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천지회(天地會)는 누가 창립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백소웅(白小熊)

 

우리는 홍문비적(洪門秘籍), 관서(官書) 및 현지고찰의 3가지 방면의 자료를 가지고 천지회의 창시자가 복건 운소 고계의 승려인 만제희(萬提喜) 즉 홍이화상(洪二和尙) 정개(鄭開)라는 점을 입증해보기로 한다.

 

홍문비적의 기재

 

홍문비적중 천지회의 연기문제(緣起問題)는 한 소림사 승려가 서로(西魯)를 정벌한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황당무계하다. 개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강희연간 서로 오랑캐가 중원을 침입한다. 청나라조정의 문신무장은 모두 적을 물리칠 계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방문을 반포하여, 전국의 영웅호한들중 서로를 정벌할 사람을 구한다. 방문은 복건에도 붙었다. 소림사의 승려 128명은 밤을 세워 경성으로 가고, 서로를 정벌하겠다고 한다. 그들은 신장 "육정육갑(六丁六甲)"의 보호하에 일거에 서로를 격파하고 경성으로 개선한다. 강희제는 봉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여러 승려는 거절한다. 여전히 소림사로 돌아가서 청수(淸修)하겠다고 한다.

 

갑인년에 누군가가 승려들이 서로를 정벌할 때 적과 내통하여 반국하였다고 고발한다. 강희제는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워, 병력을 파견하여 분향한다는 명목으로 소림사에 간다. 그리고 절을 불태운다. 여러 승려가 참혹하게 죽고 단지 18명만이 신장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도망가는 도중에 다시 13명이 청나라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남은 5명의 승려가 광동 혜주로 도망친다. 거기서 만운룡(萬雲龍)과 유주(幼主) 주홍죽(朱洪竹), 군사(軍師) 진근남(陳近南)을 만난다. 그리고 칠월 이십오일 축시에 함께 결의한다. 만운룡이 대가(大哥, 큰형님)이 된다. 이것이 천지회의 연기이다. 그래서 홍문 천지회는 만운룡을 시조로 모신다.

 

그렇다면, 만운룡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홍문비적을 보면, 만운룡은 법호(法號) 혹은 도호(道號)이고 본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본명은 홍문비적의 서로 다른 곳에 서로 다르게 쓰여 있다. 소일산(蕭一山)이 집록한 <근대비밀사회사료>의 <서로서(西魯序)>를 보면, "집에 있을 때 그는 일호달종(一號達宗)이라 하고, 출가후 법명은 화만(和滿)이다" 나이강 선생이 집록한 <천지회문헌록>중 <귀현수지국발현적천지회문건>에서는 만운룡의 "호가 자광(慈光)이고, 자는 달종공(達宗公)이다"라고 하였다. 중국제1역사당안관에서 소장한 요대고등이 쓴 <회부>에서는 만운룡이 "만제기(萬提起)를 스승으로 삼았고, 법호는 운룡(雲龍)이라 한다"고 하였다. 광서 전림현에서 발견된 홍문비적 양씨초본에서는 만운룡의 "성은 만(萬)이고 이름은 제희(提喜)이다." "도호는 운룡(雲龍)이다"라고 하였다.

 

상술한 4종의 홍문비적초본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믿을만한가? 역사연구의 일반원칙에 따르면, 비교적 시기적으로 이른 초본이 믿을 만하다. 위의 4건 초본 중에서 <근디비밀사회사료>중 홍문비적초본은 소일산에 따르면, "청나라말기 광동사람의 손으로 쓴 것"이다. <천지회문헌록>의 <귀현수지국발현적천지회문건>은 나이강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함풍초년 진개(陳開)가 부대를 이끌고 귀현을 점령했을 때 유전된 것이라고 한다. 당안에 나오는 요대고의 초본은 청나라관리가 가경16년(1811년)에 압수한 것이다. 그것이 유전된 시간은 가경16년이전이다. 홍문비적 양씨초본은 도광8년(1828년)에 초록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필자는 4가지 홍문비적 초본중 만운룡의 본명에 관한 것은 요대고본과 양씨초본이 믿을만 하다고 본다. 요대고는 만운룡의 본명이 "만제기"라고 했다. 필자는 일찌기 "만제기"가 "만제희"의 오자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1985년 광서 전림현 양씨초본이 발견된 후, 필자의 추측은 확인되었다. 만운룡의 본명은 과연 만제희였던 것이다.

 

관서, 당안중의 기록

 

관서, 당안에 천지회와 관련되는 내용이 있다. 당안은 주로 <궁중당>(즉, <주비주절>)과 <군기처녹부주절>(즉 전자의 부분) 및 <외기부>등 당안이다; 관서는 주로 <청고종실록>, <흠정평정대만기략>등이다. 이들 사료에서 천지회의 기원에 관한 기재는 주로 건륭51년(1786년) 대만 임상문(林爽文)의 난이 발발한 후, 청나라조정이 천지회의 존재를 발견한다. 각성(복건,광동,광서,운귀,사천)의 지방관리가 '근원'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관서는 당안의 원본에 따라 편찬했고, 약간의 삭제, 수정이 있으나 내용은 대체로 일치한다.

 

건륭52년 정월, 임상문의 난의 부원수(副元帥) 양진국(楊振國)의 공술에 따르면, "엄연(嚴煙)이 말하는 회의 기원에 대한 것은 광동에 홍(洪)씨성의 화상이 있었는데 홍이방(洪二房)이라고 하는데, 그가 주(朱)씨성의 사람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홍이방화상은 후계 봉화정에 거주하였는데, 어느 부 어느 현인지는 모른다. 주씨성의 사람은 나이가 겨우 15,6세였고, 무슨 이름인지 모른다. 어디에 거주하는지도 모른다." 양진국이 진술한 내용은 와전된 성분이 있어, 정확하지는 않다.

 

얼마후, 양진국이 얘기한 엄연이 체포된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천지회는 듣기로 주씨성과 이(李)씨성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사천에서 시작되었고, 연대는 이미 오래 전이다. 마구룡(馬九龍)이라는 사람이 화상 48명을 모입하였고, 구견음병법술을 배워서 각각 나누어 전교한다. 나중에 48명이 죽어서 겨우 13명이 사방에서 회를 만든다. 그때 광동에서 회를 만든 사람이 만화상(萬和尙)이고, 속명은 도희(塗喜)이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모른다." 이상은 <흠정평정대만기략>의 기록이다. 당안에서 엄연의 모든 진술내용이 보존되어 있다. 엄연이 심문을 받고 북경으로 압송된 후 형부에서 진술한 것이다. "이 교가 언제 생겼는지는 나는 정말 알지 못한다. 다만 진표(陳彪)가 하는 말을 들으면, 이 교는 연대가 오래 되었고, 이전에 주씨성, 이씨성을 가진 사람이 같이 만들었다. 주씨성은 주정원(朱鼎元)이라고 하고, 이씨성은 이름을 정말 모른다. 나중에 마구룡이라는 사람이 화상을 여러명 모집한다. 구견음병법술을 익혀서 각각 나누어 전교(傳敎)한다. 최근에 다시 만화상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속명이 도희이다. 모두 전교하는 사람이다. 지표는 나에게 두 마디 구어를 알려주었다: "삼성결만리도홍(三姓結萬李桃紅), 구룡생천이주홍(九龍生天李朱洪)" 이것이 천지회의 근원이다.

 

위에 언급한 체포된 천치회 우두머리의 진술은 비록 청정부가 천지회의 근원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에 기하여 천지회를 누가 만들었는지 확정할 수 없다. 건륭53년, 제희(提喜)의 제자인 진공(陳工)이 체포된다. 청정부는 천지회의 근원을 추적조사하는 과정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게 된다. <청고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투사부(圖薩布)가 아뢰기를 천지회의 비범(匪犯) 진무(陳巫)를 붙잡았다. 심문하여 천지회를 전한 승려 제희를 찾아냈다. 복건 장포현 사람이며, 고계향 관음정에 거주한다." 청나라관리는 진공의 진술에 따라, 장포현 고계현 관음정으로 가서 제희를 체포하러 간다. 이때 제희는 이미 사망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승려 행의(行義)를 붙잡았을 뿐이다. 괴륜(魁倫)이 올린 글에 따르면, "장포현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 현의 고계에서 승려 행의를 붙잡았고, 그의 사무 제희가 바로 부친이라고 진술했다. 아명은 홍(洪)이고 둘째이므로 '홍이화상(洪二和尙)'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미 4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자료에 따르더라도, 여전히 천지회를 누가 창립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첫째, <엄연공사>에서는 천지회가 사천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주, 이 두 성을 가진 사람이 창립했다고 한다. 만화상 도희는 그저 광동에서 회를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 이 두 성을 가진 사람과 만화상 도희의 간에는 어떤 관계일까? 둘째, 만화상 도희와 행의의 부친 제희는 동일인일까? 셋째, 엄연이 말한 천지회의 근원은 "삼성결만리도홍, 구룡생천이주홍"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986년, 필자는 중국제일역사당안관의 <외기부>에서 민절총독 우라나와 복건순무 서사증이 제희의 아들 행의, 적전제자 진표를 심문하고 올린 글을 보았다. 거기서 마침내 의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라나의 글에서는 명확히 썼다: "천지회를 조사해보니 제희에서 기원했다. 이 자의 속명은 정개(鄭開)이고, 승명은 제희(提喜)인데 도희(塗喜)라고도 한다. 그리고 홍이화상(洪二和尙)이라고도 부른다. 장포의 사투리로 '만', '홍'은 같은 음이기 때문이다. 주, 이, 도는 실로 이소민(李少敏) 한 사람만 본 적이 있다. 주정원, 도원(桃元) 및 마구룡 화상은 제희가 전법할 때 그저 그들이 모두 멀이 있는 성의 법술이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을 뿐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엄연공사>에 있는 이,주,홍은 모두 일찌기 제희와 함께 결의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삼성결만리도홍, 구룡생천이주홍'이라는 것이 천지회의 근원을 암시하는 싯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해석이 필요한 점은 진표, 행의가 진술한 장포의 사투리 '홍', '만'이 같은 음이라는 것은 필자가 현지에서 알아본 바로는 이곳의 방언에서 '홍', '만'이 비록 비슷하기는 하지만 같은 음은 아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원시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엄영공사>를 종합하면 우리가 알 수 있다. 싯구의 전반부의 '이도홍'은 만제희와 마구룡, 주정원이 결의형제를 맺은 것이 도화이화가 피는 때라는 것이고, 후반부의 마구룡이 승천(사망)한 후, 천지회는 홍이화상, 이소민 및 주정원이 우두머리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관서, 당안을 결합하여 살펴볼 때 천지회는 복건 장포의 고게(지금은 운소에 속함)의 승려 제희 즉 홍이화상 정개가 창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