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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문제(漢文帝): 고대 황실에서는 어떻게 귀복(龜卜)을 쳤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16.

글: 우좌(于左)

 

유항(劉恒)은 한고조 유방(劉邦)의 아들이다. 그는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기원전180년 구월의 어느 날, 사자가 도성 장안에서 대국으로 온다. 그리고 대왕 유항에게 장안으로 가서 황제에 등극하라고 말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황위는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유항은 마음 속으로 의심이 많이 들었다. 이 큰 사변의 배후에는 도대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까? 복일까, 화일까.

 

기원전188년, 유방과 여후의 아들인 한혜제가 미앙궁에서 병사한다. 여후는 한혜제의 황후로 하여금 궁중미인의 아들을 양자로 맞게 한 후, 태자로 삼아 황위에 올린다. 황제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여후가 조정을 장악한다.

 

여태후의 사후, 승상 진평, 태위 주발등은 정변을 일으켜, 여산, 여록등 여씨일족을 주살한다. 대신들은 황위에 있는 나이어린 황제는 한혜제의 아들이 아니므로 폐위하고 다시 유방의 후손중에서 현량한 사람을 모셔야 한다고 본다.

 

당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유방의 아들중 회남왕, 대왕이 있고, 유방의 장손인 제왕이 있었다. 그중 회남왕과 제왕은 모두 나이가 어렸다. 모친의 일가가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녔다. 그래서 그들을 황제로 옹립하면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고 여후의 전철을 되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왕 유항의 모친은 박희(薄姬)인데, 공근현량(恭謹賢良)했다. 유항은 이미 성인이 되었고, 지금까지 인효로 천하에 유명했다. 그는 군주로 모시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국으로 사자를 보내어 유향을 모시기로 한 것이다. 여씨의 여러해에 걸친 화란을 겪으면서, 이때의 대왕 유항은 이미 자그마한 일에도 불안해하는 상황이었다. 황제가 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주변의 심복들과 상의를 한다.''

 

장무(張武)등은 정변을 일으킨 이들 노신들은 옛날에 모두 한고조 유방을 따랐던 사람들고, 군사에 익숙하고, 권모술수에 능하다. 지금 이미 여씨대신을 모조리 죽여벼렀으니, 그들의 동기는 알 수가 없다. 대왕을 모시겠다는 것이 함정일 수 있으니 병을 핑계로 가지 않고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송창(宋'昌)은 다르게 주장했다. 유씨의 황위는 하늘에서 내린 것이다.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다. 천하의 인심이 그렇다. 그리고 대왕과 회남왕이 한고조 유방의 두 아들인데, 대왕은 회남왕의 형이다. 대신들이 대왕을 모시는 것은 천하의 안정을 위한 것이니,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대왕은 의심할 필요없이, 대담하게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항은 그래도 머뭇거리며, 모친 박희와 상의한다. 그래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마니작에는 귀갑(龜甲)을 태워서 점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점의 결과는 금방 나온다: "봉조듣대횡(封兆得大橫')"이고 점사(占辭)는 "대횡경경(大橫庚庚), 여위천왕(余爲天王), 하계이광(夏啓以光)"이었다.

 

유항은 점사중 "여위천왕"이라는 문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대왕인데, 어찌 점사에 다시 내가 왕이 된다고 한단 말인가?"

 

점을 친 자가 해석한다: "여기서 말하는 '천왕'은 바로 '천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유항은 마음을 안심하고, 자신의 외삼촌인 박소(薄昭)를 장안으로 보내어 허실을 탐지하게 한다. 박소는 태위 주발을 만난다. 주발은 그에게 상세하게 사람들의 생각을 설명한다. 박소는 대국으로 돌아와서 유항에게 말해주며 안심해도 된다고 말해준다. 유항은 그제서야 송창, 장무등을 데리고 장안으로 간다. 여러 대신들은 그를 천자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한문제이다.

 

유항의 점복에서 사용한 것은 귀복(龜卜)의 방법이었다. 귀복은 고대 골복(骨卜)의 일종이고 통상적으로 거북의 뱃껍질(腹甲)을 사용한다. 서점(筮占)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아주 중시했던 점복방법이며, 역사가 오래되었다.

 

<사기.귀책열전>을 보면, 황실의 점복에 사용되는 거북(神龜)는 대부분 장강유역의 것을 사용한다고 한다. 여강군(廬江郡)은 매년 태복관(太卜官)에게 20마리의 신구를 바쳐야 했다. 매 거북의 크기는 약 1척2촌이어야 하고, 1천년을 자라야 이 이 정도 크기에 이른다고 한다. 즉, 천년신구이다.

 

전설에 따르면, 서점에 사용되는 시초(蓍草)가 일백경(一百莖)으로 자라면, 그 아래에 반드시 신구가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 신구를 가지고 귀갑점을 치면 가장 영험하다는 것이다: "백경시를 얻을 수 있으면, 그 아레에서 거북을 얻어 점을 칠 수 있다. 백발백중이니 길흉을 결정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구는 모두 8종이다. 북두귀(北斗龜), 남진귀(南辰龜), 오성귀(五星龜), 팔풍귀(八風龜), 이십팔수귀(二十八宿龜), 일월귀(日月龜), 구주귀(九州龜) 그리고 옥귀(玉龜). 크기로 보면 대체로 거북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수명이 더욱 길고, 알고 있는 일이 더욱 많다. 그래서, 천자가 쓰는 신구는 1척2촌이다. 제후가 쓰는 거북은 1척이고, 사대부가 쓰는 거북은 8촌이고, 보통사람들이 쓰는 거북은 6촌이다.

 

<복법상고(卜法詳考)>에 따르면, 거북이를 고를 때 거북의 크기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북이 껍질의 색깔과 명암을 본다고 한다. "거북은 큰 것을 좋은 것으로 보고, 작은 것은 쓰지 않는다. 색은 황백색으로 밝고 윤택한 것이 좋다. 검은 것이나 어두운 것은 쓰지 않는다. 오래 두어서 썩는 것도 역시 쓰지 않는다."

 

태복관에게 바치는 거북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 태복관은 길일양진을 골라서, 거북을 죽이고 귀갑을 얻는다. 거북을 죽이는데는 통상적으로, 경(庚), 신(辛)의 날짜를 택한다. 자(子), 해(亥), 술(戌)일에는 거북을 죽여서는 안된다. 주로 거북의 배부분의 귀갑을 고르고 이를 다듬는 과정을 "공귀(攻龜)"라 한다. 모두 처리한 후, 보관해두고 쓸 날을 기다린다. 준비해둔 귀갑은 매월초에 모두 꺼내어 깨끗한 물로 씻고, 다시 금란(禽卵)으로 제를 지낸다.

 

귀복때 주로 '뱃껍질'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귀판(龜板)이라고도 한다. 그 위에 몇 개의 종횡의 줄이 있어, 귀판은 몇개의 부위로 나누어진다. 각 부위에는 상응하는 명칭이 있다.

 

매번 중대한 결정을 할 때면, 황제는 묘당으로 가서, 귀갑을 태워 점을 치고, 길흉을 예측한다. 거북껍질을 태우는데 쓰는 것은 단단한 나뭇가지이다. 가장 좋은 것은 형조(荊條)이다. 보통나무의 가지는 나무의 중심이 원형인데, 형조는 나무의 중심이 방형(方形)이다. 비고적 특별하다. 형조를 어느 정도 태운 후, 가져와서 귀갑의 위에 둔다. 귀갑이 갈라지는 무늬를 관찰하고, 길흉을 판단한다.

 

형조는 전용불쏘시개로 불을 붙여야 하는데, 중대하고 장중한 점복의 경우에는 직접 "이양수취화어일(以陽燧取火於日)"한다. 태양의 불이므로 "양기가 정순하고, 극히 명결(明潔)하다" 이렇게 하여 정확한 결과를 얻고 싶은 것이다.

 

거북을 때울때는 북쪽을 향해야 한다. 거북껍질을 태우는 위치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데, <삼례도>에 따르면 이렇다: "봄에는 후좌(後左)를 태우고, 여름에는 전좌(前左)룰 태우며, 가을에는 전우(前右)룰 태우고, 겨울에는 후우(後右')를 태운다."

 

거북껍질을 태우기 전에 날카로운 이기로 거북껍찔을 뚫는다. 어떤 견헤에 따르면 찬귀(鑽龜)의 장소는 바로 거북껍질을 태우는 위치라고 한다. 정식으로 거북껍질을 태우기 전에, 축사를 읽어야 하고, 점을 치는 사항과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 이것이 소위 "명귀(命龜)"이다.

 

껍질을 태울 때, 귀판이 파면서 소리가 나면 그것은 신구가 하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귀판은 하루이틀후에도 여전히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신구가 아직도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니 한번 더 점을 쳐야 한다고 한다.

 

귀갑이 열을 받으면, 표면에 갈라진 무늬가 나온다. 이것이 점복의 근거이다. 점복자는 이들 갈라진 무늬의 장단, 형상과 명암을 살펴, 길흉을 판단한다. 통상적으로 짧으면 길하고, 소용돌이무늬이면 길하고, 대횡문(大橫紋)이면 길하다고 본다.

 

<주자어류>에서는 고인들이 귀복을 치기 전에 먼저 먹으로 귀갑에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형상은 점복의 필요에 따라 확정된다. 어떤 일일때 어떤 그림이 길조인지는 모두 미리 정해둔 것이 있다. 점을 칠 때, 그림을 그린 곳을 불태운다. 만일 귀갑이 갈라진 무늬가 사전에 먹으로 그린 그림의 흔적과 일치하면 길조이다.

 

점복방법으로서, 귀복이 존재한 기간은 아주 길다. 송나라때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귀복을 했다. 그러나 서한시기의 귀복방법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좋은 귀갑은 만사를 안다고 하며 사람들에게 장래를 에견해준다고 한다. 옛날, 귀갑은 얻기 힘든 물건이었다. 특히 궁정에서 소장하는 귀갑은 가볍게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귀갑점복이 맞지 않을 때도 있다. 이때는 금란(禽卵)으로 귀갑에 제사를 지낸다.

 

이런 의식을 지낸 후에도 여전히 맞지 않으면, 이것은 성의가 없는 것이니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런 귀갑은 불태워버리고, 불태운 재도 버린다. 이것은 다른 귀갑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다.