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북경만보
진나라말기, 진승, 오광은 사람들을 데리고 어양(漁陽)으로 술변(戌邊)하러 갔다. 중도에 비를 만나 기한을 지킬 수 없게 되자, 의거를 일으킨다.
어양군은 진나라, 한나라때 상당히 넓은 지역을 가리켰다. "통할하는 현이 12개이다" 관할지구는 오늘날의 밀운(密雲), 평곡(平谷), 회유(懷柔), 천진의 계현(蓟縣)등지를 포함한다. 북으로는 장성까지, 남으로는 발해의 해변까지이다. 그러나, 어양군의 군소(郡所)는 지금의 어디일까> 이에 관하여 당나라때 사람과 송나라때 사람의 견해가 다르다.
당나라때 사람들은 어양군소가 오늘날의 북경 밀운이라고 하였다. <사기>의 주석에 인용한 당나라때 사람이 편찬한 <괄지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양고성은 단주 밀운현 남 십팔리, 어수의 양(陽, 북쪽)이다." 이 주석은 비교적 일찍 나오고, 또한 <사기>에 인용되어서 영향력이 컸다. 많은 자료들 <사해>를 포함하여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최근 들어 새로 출판한 <밀운현지>에도 이렇게 말한다. "어양군소재지는 밀운현....의 남성자이다" "진시황22년, 어양군, 어양현을 두고 현지와 군지는 모두 남성자에 설치했다."
송나라사람들은 어양군소가 지금의 천진 계현이라고 하였다. 북송때 사람이 편찬한 <태평환우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진은 이곳(계현을 가리킴)에 어양군을 두었다. 양한은 이를 따랐다."
중국고대지리를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군,현의 이름은 왕조에 따라 다르다. 똑같은 지명이 서로 다른 왕조에서 각각 서로 다른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진나라때 중국의 북방에 두 곳의 어양군소가 나타날 수는 없다. 밀운과 계현, 어느 것이 정확할까?
당나라사람들이 '어양'의 위치를 찾는데 하나의 지리적 표지를 남겼다: :"어수의 양" 즉 어양은 어하(漁河)의 북안(北岸)이라는 말이다. 어하는 어디인가? 이에 관해서는 단 하나의 기록이 남아있다. 백하(白河)는 어하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백하가 어딘지를 고증해보면, 발원지가 하북성 고원(沽源)이어서 또 다른 이름은 고수(沽水)이다. 그래서 어수가 백하라는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수경주>에는 명확히 적고 있다. 어수는 어양현의 동남에서 나온다. 평지에서 샘이 솟아서 서쪽으로 고현의 성남쪽을 지난다. 지금 성은 그 물의 북안에 있다. 어양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강의 이름 및 발원지로 보면 어수는 백하가 아니다. 그리고 <밀원현지>에서 말하는 남성자는 지도에서 보면, 조백하의 서쪽에 있다. 엣날 사람들이 '강의 양"이라고 하는 것은 강의 북안을 가리킨다. 설사 조백하가 역사상 물길이 크게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조백하가 '어하'라고 불린 적이 없다면, 남성자는 그저 다른 고대유적지일 뿐이고, 어양군소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수는 어느 것일까? 계현에는 어수(漁水)가 있을 뿐아니라, 어산(漁山)도 있다. <일하구문고>에서 인용한 <도경>의 말에 따르면, "어산은 (계)성의 서북 삼리에 있고, 높이가 백여장이다. 주위는 오리이다. 군은 이 산의 남쪽에 있다. 그래서 어양이라고 불렀다. 물이 산아래를 돌아가서 어수라고 부른다." 이 책은 다시 <사정산거지>를 인용하여 "어산에는 샘이 많고, 겨울과 여름에는 샘이 솟아나서 호수를 이룬다." 이것은 말이 된다. 어양이라는 것은 어산의 양(남쪽)이라는 말 혹은 어수의 양(북쪽)이라는 뜻에서 온 것이다. 귀양(貴陽)이 귀산의 남쪽인 것처럼.
밀운,평곡은 모두 어양군에 속한다. 평곡은 일찌기 어양현에 편입되었던 바 있다. 그러나, 어양현성과 어양군소는 확실히 오늘의 밀운경내에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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