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학영(馮學榮)
중국근대사 애호가라면 아마도 1924년 풍옥상(馮玉祥)이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낸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더욱 깊은 내막이 숨어 있다.
우리는 먼저 풍옥상 자신이 어떻게 얘기하는지 들어보자:
"나는 국민군을 이끌고 북경정변을 일으켰다. 북경에서 자리를 잡은 후, 나는 생각하기 시작한다: 중화민국이 수도내에, 전청왕조의 소조정이 있는데, 이것은 민국이 치욕이 아닌가? 이런 어린 황제를 남겨두는 것은 국내외의 야심가들에게 이용할 거리를 남겨두는 것이 아닌가. 이는 실로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섭정내각(攝政內閣)의 동의를 받은 후, 녹종린(鹿鍾麟)으로 하여금 부의를 출궁시키는 임무를 집행하도록 명령했다"
풍옥상의 이 자술은 풍옥상이 쓴 <나의 생활>에 나온다.(상해교육서점 1947년 초판. 509-510페이지)
풍옥상이 위의 자술에서 언급한 '섭정내각'은 누구인가? 1924년 북경정변이후 이 섭정내각의 명단을 보자:
국무총리: 황부(黃郛) (국민당 인물)
외교총장: 왕정정(王正廷) (국민당 인물)
재정총장: 왕정정 (국민당 인물)
교통총장: 황부 (국민당 인물)
내무총장: 왕영강(王永江) (국민당과 기본적으로 관계없음)
해군총장: 두석규(杜錫珪) (국민당과 기본적으로 관계없음)
육군총장: 이서성(李書城) (국민당 인물)
사법총장: 장요증(張耀曾) (국민당 인물)
농상총장: 왕내빈(王迺斌) (국민당과 기본적으로 관계없음)
교육총장: 이배기(易培基) (국민당과 기본적으로 관계없음)
참모총장: 이열균(李烈鈞) (국민당 인물)
이 섭정내각안에 9명중 5명이 국민당세력의 인물이다. 가장 중요한 직위인 국무총리가 바로 국민당 인물이다.
확실히 소위 '섭정내각'은 실제로 국민당세력이 장악하고 조종하던 내각이었다.
풍옥상은 상기 자술에서 아주 명백히 적었다. 그가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내는 건의를 한 후 "섭정내각의 동의를 받아" 사람을 보내어 집행했다고. 바꾸어 말하면, 부의를 출궁시키는 의사결정을 한 사람은 풍옥상이 아니라, 풍옥상의 배후에 있는 국민당세력이었다.
아마도, 독자는 풍옥상의 인품을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풍옥상의 자술을 믿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시문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섭정내각'에서 부의를 내쫓는 결정을 내린 후, 부의에게 보낸 <수정청실우대조건>이 있다. 이 <수정청실우대조건>의 서명자는 모두 4명인데, 바로 황부, 왕정정, 이서성, 장요증이다. 이 4명은 모조리 국민당인물이다.
바꾸어 말하면, 공식문건을 보더라도, 법률적으로 보더라도, 부의를 쫓아낸 것은 '섭정내각'을 쥐고 흔들던 일군이 국민당세력으 인사였고, 풍옥상은 단지 일개 집행자에 불과했다.
우리는 이 <수정청실우대조건>의 전문이 어떤지 보도록 하자:
민국13년 11월 6일 정부공보: <수정청실우대조건>
이에 전청황실과 수정청실우대조건을 특별히 공포한다.
이제 청황제는 오족공화의 정신을 관철하기를 원하고, 민국에 위반하는 각종제도를 오늘날 존속시키기를 원치 않으므로, 이테 청실우대조건을 좌기와 같이 수정한다:
제1조 대청 선통제는 금일부터 영원히 황제 존호를 폐지한다. 중화민국 국민과 법률적으로 동등한 일체의 권리를 향유한다'
제2조 본조건이 수정된 후, 민국정부는 매년 청황실에 오십만위안을 보조하고, 특별히 이백만위안을 북경빈민공장을 만들어 기적(旗籍) 빈민을 우선적으로 수용하도록 한다.
제3조 청황실은 원래의 우대조건 제3조에 따라 즉시 궁에서 이주하고 이후는 거주선택의 자유가 있다. 다만 민국정부는 여전히 보호책임을 진다
제4조 청황실의 종묘능침은 영원히 제사를 받들며, 민국은 적절히 위병을 두어 적절히 보호한다.
제5조 청황실의 개인재산은 청황실이 완전히 향유한다. 민국정부는 특별히 보호하여야 한다. 그 모든 공유재산은 민국정부소유로 귀속된다.
낙관:
국무총리: 황부
외교총장: 왕정정
육군총장: 이서성
사법총장: 장요증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필자가 여기서 말한 '국민당 인물'은 '국민당원'과는 다른 개념이다. '섭정내각'의 이 5명의 국민당인물이 당시 국민당원이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들은 모두 동맹회 신해혁명에 참가하였거나 제2차혁명, 호법전쟁, 호국전쟁에 참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국민정부 정계에서 보인 태도로 단정할 수 있다. 그들은 확실히 국민당의 인물이다.
무엇이 <수정청실우대조건>인가? <수정청실우대조건>은 '섭정내각'이 일방적으로 1912년의 <청실우대조건>을 폐기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결론을 보면 사정의 내막과 경위가 분명해질 것이다.
1. 1924년 가을, 제2차 직(조곤, 오패부)봉(장작림)전쟁이 발생한다. 풍옥상은 직계에 속한다;
2. 손중산, 장작림, 단기서는 3각동맹을 체결하고, 풍옥상에 반기를 든다. 풍옥상은 그리하여 입장을 바꾸어 반대편에 서게 되고, 이는 직접적으로 직계의 패배를 가져온다;
3. 풍옥상은 자신의 군대를 '국민군'으로 개명한다. 이는 '국민당을 옹호하는 군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가서 조곤을 총통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4. 이어서, 풍옥상은 일군의 국민당세력의 인사를 옹립하여 '섭정내각'을 만들어, 중앙정권을 좌지우지한다. 동시에, 풍옥상은 손중산에게 북경으로 올라와서 국사를 주재하도록 요청한다; 바꾸어 말하면, 풍옥상은 이 때, 이미 국민당의 앞잡이가 되어 있었다;
5. 이후 풍옥상은 한 가지 생각을 해낸다: 부의를 쫓아낸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이 중대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자신은 국민당의 앞잡이에 불과하므로,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국민당세력이 장악한 '섭정내각'에 올려 토론하게 한다;
6. 국민당세력이 장악한 '섭정내각'이 부의를 축출하는 의안을 최종결정한다'
7. 풍옥상은 '섭정내각'의 동의를 받은 후, 녹종린을 보내어 부의를 자금성에서 축출한다.
결론: 부의축출사건의 전후맥락에서 풍옥상의 역할은 '건의자'와 '집행자'이다. 배후에서 진정 의사결정한 것은 '섭정내각'을 농단했던 국민당세력이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부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황후 완용의 사생아 수수께끼 (0) | 2016.01.10 |
---|---|
완용(婉容)과 문수(文秀)의 후궁투쟁사 (0) | 2015.01.14 |
부의(溥儀)가 소련홍군에 체포된 경위 (0) | 2010.01.05 |
북경정변(北京政變) (0) | 2006.12.30 |
부의: 완용의 사생아를 친히 죽였다 (0) | 2006.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