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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나라말기의 외교관련 에피소드

by 중은우시 2012. 12. 22.

글: 노위병(路衛兵) 

 

1. 단방(端方)의 기괴한 강연

 

광서32년(1906년) 칠월, 청나라조정은 예비입헌(預備立憲)의 조서를 내린다. 그리고 오대신(五大臣)을 외국에 파견하여 정치를 살펴보도록 했다. 단방, 대홍자(戴鴻慈)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간다. 캘리포니아주의 캘리포니아대학에서는 단방, 대홍자 두 사람을 대학으로 초청하여 강연을 부탁한다. 단방과 대홍자는 동시에 강연대위에 섰다. 처음에는 서로 양보하였다. 단방이 대홍자에게 말한다: "노선배께서 먼저 말씀하시지요". 그러자 대홍자가 말한다: "단형이 서방인들과 교분이 많고 법도를 아니, 먼저 발언하시지요." 이어서 벌어진 사태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단방과 대홍자 두 사람은 한사람은 왼쪽 한 사람은 오른쪽에 나란히 서서, 단방이 한마디 하면 통역이 끝난 후, 다시 대홍자에게 말한다: "노선배 맞습니까?" 그러면 대홍자가 대답한다: "맞습니다." 그후에 단방이 또 한마디를 말하고 통역이 끝나면 대홍자에게 묻는다: "노선배 맞습니까?" 그러면 대홍자는 다시 대답한다. "맞습니다." 이번 강연에서 개략 수백구의 말을 했는데, 단방은 대홍자에게 수백번을 묻고, 대홍자도 수백번을 대답한다. 당시 미국학생은 들으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국인들은 강연할 때 왜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하는지.

 

2. 건륭의 영국사신에게 보낸 조서

 

1793년, 영국사신 매카트니가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에 온다. 청나라와 장기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건륭황제는 거절한다. 당시 건륭황제가 영국사절단에 준 조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돌아가서 너희들의 국왕에게 아뢰라: 너희가 중화문화를 그리워하여 만리 먼길을 사신을 보내거 나의 생일을 축하하다니 너희들이 성의있고 공손한 것을 알겠으며, 이는 깊이 치하한다. 그러나 너의가 보낸 글에서 너희나라사람을 보내어 천조(청나라)에 상주하면서 너희나라의 무역을 보살피겠다고 하는데, 이는 천조의 체제와 맞지 않으므로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서양의 국가는 아주 많고, 너희는 그중 한 나리에 불과하다. 만일 모두 와서 사람을 북경에 보내어 머물게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너희 한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천조의 제도를 파괴할 수는 없다. 천조는 사해에 부유하고 기진이보가 많다. 너희가 성심성의를 다해서 먼 길을 온 것을 봐서 나는 이미 관련부서에 너희의 공품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천조의 은덕과 무위는 천하에 미치니, 어떤 귀중한 물건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희의 물건이 필요하지는 않다. 흠차(欽此)."

 

3. 주일대사의 처지

 

청나라말기, 청나라조정은 3품이상의 대신을 각 체약국에 파견하여 그 나라의 수도에 머물게 하고, 건물을 짓고, 부서를 두었다. 통상적으로 말하는 대사(大使)이다. 그 아래에는 참찬(參贊)등의 관리를 보냈다. 당해국가의 경축일을 맞이하면, 대사는 참찬이하 관리를 이끌고 축하하러 간다. 양추(楊樞)가 일본대사로 있을 때, 원단(元旦)이면, 무리를 이끌고 천황에게 축하하러 간다. 일본의 법도에 따르면, 외국에서 축하하러 가면 천황이 남쪽을 향하여 탁자 안에 서 있고, 사신은 탁자에서 1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북쪽을 향하여3번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그후 걸어나가서 탁자앞으로 가서, 천황과 악수를 한다. 그 후에 탁자의 한켠에 서서 축하의 뜻을 말한다. 그후에 이름을 불러서, 천황에게 참찬이하 각 관리들ㅇ르 소개하고, 각 관리들은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앞으로 나와서 축하를 한다. 예절은 대사와 같다. 일본에서 악수할 때는 모두 오른손으로 한다. 왼손으로 하는 것은 무시하는 의미가 있다. 참찬중에 왕도(汪度)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천황과 악수할 때 잘못하여 왼손을 내밀었다. 천황은 이를 보고 손을 거둬들이고 그와 악수하지 않았다. 왕도는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양추는 대경실색하여 몰래 왕도의 오른팔을 끌었다. 오른손으로 악수하라는 암시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대전의 바닥이 미끄럽고, 양추가 너무 힘을 많이 주는 바람에, 왕도는 양추가 자신에게 오른팔을 내밀라고 암시하는 줄 생각지도 못하여, 놀란 나머지 넓다란 옷에 걸려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4. 이홍장의 닭고기먹기

 

영국에서 식탁에서의 에티켓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구운 닭을 먹을 때, 먼저 포크로 누르고, 다시 칼로 잘라야 한다. 그 후에 칼로 누르고 포트로 집어서 먹는다. 1896년 이홍장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연회때 이홍장은 손으로 구운 닭을 집어서 먹는다. 영국인들은 화들짝 놀란다. 그러나 이홍장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들도 손으로 닭을 집어먹었다. 이때부터, 영국에서도 닭고기는 손으로 집어서 먹게 된다.

 

5. 영국인에게 팔음합(八音盒)을 자랑하다.

 

1793년, 영국에서 매카트니에게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게 했을 때, 열하행궁(熱河行宮)에서 건륭제를 배알한다. 영국사절단의 배가 해안에 닿자, 그들을 영접하러온 청나라군은 그들의 배에 여러가지 색의 깃발을 꽂는다. 그 위에는 중문으로 크게 글자를 써놓았다: "영길리공사(英吉利貢使)" 영국사신이 내놓은 선물리스트에 중국관리는 다시 "예물(禮物)"을 지우고 "공물(貢物)"이라고 쓴다. 이렇게 고친데 대하여 영국사절단은 아주 불쾌해 했다. 배알을 마친 후, 건륭제는 복강안(福康安)에게 명하여 영국사절단에게 행궁을 참관하게 한다. 복강안은 매카트니 일행이 팔음합에 흥미를 나타내는 것을 보고 그들이 이런 물건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여, 오만하게 묻는다. 영국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가? 그러자 매카트니가 대답한다: "이건 우리 대영제국에서 만든 것이다." 복강안을 그 말을 듣고 흥이 깨져버린다.

 

6. 배부르게 먹지 못하다.

 

일본은 매년 두 번의 중요한 명절이 있다. 봄에는 앵화절(櫻花節)이고 가을에는 국화절(菊花節)이다. 매번 이 두 명절을 맞이하면, 일본천황은 백관을 소집하여, 연회를 베풀고 꽃구경을 한다. 각국의 대사와 관리들도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연회는 서양식으로 차려졌고, 요리를 식탁에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큰 접시에 담아두고 각자 알아서 가져가야했다. 오늘날의 부페와 같았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먹을 것이 없다. 먹을 것을 가지러 갔다 오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 청나라 사신이 의복은 모두 넓고 컸으며, 소매도 길었다. 그래서 칼이나 수저를 쓰는데 불편했다. 왕왕 행동이 느렸다. 연회시간도 그다지 길지 않아서, 한입 먹고나면 미처 삼키기도 전에 연회가 끝나버리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국사신들은 배부르게 먹지를 못했다.

 

7. 관리들은 먼저 말하지 못한다.

 

영국외교관 웨이드(Wade)는 중국에 머문 기간이 길었다. 그는 중국에 대하여 잘 알았다. 그는 일기를 쓴 바 있는데, 그 안에 그와 총리아문과 교류할 때 발생한 에피소드를 적어놓았는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중국의 총리아문의 법도는 유럽각국의 외교부와 완전히 다르다. 각국 사신들이 총리아문으로 가서 일을 할 때 상대방은 반드시 먼처 다과를 올린다. 그후에 왕공대신이 같이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얘기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다: "중국의 관리는 비록 업무분담이 되어 있지만, 대신들은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매번 외국대신이 물으면, 모두 다른 사람의 표정을 살핀다. 대신들은 친왕의 눈치를 보고, 막 들어온 신임관리는 노신의 눈치를 본다. 만일 친왕이 뭐라고 말하면 대신들은 그 말이 맞든말든 모두 호응하며 연신 "맞습니다. 맞습니다."를 외친다. 만일 친왕이 말을 하지 않으면, 여러 대신들은 그 누구도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일기에는 그가 직접 격은 일도 하나 기록해 놓고 있다: "하루는 내가 아문에 일을 보러 갔는데, 여러 대신들이 아무도 먼저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다가 지쳐서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에 심(沈)씨성의 한 노신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오늘 날씨는 확실히 좋습니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이 속속 대답한다. '오늘 날씨는 확실히 좋습니다.' 그후에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8. 가경제가 영국인을 쫓아버리다.

 

1816년 팔월말, 암허스트 백작이 알체스테호를 타고 중국으로 왔다. 가경제를 배알하기 전에, 중국의 대신은 암허스트에게 황제에게 고두(叩頭)하도록 권한다. 그러나 암허스트는 거절한다. 그후에 혼란이 발생한다. 중국대신들은 어떤 사람은 밀고, 어떤 사람은 당기고하면서 영국인에게 고두를 하는 방법을 가리키려 한다. 암허스트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중국관리들이 사신들에게 무력을 쓴다고 항의했다. 그의 항의를 보고받은 후, 가경제는 대노하며, 영국인들에게 즉시 북경을 떠나라고 명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