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나라말기의 백성들이 그다지 애국적이지 않은 이유는?

중은우시 2012. 9. 21. 21:16

글: 양발불(梁發)

 

청나라말기(晩淸)의 소위 치욕은 오늘날의 애국인사들이 통탄해마지 않는 일이다. 사실상, 당시 청나라말기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굴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실상 청나라말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매력있는 시기중 하나이다. 청나라말기에 살던 사람들은 당연히 굴육이 있다. 굴욕이 없다면 나중의 변혁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공정하게 말해서, 청나라말기는 중국역사 수천년이래 유례없던 대변국(大變局)이다. 이 대변국가운데 최소한 일반백성의 각도에서 보면, 나날은 더욱 힘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화려해졌다. 신사상, 신기술, 신유행의 전래로 생활은 더욱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졌다.

 

이 주제는 오늘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 얘기하려는 것은 청나라말기의 백성들이 왜 그다지 애국적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얘기하면 마치 중국인들이 모두 통탄해마지 않았던 것으로 여긴다. 모두가 강건성세의 신선같은 생활에서 돌연 고난의 지옥으로 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인민들도 사상유례없이 애국적이고, 사상유례없이 만청정부의 대외작전을 지지한 것으로 여긴다. 사실상 그렇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서양인과 만청이 전쟁을 벌일 때, 만청의 일반백성은 그들을 통치하는 만청에 대하여 그다지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일반백성들은 그저 국외자의 신분으로 조정과 외이(外夷)의 전쟁을 바라보았다.

 

아편전쟁을 얘기하면, 교과서에서는 항상 중국인민이 분기하여 반항하고, 삼원리(三元里)의 인민들이 침략에 반항하는 전쟁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사실상, 중국의 일반백성들은 반항을 조직하지도 않았다. 영국군이 상륙한 후, 대다수의 기간동안 중국민중은 적극적으로 야채, 가축, 양식을 판매하였다. 영국함대가 주강(珠江)에서 청나라군대와 전투를 벌일 때, 현지민중들은 마치 단오절에 용주시합을 보는 것처럼 즐겁게 먼 곳에서 관전했다. 단지 삼원리에서, 사람들은 영국군이 현지여인을 강간했다는 말을 들은 후, 삼원리의 백성들이 비로소 전투에 투입된다. 그러나 이 것은 만청국가를 보위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제2차아편전쟁에서, 영국함대가 호문(虎門) 요새를 돌파한다. 주강을 따라서 북상할 때, 강의 양안에는 수만의 현지주민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냉막하고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조정과 외국오랑캐의 전투를 구경했다. 마치 무슨 공연을 보는 것처럼 청룡황기를 단 관선이 침몰되고 청군이 속속 물로 뛰어들자, 양안의 주민들은 오히려 서커스를 볼 때 재미있는 관경을 볼 때처럼 고함을 질렀다.

 

특히 제2차아편전쟁후 영국프랑스군이 원명원을 불태운 후, 현지백성, 기인들은 이 기회를 틈타서 약탈을 한다. 황실의 보물은 서양인과 현지백성들에게 깨끗이 약탈당한다. 백성들은 황가의 재산에 대하여 무슨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손속에 사정을 봐주거나 하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원명원에 방화하여 불을 지른 후, 일반백성들은 무슨 분노를 표시하지 않았다. 중국역사상, 크고 작은 강산쟁탈전이 벌어질 때, 항상 살인방화는 벌어졌고, 피정복자의 궁전을 불태우는 것은 승리자라는 가장 좋은 증명이다. 중국역사는 계속하여 백성을 동원하여 토목공사를 하고 궁전을 짓고, 계속하여 전쟁의 불꽃속에서 궁전이 불타버리는 윤회가운데 순환했다.

 

일반백성이 냉막은 오늘날 애국자들이 아마도 부인할 지 모른다. 혹은 그 불행을 슬퍼하고, 그 못남에 분노하거나, 혹은 그들이 매국노라고 질책할 지 모른다. 사실상 고생을 겪고 있던 중국의 일반백성에 있어서, 그들은 수천년의 숙명이 바로 강도들에게 계속하여 통치당하는 것이었다. 여하한 왕조의 통치자도 백성들에 대한 관심정도는 강도가 자신의 보호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지역이 넓은 이 나라는 통치자이 사유재산이다. 인구가 많은 백성은 기실 통치자의 부를 생산하는 일꾼이고, 통치자들을 위하여 강산을 보위하는 병사의 조달처일 뿐이었다. 어느 왕조이건 누가 집권하든, 일반백성의 이런 숙명은 바뀔 수가 없었다. 몽골정복자인 원나라정부는 민족차별정책을 실시한다. 다만 같은 일반백성출신이지만, 한족이었던 주원장은 백성들에게 무슨 좋은 일을 해주지는 않았다. 나중의 만청통치는 잔혹한 도살과 공포를 통한 한족인들을 압박한 외래통치자, 이민족정복자이다.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카락을 남기지 말고,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를 남길 수 없다"는 정책을 집행하고, 양주,가정을 피로 씻고, 돼지꼬리(변발)을 정복과 총성의 표지로 머리에 강요하는 굴욕도 당했다. 서양인들이 왔을 때, 중국인은 완전히 잊지 않았다. 멀리서 침입한 영국인 프랑스인과 비교하여, 높은 자리에서 고압적인 통치를 하는 만청통치자들이 더욱 큰 합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아편전쟁이 총성이 울렸을 때, 일반백성들은 냉막하게 만청과 양인의 전쟁을 바라본다. 심지어 고소해하는 심정으로 예전에 불가일세의 흉악한 만청정복자,탄압자들이 더욱 무서운 서양인들에게 형편없이 얻어맞는 것을 즐겼다. 이것은 아마도 기뻐해야할 일일 것이다. 고난이 침중한 일반백성에 있어서 노역을 당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숙명이다. 서양인들에게 노역을 당하나, 만주인에게 노역을 당하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제2차아편전쟁시, 중국인은 청나라군대의 실패를 웃음거리로 취급하였다. 영국군 총사령관 Sir Harry Smith Parkes는 이 광경을 보고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 매판(買辦)에게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는데, 매판은 이렇게 대답한다: "국가는 백성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백성도 국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국가는 그저 통치자의 사유재산이고, 남의 국가이다. 조정은 백성을 사람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다. 이런 나라, 조정, 관청이 일반백성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이 문제가 설명될 것이다. 제1차아편전쟁의 마지막 전투, 즉 1842년 진강(鎭江)에서 발생한 임인지역(壬寅之役)때, 청군의 부도통(副都統)인 하이링(海齡)은 생사존망의 순간에 백성의 사활은 돌보지 않고, 여색에 빠져서 첩을 들이고, 불전(佛殿)으로 숨어든다. 효과적으로 조직하여 적에 항거하지 않고, 도처에서 무고한 인민을 도살했고, 길가는 사람을 매국노로 체포한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성내에서 '주민 백칠십여명을 붙잡아, 훈련장에서 형을 집행한다. 부녀자와 아이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수는 오로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백성들이 말을 잘못하면, 바로 매국노로 취급하여 우리 병사가 모두 죽였다." 일반백성들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대표하는 국가와 정부에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는가?

 

일부 사람들은 초기의 아편전쟁시기에, 중국사회는 아직 민족주의가 형성되지 않았다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냉막하게 국가와 민족이 외래서양인들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있었으며, 애국정서로 그들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서양인들에 항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갑오청일전쟁때, 중국민족주의는 이미 발흥했다. 만청과 서양인의 전쟁때 중국인들이 만청에 냉막한 태도를 보이고, 심지어 감정적으로 서양인에게 편향되었다는 것은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1894년, 동북의 중요도시 구련성(九連城)을 취할 때, 이 곳을 주둔하며 수비하던 청군은 소식을 듣자 도망친다. 구련성이 현지주민은 단사호장(簞食壺漿)을 들고 일본군대를 맞이한다. 속속 닭과 돼지를 일본군에 바쳤다. 어던 사람은 일본군대를 위하여 일하겠다고 말한다. 일본의 저명한 간첩학자이자 중국통인 무나카타 고타로(宗方小太郞)는 글재주가 드러나는 고시를 하나 초안한 <십팔성의 호걸들에게 성의를 다하여 충고한다>는 글에서 "만청씨는 원래 새외의 일개 야만족이다. 수명의 덕도 없고, 중국에 공도 없다. 주명(朱明)의 쇠퇴를 틈타서, 폭력으로 빼앗았다. 당시 호걸은 무력이 당해닐 수 없어서 한을 품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무릇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이제 하늘이 승리자를 정할 때가 도래했다." 중국인들에게 "의심의 마음을 버리고, 천인의 향배를 살피고, 천하의 대세를 따라서, 중원에 창의하니, 혁명군을 모아셔 만청인들을 경외로 쫓아내고, 진찌 호걸이 초망에서 대업을 이루고, 그 후에 정치를 개혁하고, 백성의 해를 제거하고, 거짓글을 버리고 공자맹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삼대제왕의 통치를 회복하자."

 

일본인은 당연히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들이 중국에 침입한 것은 중국인을 해방시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선전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적지 않은 백성들은 정말 깃발을 들고 일본인을 환영했다. 일반백성들은 다른 뜻을 품은 일본인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고혹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초 만청통치자가 얼마나 인심을 얻지 못하였는지를 말해준다. 통치자가 국가를 개인자산으로 여기면, 통치자가 백성들에게 정복자 압박자로 행세할 때, 노역대상인 일반백성은 분명히 이런 국가나 정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논리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