 유구한 북악항산은 명확한 제사지점을 잃게 된다.
주, 진나라때 경성을 중심으로 오악의 방위를 정하는 관념이 이미 형성되었다. 진한이후에는 일종의 예제로 수나라까지 도성을 옮긴다고 하여 오악을 옮기지 않았다. 태사공은 진나라는 칭제후 함양을 도읍으로 하였는데, 오악은 모조리 동쪽에 있다; 서한, 당나라도 장안에 도읍을 정하니, 서악화산이 경성을 동쪽에 있다고 하여 바꾸지 않았다. 남송은 항주에 도읍을 정하는데, 동악태산이 서북방향에 있다고 하여 바꾸지 않았고, 명나라초기에 남경에 도읍을 정했는데, 동악태산이 역시 서북지방에 있지만, 바꾸지 않았다.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고, 청나라초기가 되면서, 북악항산이 서남쪽에 있지만 이를 바꾸지 않는다.(단지 북위가 평성에 도읍을 정한 후, 항산이 그 경내에 있고 도성의 남대문이므로 북악에 제사지내는 것을 단기간동안 혼원의 항산으로 바꾼 바 있다). 다른 점이라면, 명나라조정에서는 북악에 제사지내는 것을 바꿀지 여부를 놓고 계속 논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선제 신작원년(기원전61년) 조서를 반포하여 제사를 "동악 태산은 박(博), 중악 숭산은 숭고(嵩高), 남악 형산은 잠산(灊山), 서악화산은 화음(華陰), 북악상산은 상곡양(上曲陽)"에서 하도록 한 후, 북위 선무제연간(500-512) 곡양북악묘를 건립한다. 수나라 대업4년(608년) 수양제는 친히 곡양으로 와서 북악에 제사를 지낸다. 당 광계원년(885년), 진왕 이극용이 북악묘로 가서 제사지낸다. 명홍무10년(1377년) 서달은 주원장의 위탁을 받아 북악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원나라초기 세조는 특별히 명을 내려 중수하고, 지원7년(1270)완공했다. 명홍무3년(1370) 명태조는 '오악', '사해'등 여러 신을 봉하는 조서를 내린다. 하북의 북악묘내에는 조서내용을 가지고 비를 세웠다.
다만, 명나라 홍치6년(1493)이후 "개도이개사(改都而改祀, 수도를 바꾸었으므로 제사지내는 곳도 바뀌어야 함)"로 인하여, 조정내부에서는 북악제사에 대한 논쟁이 격렬해진다. 북악항산에 제사를 지낼 때 어디에서 해야하느냐이다. 조정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각자 주장을 고집한다.
산서 혼원으로 옮겨서 제사지내야한다는 일파가 있다. 이유는 주로 3가지이다. 북악 항산과 북악에 제사지내는 곳은 국도의 북쪽이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북악 항산은 하북 대무산이고, 제사장소는 곡양 북악묘이다. 모두 국도의 남쪽이다. 경성의 방위와 맞지 않는다; 산서 혼원으로 옮겨서 제사지내야 하는 것은 혼원이 일찌기 항음(恒陰) 즉 항산의 음면(북쪽)이다. 항양, 향음은 모두 '항산'이다. 혼원은 곡양보다 국도에서 북쪽에 있다. 그리고 교통이 불편하여 관리들이 원한다는 것이다.
반대파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하북 곡양의 북악묘에서 제사지내야 한다고. '항양,항음이 모두 항산'이면 왜 굳이 바꾸어 제사지내는가. 그들은 '개도불개악'의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내고, 경전에서 사례를 들어 반박한다. 수천년 역대중앙정부에서 하북의 북악묘에서 제사지냈던 역사적 관례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조정은 만력년간에 절충방법을 취한다: 하북대무산 북악주봉은 산서 혼원 현무봉으로 바꾼다. 이를 통하여 북악은 경성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다만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장소는 하북 곡양의 북악묘로 한다. 이렇게 하니 중앙정부는 항산의 주봉 두 개를 제사지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골치아픈 불씨를 남겼다. 역사적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북악은 후인들에게 여러가지 논쟁거리를 남긴다.
제1차논쟁: 명홍치6년(1493). 병부상서 마문승이 상소를 올려, 북악에 제사지내는 것을 산서혼원으로 바꾸어달라고 한다. 예부상서 예악은 상소를 올려 반대한다. 조정은 논의를 거쳐, "여전히 곡양에서 제사지내고, 옛날의 법도를 따른다"고 결정한다.
제2차논쟁: 명홍치15년(1502), 이미 이부상서가 된 마문승이 다시 상소를 올린다. 북악을 산서혼원으로 바꾸자고. 재논의하는 기간에 예부상서 예악이 다시 한번 반박하고, 황제는 예부의 상소문에 "그대로 하라"고 비복한다.
제3차논쟁: 명가정25년(1546), 호과 하남 진공이 주청을 올려 하북 곡양의 제사를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정은 다시 부결시킨다.
제4차논쟁: 명만력14년(1586), 산서순무 호래공이 북악제사를 산서혼원으로 바꾸어줄 것을 청한다. 예의 심리가 반대한다.
제5차논쟁: 같은 해(1586), 제4차논쟁이후, 조정은 산서혼원 현악산을 북악으로 봉하고 항산이라 칭한다. 다만 이번은 그저 북악항산의 주봉만 고친 것이고,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여전히 하북 곡양이었다. 명나라후기에 나타난 '2개항산'의 설이다.
제6차논쟁: 청나라순치17년(1660), 형과급사 첨본성이 상소를 올려 제사지점을 바꾸자고 한다. 그의 견해는 명나라때 마문승과 같다. 다만 이번에는 순치제가 "북악을 혼원으로 바꾸어 제사지내라"고 지시한다. 그후에는 이 일에 반대하는 주절은 없다.
이렇게 하여, 명나라때부터 시작된 제사논쟁은 청나라초기 순치제때까지 이어진다. 북악에 제사지내는 장소가 하북곡양에서 산서혼원으로 옮겨간다. 봉사합일의 논쟁도 이로써 끝이 난다.
이때부터 산서혼원은 국가에서 북악항산에 제사지내는 곳으로 된다. 일찌기 고북악이 하북에 있을 때의 정치적 대우를 받는다.
항산도 말이 없고, 북악도 말이 없다. 어디에서 제사지내는지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정권을 잡은 자들이 필요와 호오에 따라 정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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