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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부의(溥儀)가 소련홍군에 체포된 경위

by 중은우시 2010. 1. 5.

글: 강풍(江風)

 

1945년 8월 9일 저녁, 소련군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동북(만주)지역으로 진군하였다. 일본수상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는 최고군사위원회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오늘 아침 소련의 참전으로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이제 이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바로 이때, 중국동북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사령관 야마타 오토조(山田乙三)는 마지막까지 저항을 시도했다. 그는 키가 작고 말랐다. 이전까지는 말을 할 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어느 정도 품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 날, 그가 관동군 참모장과 함께 부의의 방을 찾아왔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같았다. 말도 빨랐고, 조급해 보였다. 그는 극력 부의에게 관동군이 소련의 진공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일본군이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믿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는 날카로운 공습경보가 울렸다. 지하실로 들어간 후에는 말투가 눈에 띄게 약화된 야마타 오토조는 바로 자리를 떠나버린다.

 

다음 날, 일본군은 퇴각을 준비한다. 부의가 소련군의 손에 들어가서 일본의 중국침략을 증언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본군은 그를 데리고 함께 만주국의 수도인 장춘에서 중국-조선 국경지역인 통화(通化)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부의는 물건을 챙겨서 길떠날 준비를 했다.

 

1931년 만주국이 성립된 이래, 14년동안, 부의와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많은 일들을 기록했고, 사진으로 남겼다. 문서와 필름이 너무 많아서, 그는 신하에게 불사르도록 명령한다. 반나절을 태워도 겨우 1/3을 태워버릴 수 있을 뿐이었다. 북경고궁에서 가지고 온 기진이보에 그의 짐까지 더해서 꼬박 57개의 대형나무상자에 넣었다.

 

8월 11일 저녁, 만주국 궁정무관이자 부의를 감독하던 일본장군 양전(良田)이 부의의 거처로 와서, 출발하라고 통지했다. 이전에 부의의형제, 자매와 조카들은 이미 기차역으로 보내어 졌고, 부의와 그의 두 처만 남았었다.

 

기차는 3일 밤낮을 달렸다. 소련군의 공습을 두려워해서, 원래 심양을 거쳐 통화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길림, 매하구를 거쳐 통화로 갔다. 노선을 바꿀 것을 미리 생각하지 못했고, 가져온 음식물이 부족하여, 이틀 밤낮동안 겨우 두끼만 먹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대율자구진에서 기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조선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둔 곳이다. 부의 일행은 산자락 아래의 일본인 광산주 집안에 머물렀다.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투항을 선언한다. 그후 미군 대장 더글라스 맥아더는 태평양함대에 일본군에 대한 일체의 군사공격을 중지하도록 명령한다. 이날, 양전은 일본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부의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에게, 미국정부가 이미 천황의 봉호와 지위를 유지하고 천황의 안전을 보증하기로 동의했다고 알려준다. 그후, 양전은 다시 부의에게 천황이 그를 일본으로 오라고 했다고 말한다. 천황은 부의의 왕위를 보증해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그의 안전은 보증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부의는 두 무릎을 꿇고 동방을 향하여 몇번 절을 하면서 입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늘이여 감사합니다. 천황의 건강을 축원합니다."

 

8월 17일, 부의는 일본으로 날아갈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에 양전이 그에게 말했다. 반드시 수행인원과 물건을 줄여야 한다고. 왜냐하면 비행기가 너무 작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의는 가장 어린 동생 부걸, 두 여동생, 세 조카, 의사와 몇몇 시종을 따르게 한다.

 

부의의 한 비빈은 울먼서 물었다: "저는 어떡하나요?"

"비행기가 너무 적다. 너희는 기차를 타고 가라."

"기차를 타고 일본에 도착할 수 있나요?"

"당연히 가능하다." 부의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비행기가 출발했다. 계획에 따르면, 그들은 오전 11시에 심양공항에 도착하고 그 곳에서 다시 일본으로 비행기를 갈아타야했다.

 

일본이 투항을 선포한 후에도, 관동군은 즉시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8월 16일, 그들은 일부 지역에서 계속 소련군에 공격을 감행했다.

소련군은 만주리 부근의 몇 개 핵심도시를 바로 장악하고, 낙하산부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정한다.

8월 19일 밤, 소련의 자바이칼스키방면군사령관인 마리노프스키 원수는 소련군사위원회 전권대표, 자바이칼스키방면군사령부 정치부 주임 알렉산더 푸리투라 장군에게 명령한다: 낙하산부대를 이끌고 만주의 군사요지 봉천을 점령하고, 관동군의 무조건투항을 압박하라; 만주국 황제 부의를 찾으라.

 

1시간후, 푸리투라장군과 부관이 공항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225명의 낙하산부대병사들이 이미 출발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장군은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들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심양을 직접 찔러들어가야 한다고. 이는 아주 중요한 도시이고, 현재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다. 일본군은 이 도시에 의탁하여 결사항전하고 있다. 소련 낙하산부대병은 반드시 신속하게 심양을 기습해야 한다.

 

그후, 수십대의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올라 심양으로 직행한다. 이는 비행편대였다. 낙하산부대와 함께 임무를 집행하러 떠난 것은 몇대의 폭격기, 전투기도 있었다. 폭격기에는 폭약을 가득 실었다. 전투기는 가장 우수한 비행사가 조종했다. 일본군대가 항전한다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비행편대가 심양에 가까워지자 전방에 돌연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래하여 편대는 임시로 왕야묘(우란하오터)에 긴급착륙한다. 이곳은 이미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편대는 기름을 보충한다. 이와 동시에, 몇 대의 전투기가 다시 편대에 가담한다. 비가 멈춘 후, 비행편대는 다시 출발했다.

 

비행편대는 도중에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심양의 상공에 도착한 후, 낙하산부대는 지면의 일본군 고사포들을 보았다. 그리하여, 소련군비행기는 먼저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아마도 소련군의 습격이 너무나 돌연하기 때문인지, 일본군은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그후 소련군은 순조롭게 심양공항에 착륙한다.

 

비행기가 착륙한 후, 수비하던 일본군은 속속 무기를 버렸다. 단지 일부 일본군 장교와 비행기조종사들만이 약간의 저항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소련군은 신속히 공항을 점령한다. 전투중에 4대의 일본군 비행기가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그후 그들은 공항 부근을 배회했고, 소련군은 그들이 공항을 공격하려는 것으로 생각해서 즉시 전투준비를 갖춘다. 그러나, 놀랍게도, 4대의 일본군 비행기는 돌연 동시에 한 방향을 날아가서 땅에 부닥쳐 부서진다.

 

이때, 공항건물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는 체격이 건장하고 머리가 회백색이며 몸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푸리투라장군의 앞에 나타나서, 유려한 러시아어로 말했다: "장군 동지, 나는 러시아 교민입니다. 현재 공항의 일본경위대 대장입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만주국 황제 부의 일행이 공항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푸리투라장군은 사람을 데리고 공항로비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쇼파, 안락의자, 차탁이 있고, 위스키와 맥주가 놓여 있었다. 로비에는 약 20여명이 있었다. 그들은 푸리투라장군을 보더니 모두 일어섰다. 부의만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손안의 찻잔을 차탁에 내려놓고 역시 일어섰다. 푸리투라는 로비 중앙으로 걸어가서 큰 소리로 선언했다: "나는 소련정부의 명의로 여러분에게 투항을 권한다. 무기를 내놓아라."

 

만주국의 장관들은 하나하나 무기를 내놓았다. 부의가 마지막으로 내놓았다. 그는 가슴에서 손잡이에 보석을 박은 권총을 꺼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그 후에 총더미 속으로 던져넣는다. 푸리투라 장군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비록 나는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시 부의황제는 자살을 할까말까 고민했던 것같다. 나는 무엇이 그에게 영향을 주어 최종적으로 총을 버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때 모든 것은 끝났다."

 

포로가 된 후의 부의는 불안하게 옷의 단추를 만지고 있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푸리투라장군을 바라보았다. 그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를 물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후에 그는 많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심문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그는 그 자리에 있던 각 장관들의 이름을 말하고, 정부문서의 보존장소를 말하고, 심양위수부대의 인원수도 말했다. 이외에 그는 간략히 심양 일본군장군과 만주국부대의 심리동향까지 설명했다. 소련정보기관 대표가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의 도움하에, 소련은 성공적으로 일본의 생화학무기를 찾아냈다. 이들 무기는 언제든지 누설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소련군은 또한 부의의 시종이 가지고 있던 두 개의 고급가죽상자를 검사했는데, 그 안에는 금은보석과 다이아몬드가 가득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것을 몰수하지 않았다.

 

다음 날, 부의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자바이칼스키방면군사령부 주둔지인 소련의 치타(Chita)시로 간다. 이곳에서 소련군은 정식으로 그의 체포를 선포한다. 1달반 이후, 그들은 하바로프스크로 보내어지고, 2층건물안에 안치된다. 이전에 이곳은 중학교였다. 당시에는 이미 제45호 특별건물로 명명되고, 하마로프스크변강구 내무국에 속했다. 그때 이곳에는 142명의 일본육군,공군장군과 2명의 일본해군대장이 구금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련군이 붙잡은 제1차 전범들이었다.

 

나중에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이 하달한 9896호 비밀명령에는 소련군이 조선과 만주에서 붙잡은 모든 일본전쟁포로를 반드시 소련군국경내로 압송하라고 하였다. 이들 포로는 모두 63.9만명이고, 그중 63.5만명이 일본이이었다. 이들 전쟁포로는 주로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국민경제건설에 종사한다. 예를 들어, 철도건설, 벌목, 석탄채굴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부의 일행은 거기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다른 노동개조도 행해지지 않았다.

 

1945년 8월 22일, 소련 내무부장관 라프렌티 베리아는 스탈린에게 보고서를 하나 올린다. 거기에는 "부의 일행이 거주하는 집은 조건이 아주 좋다. 바깥에는 골라서 뽑은 부대가 경비를 담당하고 있고, 안에는 전쟁포로국의 업무인원이 감시를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이를 보면 스탈린은 부의를 특별히 보살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제45호특별건물의 모든 방에는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심물신의 모든 비밀대화는 녹음, 기록되었다. 부의는 이 곳에서 5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 후에 중국정부에 넘겨진다.

 

1959년, 부의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특사로 석방되고, 1967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