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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북경정변(北京政變)

by 중은우시 2006. 12. 30.

북경정변이 무엇인지 우선 진욱록이 주편한 <<중화민국사사전>>을 뒤져보자.

 

북경정변: 1924년 10월 제2차 직봉전쟁(직예군벌과 봉천군벌의 전쟁)기간동안 원래 직예군벌계통의 토역군 제3군총사령관인 풍옥상이 국민당의 조곤, 오패부를 공동으로 타도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여, 열하의 전선에서 봉천군벌과 합의를 달성한 후 20일 비밀리에 군사를 북경으로 돌렸다. 풍옥상은 호경익, 손악등과 공동으로 22일 총통부의 방위부대를 무장해제하여 해산시키고, 조곤을 유폐시켰다. 다음 날, 전보를 보내어 정전을 주장했다. 그리고 국민군을 조직하여 손중산에게 북상하여 국면을 주재하도록 요청하였다. 24일 조곤은 핍박에 의하여 정전을 명령하고, 오패부를 파면하였다. 11월 2일, 조곤은 퇴직을 선언하고, 황부가 섭정내각을 조직하였다. 11월 4일, 내각은 청나라 마지막황제 부의를 자금성에서 축출하기로 의결하고, 황제의 호칭을 폐지하였다. 이어 섭정내각은 청황실과 우대조건을 수정하고 5일에 집행하였다. 11월중순 봉천군벌을 약속을 어기고 입관하였으며, 장강유역의 몇 개성이 일치하여 단기서를 옹립하였다. 24일 단기서는 임시집정에 취임한다. 다음 날 풍옥상은 하야를 통보하고, 국민군 제1군 군장 겸 총사령관의 직위를 사직하였다."

 

근대이래, 군인들이 주도한 각종 병변과 정변은 많았다. 이번 북경정변은 무엇이 다른 점인가? 왜냐하면 이번 정변의 주요인물은 "기독장군"인 풍옥상이었다. 그는 손중산과 협력했고, 더구나 그는 이후 중국정치각축장에서 아주 미묘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상당한기간동안 역사가의 눈에 이번 북경정변은 혁명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풍옥상은 정변초기에 "안민포고"를 내서 "우리의 무고한 동포들이 어찌 다시 전쟁의 해를 입어야 하겠는가" "국내의 현명한 사람을 모셔서, 공동으로 내분을 해결하자", "군인은 정치에 간여하지 말고, 옳은 일에 절대 복종한다"는 등등. 그가 병변을 일으킨 목적은 내전을 중지하고, 군인의 정치간여를 중지하고, 현인을 모셔서 같이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말들은 옛 군인들이 어느날 깨달아서 사상이 바뀐 후에 마음 속에서 끄집어낸 말로 이해되었다. 왜 오패부를 쫓아냈는지, 흉악하고 야만스러운 장작림은 어찌된 것인지, 조곤은 왜 끌어내렸는지, 단기서는 왜 불러냈는지, 왜 정변후에 내분은 더욱 심해졌는지, 왜 군인의 정치간여는 계속되었는지, 왜 동포들의 고통은 더욱 침중해졌는지 등등은 결국 혁명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에 귀착된다.

 

이번 북경정변에서는 무슨 혁명적인 색채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풍옥상이 장작림과 합작하는 것이 그가 오패부의 수하로 일하는 것보다 국가와 민족에 어떤 의미가 더 있는지도 잘 알기 힘들다. 당시 풍옥상의 수하장군이었던 녹종린은 이 정변을 회고하면서 일찌기 풍옥상과 직계군벌간에 경비, 지역등의 측면에서 갈등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가 정변을 일으킨 후에 자기의 실력과 지위가 확대되지 않고, 오히려 제지를 받는데 대하여도 고뇌했다. 만일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하나의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북경정변은 중국근대사의 다른 일부 정변과 마찬가지로, 각파의 정치역량을 다투고 이익을 재분배한데 불과하다. 국가와 인민의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지저분한 사건에, 원래는 스스로의 명예를 중시하는 호적이 끼어들 일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호적은 이 일에 깊이 빠져든다. 이것은 모두 부의의 출궁과 관련이 있다.

 

앞에 언급한 역사사전에서 "부의출궁"은 북경정변중의 아주 작은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그려져 있다. 당일 북경성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풍옥상에게 있어서는 토끼 하나를 쫓아내는 것같았고,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북경정변에서 앞뒤로 등장하는 정치인물이 너무 많고, 각종 사건이 너무 현란하여, 부의가 출궁당하는 일은 현대사에서 그리 깊이있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 많은 식견이 있던 인물들도 이 일을 본척만척 했다. 손중산, 양계초, 채원배, 노신등의 일기 연보를 찾아보면, 그들은 1924년에 적은 것은 풍옥상, 오패부등의 이름이고, 부의출궁은 완전히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아마도 사건의 주인공인 풍옥상은, "나의생활"에서 자기의 군사정치상의 각종 배치에 대하여 상세기 회고하고 있지만, 청나라 황실을 축출한 것은 "가장 의미가 있었다"는 정도의 몇 마디 문구밖에 없다. 이것은 사실 일반인의 생각에도 부합한다. 부의는 일찌기 기운이 다했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풍운을 불러일으키는 실력파 정객들이었다.

 

그러나, 호적은 아주 드문 예외에 속했다. 1924년 11월 5일, 바로 부의가 출궁하던 그날, 호적은 황부 내각에서 외교부장을 지낸 왕정정에게 서신을 보내어 항의를 표시했다. (이하에 언급된 호적의 서신은 중화서국이 출판한 <<호적내왕서신선>>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정변에 대하여 아직 언급해보지 않았었다.오늘 일시의 충동으로 몇마디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청실이 황제칭호를 보존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황실의 우대조건은 일종의 국제적인 신의, 조약과 같은 관계이다. 조약은 수정될 수 있고, 폐지될 수 있다. 그러나, 당당한 민국에서 다른 사람이 약한 것을 틈타고, 다른 사람이 어려운 것을 틈타서 강제로 진행한다면 이것은 민국역사상 하나의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이 편지는 11월 9일 <,신보>>에 발표했고, 여론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호적은 일시에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의 친한 친구이며, 그와 사상이 가까웠던 주경농, 주작인등도 호적의 태도에 찬성하지 않았다. 친구들중에서 주작인이 호적에게 보낸 편지는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이번 일은 우리의 수재같은 머리로 판단한 것이다. 혹은 '인의'에 부합하지도 않고, 신사의 행위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20년간 변발머리를 했던 고통스러운 생활을 거치고, 혁명과 복벽의 공포스러운 경험을 가진 개인의 눈으로 본다면, 나는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 정당한 일이라고 본다. 비록 역사의 영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절대 역사의 오점은 아니다." 이서화, 이종동은 호적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로 사회의 일반인들의 관점을 표시했다." 한 신문화의 지도자이고, 신사상의 대표자로서, 놀랍게 이런 논조를 발표하다니, 정말 우리의 생각밖이다...우리는 근본적으로 중화민국의 국토안에 절대로 한 황제가 중화민국과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황제의 명호를 취소하지 않으면 중화민국이 완전히 성립될 수도 없다" 이 사건의 여파는 1925년까지 계속된다. 이해 8월, 어떤 사람이 "반청대동맹"의 명의로 신문에 성명서를 발표하고, 호적을 북경에서 축출하자고 한다. 같은 해 8월 26일, 호적이 교육총장 장다교에 반대하는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상해학생연합회"는 호적에게 서신을 보내어 "호석이 작년부터 선생은 회색모래굴속에 빠졌다. 청년을 지도할 책임을 내버리고, 무료하고 더러운 일을 벌였으며 잔존세력의 복벽을 옹호했다....최근들어 시류를 역행하여, 전국교육을 망치고 학생의 인격을 멸시하는 장사교와 합작하여..." 부의출궁사건에서 풍옥상의 핍박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기서등이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들고 일어나 호적을 칭찬한 사람은 단지 부의의 스승인 영국인 존스턴이었다. 그는 호적이 "이렇게 정확하게 사정을 얘기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얘기했다"고 하였었다.

 

호적은 왜 여론의 '복벽잔여세력"으로 지목되는 리스크를 안고 청황실을 위하여 발언했을까? 일반인들은 바로 그가 두번 입궁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현대사상의 유명한 공안이다. "그는 나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황상이라고 불렀다(他叫我先生, 我叫他皇上)" 노신은 그의 바로 그 특유의 필법으로 이사건을 10개의 글자로 농축시켰다. 정교하기는 정교하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의 풍부한 내용을 감추고 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호적이 두번 입궁한 것은 그를 치는 좋은 몽둥이가 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생동감있게 호적이 부의를 만나서 삼고구배를 면하게 해달라는 우스운 광경을 묘사한 적이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지금 이 사건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분명히 알게 되었다. 당사자인 호적이 입궁후에 쓴 글은 가장 정리에 맞고 논리에 부합되었다. 호적은 <<선통과 호적>>이라는 글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은 보는 것은 원래 이상할 것도 없다. 청나라 황궁안의 이 17세의 소년은 처한 지경이 매우 적막했고, 매우 불쌍했다. 그는 적막한 가운데 하나의 비교적 괜찮은 소년과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것은 인정상으로 아주 통상적인 일이다. 중국인의 머리속의 황제사상이 아직 깨끗이 씻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 원래는 아주 인정미넘치는 사건이 신문기자의 붓끝에서는 하나의 괴이한 뉴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학자들이 말하는 "눈안에는 기녀이 있으나, 마음에는 기녀가 없다"는 것과 같이, 호적은 황제사상이 없었으므로 그의 눈에는 17세의 부의는 그저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여자들의 손에 자라난 적막하고 가련한 소년이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종의 인정, 인성의 시각이다. 그와 부의가 교류한 여러가지를 보면 그의이런 시각은 일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의가 출궁할 때, 그는 특별히 부의가 잠시 머무는 순왕부에 가서 살펴본 적이 있고, 위문을 했다. 그리고 외국으로 가서 유학하라고 권했으며,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호적의 북경정변에서의 입장이나 태도를 추론해보면, 그와 부의의 왕래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가 부의를 관찰하는 이 시각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조그만치의 사심이나 편향이 없었다면 그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람의 통상적인 감정에 부합하고, 옛날 선비들과 같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식의 퇴폐적인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북경정변이 발행한 후 부의는 군인들에 의하여 궁에서 쫓겨났다. 여기에 항의하거나 불만을 표시한 사람은 대체로 세 종류이다. 하나는 유신(遺臣)이다. 둘째는 비유신(非遺臣)인데, 괜한 일을 하나 더 벌이는 것보다는 벌이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청나라 왕실이 망해가는데 고아과부를 괴롭혔다는 불명예를 안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인데, 단기서와 같은 사람이다. 셋째는 법리의 각도에서 반대한 사람이다. 호적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그의 의견의 요점은 두가지이다. (1) 청황실에 대한 우대조건은 일종의 조약이다. 체결한 일방인 중화민국이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변경하고 폐지해서는 안된다. 둘째는 비록 변경하거나 폐지하더라도, 쌍방이 평등하게 협상하여야 하지 폭력으로 위협해서는 안된다.

 

호적의 의견이 맞지 않는가? 옛날의 우대조건을 만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정쟁쌍방이 타협한 일종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당년에 쌍방이 모두 타협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피를 많이 흘렸을 것이다. 즉, 이 조건은 청황실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년에는 쌍방 모두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어찌 공화정체가 공고히 되면서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현재와서 중화민국이 청황실에 너무 우대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당연히 시간이 흘렀으므로 조약은 수정하거나 심지어 폐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수정하고 폐지하느냐는 체약 쌍방이 먼저 요구조건을 맞추어보아야 한다. 만일 한쪽이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한다면 그것은 그저 일방적인 결정이고, 상대방에게 명령해서 집행하면 그만이 ㄴ것이다. 이것이 공동으로 준수하는 조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수정"후의 우대조건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은 군인측들도 조례는 당연히 쌍방의 합의를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정청황실우대조건>>의 첫머리에 이런 말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대청황제가 오족공화의 정신을 관철하기를 원하고, 민국에 위반하는 각종제도를 오늘날까지 계속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특히 청실우대조건을 좌기와 같이 수정한다..." 만일 "중화민국은 청실우대조건의 수정을 좌기와 같이 결정한다"라고 하였다면 일방적인 명령이엇을 것이다. 군인측도 외부에 이것은 평등한 협상의 결과라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같다. 그러나 사실은 "녹종린이 재촉해서, 말했다. 20분을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경산위에서 대포를 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료에 명확히 기재된 것이다.

 

부의의 강제출궁에 대하여, 가장 권위있는 견해는 아마도 당시 황제퇴위와 우대조건 초안에 참여하였고, 나중에 민국정부의 총리를 맡았던 당소의의 것일 것이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만일 중국에서 민국의 청황제에 대한 관계를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예의바르게 추진할 수 있었다" "우리가 우대조건에 동의한 것은 만주인의 퇴위가 혁명의 기간을 단축시키고, 인류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전력을 다하여 국가건설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견을 발표했던간에 새로운 협의가 체결되기 전에는 이 협의를 준수해야 했다...그러나 풍장군은 아마도 중화민족의 윤리원칙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같다...이것은 정치문제가 아니다. 도덕문제이다. 이것은 중국의 정체문제가 아니다. 이 국가가 예의관념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보기에 이 주장은 호적에 매우 접근해 있다.

 

어떤 사람은 법리의 입장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반대의 방향에서 우대조례를 취소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하였다. 장태염이 말한 것처럼, "6년 부의의 복벽으로 우대조건은 자동으로 취소되었다". 이것은 청황실이 민국6년의 장훈복벽사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후 소급은 보기에는 이치에 맞는 것같지만 근거는 되기 힘들다. 장훈과 같은 실력도 있고, 거치른 무인을 청황실이 제약할 방법이 있었는가? 만일 부의가 진짜 복격에 참가하여 우대조건을 취소하여야 한다면, 민국6년 복벽이 실패로 끝났을 때 왜 시 착수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부의출궁이후, 어떤 사람은 부의의 문건에서 그가 복벽에 참여하고 지지하였다는 증거도 찾아내고자 했지만, 아쉽게도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외교부장이던 왕정정은 나중에 이점을 인정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1922년, 아마도 장훈복벽후의 5, 6년이 지난 후, 그리고 북경정변 2년전에 부의는 결혼을 했다. 예물을 보낸 사람에는 오패부, 서세창, 조곤, 장작림등 유명한 인물들이 다 있다. 예물리스트에는 북경정변의 주인공이자 "기독장군"인 풍옥상이 보낸 "백옥대희여의"도 있었다. 이 희극적인 사건에서 우리는 각종 당당한 말들의 아래에 어떤 것들이 숨어있는지를 볼 수 있지 않은가?

 

부의출궁후, 1924년 11월 29일 정효서, 진보침과 함께 동교민항의 일본사관으로 도망쳤다. 1925년 2월, 부의는 다시 일본인의 보호하에 차를 타고 천진으로 간다. 그 이후의 일은 사람들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만일 북경정변이 없었다면, 부의는 출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땠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 당연히 부의가 후에 일본인에게 이용되는 것이 필연적인 논리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경정변의 발생은 최소한 일본인들에게 이것을 이용하게 하는 좋은 편리를 제공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북경정변은 또 한 명의 유명한 학자의 운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바로 왕국유이다. 정변발생후, 왕국유는 북경대학의 모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대조건에는 '민국인민은 대청황제를 외국군주의 예로 대한다'고 되어 있었다. ...제군이 이미 민국을 취소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면 모르겠으나, 그러나 여전히 중화민국의 국립대학이라면, 민국이 설립된 조건은...반드시 준수할 의무가 있지 않겠는가" 당년에 이런 말은 당연히 '우부(迂腐)"하다고 욕먹을 일이다. 그러나 현재 보면, 법리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왕국유연보장편>>에는 1924년 11월, "선생은 청황제 부의가 고궁에서 축출되자, 스스로 우울해졌으며, 자살하고자 했으나, 가족들의 감시로 이루지 못했다" 왕국유는 나중에 호수에 빠져 자진한다. 비록 여러가지 해설이 있으나, 그것과 청황실과의 관계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한 학자의 생사는 군국요인들이나 '역사의 필연성"을 말하는 인사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것이다.

 

모두 지난 일이다. 이런 지난 일들로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는 우리는 그저 말로 할 뿐이다. 그저 이 지난 일들을 기억할 때 자주 호적을 기억할 뿐이다. 그 때 그는 아주 맹렬하게 청황실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회신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그저 '황제의 명호가 취소되지 않으면, 중화민국은 완전하게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만 알고 있지만, 황제의 명호가 취소된다고 하여, 중화민국이 완전히 성립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하난의 국가의 조건은 많다...하나의 국가안에 나는 가끔 한두마디 듣기 싫은 말은 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말을 하더라도, 이것은 중화민국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너희들이 후회해도 이미 때가 늦었을 것이다" 이런 문구를 읽으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호적은 역시 호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